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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안식후 첫날의 기적 (막 16: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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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이 주는 이미지는 우리들에게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이고 또 두려움과 무서움을 주는 등 어두운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릴 때 공동묘지를 지나가는 일이 생기면 서로 가지 않으려고 하고, 꼭 가야 할 길이면 정말 마음을 단단히 먹고 지나가지만 때때로 머리카락이 바짝 서고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무서운 경험들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또한 무덤이 주는 부정적인 이미지는 거라사에서 군대 귀신 들렸던 이가 다른 곳이 아닌 무덤 주위에 거하면서 주민들을 공포에 떨게 한 사실을 보더라도 잘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무덤에 대한 또 다른 이미지를 하나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흘동안 계셨던 무덤인 줄 믿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바로 그 무덤을 향해 찾아가고 있었습니다. 여성들이 이른 아침에 무덤을 찾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 무덤은 아리마대 요셉이 사용하려고 했던 꽤 규모가 큰 무덤이었기에 무덤의 입구를 막고 있는 큰 돌을 굴려내는 일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3절에 보면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라고 그들은 그 부분을 염려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향품을 가지고 무덤으로 향했습니다. 주님께서 평소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 (눅 11:29-30) 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며 그들은 소망가운데 부활의 주님을 기대하며 무덤으로 달려간 줄로 믿습니다.

주님께서 장사지낸바 된 후,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은 공개되지 않은 곳에 모여 주님의 죽으심을 슬퍼하며 울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우리 주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 하며 그들은 애통하며 낙담하고 있었습니다. 10절에 보면, 부활의 주님에 대한 소식을 듣고 감격하며 돌아간 마리아가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사람들에게 찾아가 자신의 감격을 전했지만 놀랍게도그들의 반응은 썰렁했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살으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아니하니라' 11절의 말씀입니다.

다니엘의 경우를 생각해 봅니다. 다니엘은 다리오 왕의 통치 시절, 120명의 방백을 다스리는 세 명의 총리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왕은 이 가운데서 마음이 민첩하여 총리 가운데서도 뛰어난 다니엘으로 하여금 전국을 다스리게 하고자 하자, 이를 시기한 총리와 방백들이 고소할 틈을 엿보게 되었고 왕에게 건의하여 30일 동안에 누구든지 왕 이외에 어느 신이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굴에 넣기로 하였고, 왕은 어인을 찍어 재가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서 6장10절에 보면, '다니엘은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다니엘은 알고도 행했습니다. 전에 행하던 대로 하나님을 향한 기도생활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사자굴에 던져졌지만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화가 변하여 복이 되게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

다니엘에게 있어서의 사자굴의 고난은 우연한 고난이 아니라 예견한 고난이라는 것이지요. 내가 이 길을 갈 때에 어떠한 어려움이 올 것인가를 그는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마치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후, 로마 군병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신 것 처럼 말입니다.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가라사대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가라사대 내로라 하시니라' (요 18:4-5)

다니엘을 사자굴에 넣은 후 다리오 왕은 밤잠을 못이루며 안타까워하다가 이튿날 새벽에 일어나 급히 사자굴로 간 왕은 슬피 소리질러 다니엘의 안부를 물어봅니다. '사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너의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사자에게서 너를 구원하시기에 능하셨느냐?' 놀랍게도 사자굴에서 응답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나이다' (단 6:20-21)

다니엘을 향한 불타는 신뢰와 애정이 다리오 왕으로 하여금 잠 못 이루게 하다가 새벽에 사자굴로 급히 달려가게 한 일과, 주님을 향한 신뢰와 부활의 소망에 대한 사모함이 새벽 일찌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성들로 하여금 무덤으로 달려가게 한 것은 모두 감동적인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무덤에 도착한 여성들에게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무덤의 돌은 벌서 굴려져 있었고, 흰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아있다가 그들에게는 말합니다.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예수를 찾는구나. 말씀하신 대로 그는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부활의 메시지 중에 가장 감동적인 대목이 바로 6절의 선언입니다. '그는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그리고 그 청년은 여성들에게 부탁합니다. '가서 전하라' 하지만 막상 이 엄청난 사실에 놀란 그들은 정신이 없었습니다. 너무 놀라웠고 너무나도 두려워 아무에게도 아무 말을 못하였다고 마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9절에 보니까 예수께서 안식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이 우리에게는 대단히 도전적입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일 먼저 찾아가셔서 보여주실 사람들은 바로 제자들이 아니가 하는 것입니다. 미워도 다시한번 처럼, 제자 중에서도 베드로에게 먼저 보여주셔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주님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셔서 새벽에 일찍이 약속의 말씀을 의지하고 무덤을 찾아왔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여 주신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일곱 귀신이 들렸던 그 여성에겐 자랑할 만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여성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주목받을 만한 지위나 명성도 없는 그에게 오히려 주님께서는 찾아와 만나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은혜요 사랑인줄로 믿습니다.

사실 주님의 은혜는 알고 보면 언제나 파격적이예요. 그래서 찬송을 작사한 이들이 이렇게 고백하지 않습니까?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육신의 정욕과 죄악된 삶을 살았으나 주님의 은혜로 치유 받은 죤 뉴톤의 고백은 이제 모든 성도들의 변함없는 고백이요 찬송이 된 줄로 믿습니다.

