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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가 준비된 헌신의 주인공인가? (막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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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보면 시대와 잘 맞지 않는 표현들이 가끔 등장하게 되는데, 오늘 본문 말씀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이라는 표현이 그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지금 우리가 주로 사용하고 있는 성경은 1961년도 대한성서공회 판 이기 때문에 문법이나 의미에 있어서 지금과 많은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한글 맞춤법도 두 차례나 바뀌었고, 언어의 표현에 대한 변화도 급속한 것에 비추어 보면 이젠 새번역 성경을 사용하는 일이 시급한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소경'은 '시각 장애인'으로, '귀머거리'는 '청각 장애인'으로, '문둥이'는 '나병 환자'로, '병신'은 '지체장애인'으로 바꾸어 불리워 져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장애인'이라는 말도 '장애우'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서 그들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는 마음을 담은 단어를 사용하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어떤 언어를 쓰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내적인 성숙도도 표현되기에 우리 성도들도 이런 부분에서 조심스럽고 또 구별된 단어들을 사용하시면 좋겠습니다.

나병을 앓았다가 주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았던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 지금 적지 않은 잔치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사실은 주님을 대접하는 일이 주목적이었지만 주님을 초대하면 12명의 제자들도 따라와야 하고, 또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따랐기 때문에 많은 예산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해마다 부족한 종의 생일을 챙겨주시는 남선교회와 청장년선교회에서는 이 일을 위해 적지않은 예산을 준비해야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어디 그 많은 음식을 제가 혼자서 먹는 법은 없지요. 모르긴 해도 제가 먹는 것을 값으로 환산한다면 5,000원도 안될 거예요. 하지만 준비한 이들은 이렇게 말하지요. '이번에 목사님 생신에 50만원이 들었어.' 어떻게 보면 억울한 표현이지만 그러나 목사님 대접에 함께 했던 그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틀린 표현은 아닐 것입니다.

베다니 마을은 주님이 퍽 정을 두신 마을입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에서 가까웠고, 피곤하여 쉼이 필요할 때는 자주 이 곳으로 오셔서 쉬곤 하셨습니다. 이 곳은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부활 사건의 주인공 나사로의 동네이기도 했습니다. 어느 신학자는 조금 앞서서 '시몬이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의 부모일 것이다'라는 추측을 내놓았지만 아직은 추측 단계에 불과합니다.

이렇듯 주님과 베다니 마을은 많은 사역과 정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그 동리 사람들과도 낯설지 않은 관계였습니다. 시몬은 나병에서 고침을 받았고, 나사로는 죽음에서 부활의 기쁨을 맛보기도 한 줄 믿습니다. 그런 은혜와 사랑을 입었기에 그들이 늘 그 사랑을 잊지 않았고 더 나아가 받은 바 은혜를 표현하려고 애썼던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은혜를 받기는 쉬워도 기억하며 나누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 시몬과 나사로의 가정이 있는 베다니 사람들은 참으로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날도 그런 마음으로 주님과 일행을 대접하고 있는 가운데 옥합을 깨는 헌신의 사건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한참 말씀을 마치고 식사를 하는 중에 한 여성이 들어와서 주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3절에 보면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보석이 소중하기에 보석을 담는 보석함도 소중한 것 처럼, 값진 향유이기에 그것을 담은 옥합도 귀하였습니다. 보통의 경우에는 옥합의 뚜껑을 열어 향유를 부어 쓴 다음 다시 향유를 넣어 계속 사용하는 것이 정상이지만, 오늘 이 여성은 뚜껑을 열어 향유를 붓지 않고 '옥합을 깨어' 향유를 부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의 목적만을 가졌을 때 옥합을 깨는 것이 그들의 전통이었고 이 여성은 주님만을 위하여 이 향유를 준비한 것 같습니다. 어쩌다가 마음에 감동이 되어서 욱하는 심정으로 값비싼 향유를 주님께 드린 것이 아니라 미리 준비된 헌신의 향유라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같은 사건이 기록되어져 있는데, 거기에 이 주인공의 이름이 나와 있습니다. 그는 바로 '마리아'입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가장 소중한 옥합에 담은 향유를 주님에게 부었습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네가 나의 장사를 미리 예비하였구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행위에 대하여 중요한 의미를 부여해 주시고 칭찬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 중에서 시비를 걸어오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어찌하여 향유를 허비하느냐?' 며 마리아를 책망한 것입니다. 낭비한다는 것이지요. '이것을 팔면 적어도 300 데나리온 이상을 받을 수 있는 가치 있는 향유이기에 그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면 좋았을 텐데...' 라는 주장이었습니다. 물론 가정이기는 하지만 명분은 굉장히 좋았습니다.

