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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언약의 피를 마실 자 (막 14: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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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나라와 민족들은 나름대로 명절이라고 하는 좋은 제도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추수와 관련된 명절도 있고, 가족과 연관된 명절도 있습니다. 우리 같으면 설날이나 추석이 큰 명절이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유월절과 칠칠절(오순절) 그리고 한 해의 결실을 거두는 추수절인 수장절이 있습니다. 이러한 3대 절기 중에서도 그들은 유월절을 가장 큰 명절로 여기고 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강권적인 은혜로 출애굽 한 사실을 기억하고 구원의 은혜를 기념하는 명절이기 때문입니다.

명절이 다가오면 부모들은 출애굽 당시에 행하신 하나님의 기사와 말씀을 기억하면서 그것을 기념하는 유월절 의식을 행하였는데, 조상들이 애굽을 떠나 광야에서 거하며 먹고 마셨던 삶을 경험하기 위해 누룩 없는 빵과 쓴 나물을 먹었습니다. 특별히 그들은 이러한 유래를 자녀들에게 가르치고 당시의 감격을 잊지않도록 마음에 새기도록 힘써 왔습니다.

AD 70년 이스라엘의 멸망 이후, 1948년 유엔에 위하여 독립국가로 인정받기 까지 거의 1900년 동안 나라없는 생활을 해오면서도 민족의 언어와 문화, 특별히 신앙의 유산을 잊지않았던 것은 바로 부모들에 의한 자녀 교육이 얼마나 철저했는가를 잘 말해주는 것입니다.

명절이 되면 그들은 유월절 음식을 준비하고 가족들과 더불어 유월절의 의미를 되새기게 됩니다. 문제는 나그네들입니다. 고향을 떠나 있거나 집을 떠나있던 이들도 유월절을 맞이하게 되면 그들도 명절을 보내야 했는데 그래서 나그네들을 위해 방을 빌려주는 그런 좋은 관례가 있었습니다.

12절에 보면, 주님께서는 유월절을 맞아 어디에서 명절을 보낼 것인가 염려하는 제자들을 보시고 두 사람을 성내로 보내시면서 물 한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그를 따라가서 그 집 주인에게 '우리 선생님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있느뇨 하시더라'하면 예비된 큰 다락을 보여 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마치 주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입성하시기 전, 두 제자를 마을로 보내시면서 아무도 타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어 있는 것을 보거든 풀어 끌고 오라고 하시면서 누가 왜 이리하느냐고 묻거든 ' 주께서 쓰시겠다 하라'고 가르쳐 주신 것과 너무나 흡사한 장면입니다. 보냄을 받은 제자 둘은 주님의 명령만 받았지 확실한 대책은 없는 상태였습니다. 누구를 만날 지, 또 만난다고 해도 그가 나귀를 풀어줄 지 너무나도 불확실한 상황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도 보면 두 명의 제자를 보내기는 했지만 그들이 누구를 만날 지도 몰랐고, 어디에 예비되어 있는 지도 몰랐습니다. 다만 그들은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성내로 들어간 줄 믿습니다. 그리고 물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흔히 이스라엘에서 물을 길어 나르는 역할을 하는 사람은 여성들이었습니다. 해 뜨기전이나 해질 무렵에 물을 길어 가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었는데, 그들은 머리에 물동이를 이거나 어깨에 메고 가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그런데 13절에 보면, 물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이한 점은 여기서 물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이 여성이 아닌 남성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를 만나서 따라갔을 때에 놀랍게도 집 주인은 유월절을 보낼 수 있는 예비된 큰 다락방을 보여주었고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였을 때 주인은 흔쾌하게 다락방을 내어주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경우를 만날 때마다 신앙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여호와 이레'의 체험을 하는 것이지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갈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불도 가지고 가고, 장작도 가지고 가는데 제사에서 가장 중요한 번제할 어린양이 빠졌다는 아들 이삭의 지적에 아버지 아브라함은 목이 매였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이토록 모진 시험을 주실까?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셨을거야' 아버지 아브라함의 대답입니다. 사실 '네가 그 제물이란다'라고 말하기가 어려웠을 거예요. 그러면서도 아브라함의 마음속에는 분명한 확신이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사는 이방 민족의 제사처럼 결코 사람의 생명을 바치는 법이 없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지금 행하고 있는 행동은 방법보다 순종이라는 보다 높은 차원의 '신앙행위'를 하고 있는 것인줄 믿습니다. 사람의 방법이 앞서다 보면 우리는 늘 실패를 경험하지만, 하나님의 방법을 우리가 신뢰한다면 거기에는 여호와 이레의 은혜가 예비될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 하나님은 모리아산에서 이미 수양을 준비하셨고 아브라함의 헌신된 믿음의 순종을 칭찬하셨습니다.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창 22장 12절)

12명의 제자와 주님께서 예비된 큰 다락방에 모였습니다. 거기에는 유월절을 위해 준비된 떡과 잔이 있었고, 그 날 따라 분위기는 아주 숙연했습니다. 명절이기 때문에 잔치 분위기이고 들뜬 기분이어야 하는데 그 날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바라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18절의 말씀은 대단히 충격적인 말씀이었습니다. 명절 기분을 내려고 했던 제자들에게는 너무나 감당하기 어려운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모두가 근심하며 놀라 주님에게 반문합니다. '내니이까? 자신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그들은 주님에게 확답을 받고 싶었습니다. 12명 밖에 되지 않는 제자 중에서 한 사람이 주님을 팔다니요?

우리는 '맥가브란'이라는 교회성장학자의 충고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교회 성장에 관한 많은 글을 쓰며 20세기 후반을 리드해 왔던 분별력있는 영적 지도자인데, 그 분은 교회 성장의 적은 밖에 있지 않고 안에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은혜를 방해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중단시키는 적들이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있다는 지적 또한 우리에게 충격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왜 이런 일이 생깁니까? 그것은 하나님께 드려야 할 헌신의 모습중 예배(제사)라는 부분의 부실함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구약의 제사에는 두 가지 떡이 있는데, 하나는 제단에 진설해 놓는 진설병이고, 또 하나는 추수를 통해 드리는 소제입니다. 특별히 진설병이란 다름 아닌 이스라엘 백성 자신들을 상징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임재를 확신하기에 12 지파를 상징하는 12개의 떡을 항상 드려 '우리의 몸을 주님께 드립니다'라는 의미를 잊지 않아야 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성전 안의 여러가지 요소들은 바로 그리스도안에서 실현될 그림자라고 말슴하고 있습니다. (히 8:1-6)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요한 6장48절에서 '내가 곧 생명의 떡이라'고 하심으로서 장차 우리의 힘과 생명이 주님으로 말미암음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라기 1장에 보면, 제사장들과 백성들은 가장 귀한 것, 정성으로 준비된 것을 드리지 않았어요. 말라기 선지자가 말합니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라고 가증스럽게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병든 것, 저는 것, 눈먼 희생으로 하나님 앞에 드리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지적하는 말씀이겠지요.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에게 이렇게 제안하고 싶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 예배자의 모습은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모습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예배자의 모습이 동창회 가기 위해 준비하는 모습보다 못한 나의 모습, 심지어는 시장에 나가는 모습과 별 차이가 없는 모습이라면 정말 다시 생각해야 할 우리의 모습입니다. 언제나 최고이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생명을 드리는 시간이기에, 내 소망을 드리는 시간이기에 거기에 부끄럽지 않는 참된 헌신이 표현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 예배의 송영은 25장이었어요. '면류관 가지고 주 앞에 드리세...' 그렇습니다. 예배의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을 우리가 왕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있어서 왕이십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있어서 주가 되십니다.' 예배의 의미는 그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예배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모습은 무엇입니까? '정말 너희가 나를 왕으로 여기고 있구나. 정말 너희들이 이 예배를 통하여 나를 창조주로 인정하고 있구나' 그것을 표현하는 시간이 예배인 줄로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아주 큰 도전을 주고 계신 것입니다. 12명의 제자들에게 '너희 중에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는 말씀은 온전한 헌신의 삶을 살지않고 이기적인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주를 따랐던 자들에게 주시는 공개적인 도전장인 것입니다.

주님은 그 주인공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해야 할 일을 가서 하라' 가롯 유다는 그 밤에 그 곳을 떠났습니다. 제자의 자리, 축복의 자리를 떠난것입니다. 사단은 언제나 우리를 이렇듯 그릇된 길로 인도합니다. 은 30을 받고 스승을 팔기로 하였지만, 가룟 유다는 정작 그 돈을 사용해 보지도 못하였습니다.

요한 13장 27절에 보면, 사단이 가룟 유다의 마음속에 들어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로마 군병들과 만나 예수를 붙잡기 위한 작전을 세우기 위해 그 밤에 그는 주님 곁을 떠났습니다. '최후의 만찬' 성화를 보면 12명의 제자들이 6명씩 주님의 좌우에 있습니다 만, 엄밀하게 말하면 그것은 성례전을 시작하기 전의 모습이지요.

오늘은 10월의 첫 주일이어서 성찬의 의미를 말씀 드리기에 더욱 의미가 깊은 줄로 생각됩니다. 저희 교회는 매달 첫째 주일을 성찬 주일로 지키는데 다 합해보아야 12번이지만 성찬식을 자주한다고 생각하는 분은 안계신지 모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한국교회는 사순절 기간인 고난주일과 성탄절을 전후해서 2번 정도 행합니다만, 본래의 취지는 예배 때마다 해야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어떤 분들은 성찬을 너무 자주하니까 의미가 좀 떨어지는 것 같다고 하기도 하고, 어떤 분들은 Tres dias 처럼 잔도 큰잔을 사용하고 빵도 바케뜨 같이 큰 모양의 빵을 사용하면 어떻겠느냐고 건의하는 등 모두가 성찬의 의미를 좀 더 살리고 실감나게 해 보자는 좋은 뜻인 줄 알아 감사를 드립니다.