이번 여름 태풍과 큰 비로 인하여 강릉을 비롯한 수많은 지역에 수재민이 발생하였는데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큰 피해요, 반면에 수재민을 돕는 수재의연금도 가장 많이 모아졌다고 합니다만 일부 사람들은 벌써부터 염려하지요. '유용하는 부분은 없을까?' 하고 말입니다. 어느 정치인의 말대로 떡을 만지다 보면 떡고물은 묻게 마련이라지만 그것이 정상일 수는 없는 일이겠지요.

분위기가 순간 긴장되었습니다. 요즘 하는 말로 썰렁해진 거예요. 옥합을 깬 마리아는 얼마나 무안했겠습니까? 정말 귀한 것을 주님 앞에 헌신하는 결단을 했는데 칭찬 받고 격려 받아도 사실 쉽지 않은 것이지요. 왜냐하면 당시 노동자의 하루 임금이 한 데나리온이어서 300데나리온이라면 노동자가 1년을 꼬박 벌어야 모을 수 있는 금액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어려운 결단의 모습을 격려와 위로로서 이끌어 주어야 마땅했는데 그는 오히려 정반대의 논리를 가지고 책망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마리아를 책망한 사람이 다름아닌 주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2장에는 그의 이름을 밝혔는데 '가롯 유다'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썰렁해진 분위기를 보시고 얼른 수습을 하셨습니다.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일 중의 하나는 그 공동체의 분위기를 은혜롭고 원만하게 이끌어갈 리더쉽인줄로 믿습니다. 오히려 6절에 보면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가만두어라. 저는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영어 성경에 보면 '저는 내게 아름다운 일을 했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모인 무리들을 바라보시며 '저는 도적이라' 고 선언하셨습니다. 정말로 충격적인 말씀이지요. 제자들 가운데 회계를 맡은 이가 가롯 유다였습니다. 가롯 유다는 12명의 제자들 가운데 가장 많이 배운 지식인이엇습니다. 베드로로 비롯하여 갈릴리 벳세다 출신들은 어릴 때부터 고기 잡는 어부들 이었습니다. 우스개 말로 가방끈이 짧은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가장 많이 배우고 가장 똑똑하다고 생각되는 가롯 유다에게 회계를 맡겨주셨어요. 그런데 지금까지 쭉 생활하면서 주님이 그를 향해 내린 결론은 놀랍게도 부정적인 평가였습니다. '저는 도적이라...'

각 선교회나 단체마다 회계가 있습니다. 회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면 이렇게 까지 말할 수 있어요. '회계는 회장보다 중요하다' 회장이 좀 부족해도 회계가 잘하면 그 기관은 건강하게 지탱되지만 회계가 부실하면 어려워요. 어떤 선교회는 회원들이 회비를 잘 안낸답니다. 그래서 운영이 굉장히 어렵가고 합니다. 기본적인 경조사나 선교비 감당하는 것도 어렵대요. 그래서 왜 그렇게 어렵느냐고 하니까 회비를 잘 안낸답니다. '회비를 달라고 하기가 어려워요' 하지만 그것은 스스로 무능하다는 이야기와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회계라고 직책은 그 단체에서 '회비를 내십시오'라고 말할 수 있는 권한을 유일하게 위임받은 사람입니다. 회계가 돈을 내라고 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지요. 그런데 그 권리를 가진 사람이 회비를 내라고 말을 못한다니요, 이게 무슨 소리예요. 그래서 회계는 잘 정해져야 합니다. 리더쉽이 있는 사람이 회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회계가 잘못된 방향으로 똑똑해서 그 돈을 잘못 유용하는 사람들이 있어 문젭니다. 재무를 맡은 사람들 중에는 재정 규모가 커지다 보면 잘못된 생각을 갖게 되지요. 사업을 하는 분들이 당장 어려우니까 '이거 일주일만 쓰고 다음 주일 안에 얼른 갖다가 놓아야지...' 동기야 나쁘게 시작하지 않았겠지만 그것이 쉽게 갚아집니까?

감사한 것은 저희 평안의교회가 창립된 지 만 20년이 됩니다 만은 그 동안 재정을 맡은 분들 가운데서 한번도 재정 사고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부서가 다 귀하지만 재무부 위원들은 담임목사가 120% 신뢰할 수 있는 분들만을 엄선할 수 밖에 없어요. 그리고 다 맡기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재정 사고를 예방하기 위하여 회계와 부장님이 통장과 도장을 따로 보관합니다만, 두 사람이 마음만 맞는다면 끝나는 거잖아요. 결국은 신뢰입니다. 정말 신중하게 기도하며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선택했다면 그 후에는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가롯 유다는 주님께 신뢰를 받을만하지 못했어요.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주님께서 가롯 유다에게 말씀하시기를 '저는 도적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 가룟 유다가 마리아를 보고 '저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명분은 너무 그럴 듯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속마음까지도 아셨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때로 우리가 귀한 책임과 사명을 맡게 될 때 정말로 신뢰받고 인정받는 청지기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적어도 그분은 돈에 관한 한 정확하고 깨끗하다' 그런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대강 대강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가롯 유다는 얼마나 불행한 결과를 가져왔습니까? 그는 예수님을 팔 때에도 은 30을 받고 팔았지요.

결국 그의 인생은 늘 부정한 돈과 연관이 된 삶이 되었고 그로 인해 결국은 스승도 팔았습니다. 돈이 일만 악의 원인이 된다고 했을 때 이는 바로 가룟인 유다를 보고 한 말씀같지 않습니까? 돈을 잘 다스리기 바랍니다. 돈에 끌려다니지 마세요. 성경은 '재물이란 날개 달린 독수리와 같다'고 했습니다. 재물에 날개가 달렸다면 그 날개 달린 재물이 내게 오도록 만들어야지, 무슨 재간으로 쫓아가겠어요? 그러므로 축복은 쫓아다녀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어주셔야 되는 줄 믿습니다. 이것이 크리스챤의 바른 물질관입니다.

자, 이제 또 다른 말씀으로 들어가기 원합니다. 8절에서 주님은 마리아의 일을 이렇게 평가하십니다.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그렇습니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라고 할 때에 그 힘은 곧 생명이라고 말씀 드린 기억이 납니다. 생명을 드리는 헌신이 아니면 진정한 헌신이 아닙니다.

이번에 아시안 게임이 부산에서 열렸습니다. 내일 폐막식을 앞두고 있는데 아시안 게임에서 각 나라마다 금메달을 몇 개씩 따는가? 하는 메달 레이스도 흥미가 있지만 사실 그 메달을 따려고 하는 선수들의 모습도 흥미롭지요. 우리가 아는 것처럼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따면 연금을 받고 포상금을 받는 것은 남녀 공통이지만, 군대를 가야 할 남자 선수들은 병역을 면제받게 됩니다. 엄청난 혜택이지요.