사실 예배 의식과 분위기 면에서는 카톨릭의 미사를 따라갈 수가 없을 것입니다. 웅장하고 장엄한 분위기이 성전과 온갖 성인들의 조각이나 그림들, 그리고 화려한 장식의 테코레이션은 일반인들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압도당할만 하지요.

하지만 예배의 중심은 그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아야합니다. 카톨릭 대학의 교수로 봉직하던 '마틴 루터'는 신부로서 그러한 제도와 의식에 늘 회의를 품고 있었습니다. 화려함과 웅장함의 그늘 뒤에서 신음하며 상처받는 성도들을 그는 본 것입니다. 가진 자들에게만 넉넉했던 편중된 종교 지상주의가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깨닫기 시작한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 백성들에게 권고합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호 6장 6절). 형식에 치중했던 그들에게 진정한 예배를 원하시는 주님의 속내를 잘 드러내 보여 주신 말씀입니다.

결국 그는 결단을 내립니다. 모든 기득권을 포기한채, 하나님 앞에서 살아있는 믿음의 삶에 중요하다는 것을 만천하에 공개하기로 한것입니다. 95개 조항을 내걸고 그는 외로운 영적 싸움을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뒷전으로 쳐지고 제도와 전통이 앞서가는 것을 보면서 이건 아니라고 결심을 한 그를 성령께서는 중세를 뒤흔든 종교개혁의 첫걸음을 내딛게 역사하셨던 것이지요.

오직 성경으로, 오직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이들을 '프로테스탄트' 즉 개신교라고 말합니다. 말씀 중심의 공동체에서는 성례전을 두 가지만 인정하게 되었는데, 세례예식과 성찬예식만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세례예식과 성찬예식도 아주 간소하고 의미만을 살린 예식으로 행하여 왔는데, 최근에 일부에서는 사람들의 마음에 뭔가 의미를 좀 더 강하게 심어주고자 하는 의도에서 슬그머니 카톨릭 의식을 쫓아가는 일이 생기게 되었어요.

성도 여러분, 매번 성찬을 하실 때마다 여러분들은 어떤 마음으로 하십니까? 어떤 분들은 성찬을 할 때마다 벅찬 감격에 눈물을 감추지 못하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분들은 성찬하는 것을 보니까 첫 주일이 왔구나 하며 구원의 감격 없이 그냥 참여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분명히 확신합니다. '이 많은 성도들 가운데 단 한 사람이라도 구원의 감격과 용서의 은혜를 회복하는 이가 있다면 성찬은 계속 되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Bible'이라고 말하지만, 신약성경과 구약성경을 말할 때는 'Old Testament, 와 New Testament'라고 말합니다. 'Testament'란 헬라어로 '계약 혹은 '언약'이라는 뜻입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시내산 언약입니다. 그리고 모압 평지에서 다시한번 당신의 백성들에게 그 언약을 확인시키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오늘 유월절의 은혜를 기억하며 당신의 제자들에게 새로운 언약을 선언하십니다. '받아 마시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주님께서는 유월절 그 뜻깊은 날 밤에 피의 언약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언약 속에 살기를 기뻐하시는 줄 믿습니다. 떡을 뗄 때마다 잔을 받을 때마다 '주님, 내가 주님 앞에 이 떡과 잔을 받기에 부끄러움이 없기를 원합니다.'라며 고백하기를 원하십니다.

떡과 잔을 받을 때마다 진정으로 산 제사가 되게 하시고, 눈먼 것, 저는 것, 총독도 받지 않을 그러한 것들을 드리면서 뻔뻔해 하는 그러한 모습이 아니라, 때마다 제단에 진설병을 드리는 그 심정으로 우리의 몸을 제단 앞에 드리는 진정한 헌신자들이 되시기를 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리빙스톤'은 어렸을 적 예배 시간에 말씀을 듣고 '내가 이 몸을 주님께 드려야 되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헌금 쟁반이 돌아올 때 그 위에 덥석 올라가 앉았다고 하지요. 헌금 위원이 깜짝 놀라서 이 아이가 장난을 치는가 했는데 너무나도 진지했어요. 그리고 그는 장성하여 아프리카 선교를 위해서 평생을 헌신한 줄로 믿습니다.

'장기려'박사님은 자신의 의술을 가지고 세상 사람을 온전히 섬기다가 가셔서 온 세상 사람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셨는데, 그 분의 묘비에는 단지 '주를 위해 살다가 간 사람'이라는 글귀만 써놓았습니다. 인간적인 경력이 하늘나라에서 중요한 것이 아님을 그 분은 너무나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주님 만을 위해 산다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내 마음과 뜻을 모은 예배가 된다면 주님께서는 열납하실 줄로 믿습니다. 그것이 교회 안이든, 삶의 자리든, 어디서든지 언약의 피를 마실 자로서 부족함이 없는 생활신앙의 승리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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