이번에도 금메달을 딴 선수들이 많았는데, 특별히 야구의 경우에는 '드림팀'이라고 해서 나이가 든 선수도 있었지만 젊은이들도 많이 있었어요. 그 중에 김진우, 김상훈, 조영준, 같은 선수는 군에 갔다 오기 전의 젊은이들이었는데 금메달을 따므로서 인하여 명예와 함께 군복무를 면제받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탁구의 유승민 선수나 수영의 김민석 선수 같은 경우도 같은 혜택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정말 군 면제를 받고 싶은 선수들도 있었어요. 축구의 이동국 같은 선수는 얼마나 병역 면제를 위해 애를 썼던지 아는 사람은 다 알지요. 그런데 이번에 동메달에 그쳐 실망감이 매우 컸을 것입니다. 어느 종목에서는 서로 금메달을 따려고 한국 선수끼리 경쟁하다가 결국 금메달은 중국 선수에게 놓치고 2, 3위가 되어서 둘 다 군대를 가게 되었답니다.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서로 경쟁하다가 결국은 모두가 패배자가 된 셈이지요. 문제는 우리의 노력이 얼마나 순수한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면서 명예를 얻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정말 주님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마음을 썼는지, 아니면 내 육신의 명예와 이익을 위해서 더 관심을 가지고 행동하였는지 한번 뒤돌아보는 계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듬어져야 합니다. 300 데나리온 이상의 값진 향유의 옥합을 깨어 주님께 드린 마리아는 주님의 영광, 주님의 장사를 예비하는 것 외에는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조금이라도 다른 생각을 했다면 그는 옥합을 깨지 않고 뚜껑을 열었을 거예요. 100% 헌신이라는 말입니다.

요한 웨슬리 목사님은 그리스도인 중에 설익은 이들을 'almost christian' 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냄새가 나긴 하지만 세상 냄새가 아직도 많이 난다는 것이지요. 그런가 하면 푹 익은 성도, 성숙한 그리스도의 향기를 지닌 이들을 가리켜 'all together christian'이라고 했습니다. 속이 꽉 찬 사람들, 안을 보아도 밖을 보아도 주님의 제자로서 부끄럽지 않은 사랑 실천의 모습으로 가득차 있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표현입니다.

사랑은 순수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3장 7절에서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좀 능력이 부족한 남편을 쳐다보면서 '언젠가는 잘 될거야. 언젠가는 우리 남편도 아무개 남편만큼 그렇게 멋있는 남편될거야' 기대하면서 평생 살잖아요. 바라고 사는 것입니다.

엊그제 뉴스 중에 실종자 가족에 대한 뉴스가 나오는데 어느 어머니는 35세 넘은 아들이 어느날 갑자기 집을 들어오지 않아 행불자가 되었는데 지금까지 수많은 세월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식사 때면 아들의 밥과 국과 수저를 차려 놓고 식사를 한다는 것입니다. 기자가 '이제 너무 오래되지 않았는냐?' 고 묻자 어머니는 내 마음에는 '식사 때면 어머니 배고파요 . 밥주세요' 하면서 들어올 것 같아 그런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어머니 마음 아닙니까? 바라는 거예요. 기다리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이렇게 질긴 것인데,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이란 계산하지 않고 나누는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최근엔 부부간에도 계산하는 커플들이 생긴다고 해서 염려가 됩니다. 부부의 사랑이 계산적이 되면 끝입니다.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도 마찬가지 입니다. 어느 자식은 돌아가시기 전의 부모에게 윽박질러 자기 앞으로 집 명의를 옮겨 놓았다고 합니다. 계산적일 때에는 불행한 결과가 오기 마련인데 그것은 평안이 아니라 두려움이지요.

주님 앞에 계산적이지 않은 마리아의 헌신, 뿐만 아니라 자기에게 주어진 헌신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던 마리아의 삶처럼, 이 시대를 살아가기를 다짐하는 여러분 위에 주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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