감격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이제 정신이 들었어요. 슬퍼하며 울고 있는 제자들의 공동체에 달려갈 생각이 난것입니다. 마리아가 그들에게 외칩니다. '예수께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내게 오셔서 부활하신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일입니까? 11절에 보니까 그들은 듣고도 믿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가 주님을 만난 후에 눈이 밝아져서 주님을 대접한 이후, 그 밤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왔습니다. 슬퍼하며 두려워하는 제자 공동체에 와서 우리가 주님을 길에서 만났고 집에서 대접까지 했노라고 했지만 그들 역시 믿지 아니했다고 13절은 말씀하고 있어요.

또 있습니다.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주의 종 베드로가 복음을 증거하다가 헤롯 왕에 의해 감옥에 갇혔습니다. 유월절 후에는 끌어내어 주의 사도 야고보처럼 칼로 처형할 예정이었습니다. 놀란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베드로를 위해 간절히 기도합니다. 5절에 보면,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의 사자를 보내셔서 베드로를 일깨워 감옥에서 나오게 하셨고, 주의 손길이 그를 헤롯의 손에서 건져주심을 깨달은 베드로는 즉시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마가의 다락방으로 달려가 자신임을 알렸으나, 심부름하는 아이 '로데'는 베드로를 보자 너무 놀란 나머지 문을 열지 않은채 베드로 사도의 돌아옴을 전하자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말합니다. '네가 미쳤구나...'

주님께서 살아나셨고 지금 나에게 보여주셨다고 부활의 증인이 증거를 해도 믿어주지 않습니다. 지금 문 밖에 우리가 밤새 기도하던 베드로가 오셨다고 전해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평소에 말씀 중심으로 산다던 우리가, 늘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겠다먼 우리가 결정적인 순간에 이런 엉뚱한 반응을 보일지 두렵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관록이 아닙니다. 오래된 신앙의 연조가 우리를 살리지 못합니다. 늘 두렵고 떨림으로 주님앞에 서야할 이유가 거기 있는 것입니다. 오늘 처음 교회에 나온 것처럼, 오늘 처음 성가대에 선 것처럼, 오늘 처음 대표기도하는 것처럼 그렇게 순수한 마음으로 기다리면서 모습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예배에는 상업화된, 숙달된 조교같은 모습은 필요하지 않는 것입니다.

금요일 저녁, 시내산선교회 총회가 강원도 둔내 보광 휘닉스 리조트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독감으로 몸이 좋지 않아 주일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그냥 집에 있으려고 했습니다만, 선교회 총무님과 회계가 거듭 전화를 주셨습니다. '목사님, 꼭 참석하셔야 합니다. 아산에서 일하고 있는 탁석균권사님도 올라오시고 새벽에 일을 시작해야하는 윤석범권사님도 올라와 참석한답니다...'

그 말을 들으니까 마음이 그냥 저려요. 그래서 제가 '가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대답을 하고서는 나머지는 주님께 맡기기로 하니 마음이 홀가분해졌습니다. 3시간이 넘게 걸려 도착한 후 곧바로 기도회를 겸한 총회를 했습니다. 자정이 넘어서야 총회를 마쳤는데 두 분은 과일 한 조각 집어 들고는 다시 3-4시간을 달려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감동 그 자체지요. 먼길을 마다않고 달려와 자신들의 사명을 불평 한마디 없이 감당하고 돌아가는 그 분들의 뒷모습을 보려니까 눈물이 핑 돌아 입구에서 배웅하고는 돌아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 내가 최선을 다해 목회를 해야 하는지 그 이유가 분명해지면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는 정말 예상치 못한 것입니다. 주님을 감동시키는 일들이 습관적이고 의무적인 행동에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을 을 우리는 고백합니다. 그러나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어지는 상황속에서 헌신의 모습을 다할 때, 우리뿐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감동이 되겠지요. 주님께서 '너희가 땅에서 풀면 내가 하늘에서도 풀겠다'고 약속하신것 처럼 말입니다. 성도를 감동시키고 목회자를 감동시키는 성도가 있는 평안의 공동체가 자랑스러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지요. 할렐루야 !

평안의교회는 지난 20년 동안 이런 분들에 의해서 여기까지 달려 온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올해 사명자 사역축제의 주제로 '20년을 하루 같이' 변함없는 사명으로'라고 정했답니다. 제가 이 제단을 섬기기로 작정하였을 때는 20대 후반이었는데, 요즘은 만나는 분마다 인사가 '아유, 머리가 반은 쉬셨네요' 그렇지요. 이제 내일 모레면 50인데.....

뿐만 아니라 여러분들도 저와 함께 이 평안의 제단에서 젊고 좋은 시절을 다 보내셨어요. 저는 지금도 '마리아 선교회' 하면 신혼 부부 같아요. 기분에는.. 하지만 그분들도 40이 넘었다고 생각하면 깜짝 놀랍니다. 20년의 세월이 정말 하루 같이 지나갔어요. 하지만 그 세월속에 막달라 마리아 같이 보잘 것 없고 정말 연약한 인생이라고 밖에 할 수 있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큰 은혜를 베푸셔서 오늘날까지 말씀 붙잡고 승리의 삶을 산 줄로 믿습니다.

주님께서 울고 있는 제자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울고 있는 그들의 모습 속에는 두려움도 있었고, 불신앙도 있었습니다. 주님이 다시 사셨노라고, 내가 부활하신 그 주님을 만났노라고 증거하지만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정작 믿어주어야 할 사람들이 믿어주지 않을 때처럼 속상한 일이 어디있겠습니까?

진짜 믿었어야 할 베드로와 제자들도 믿지 않았어요. 이게 웬일입니까? 정작 기대했던 사람들에게 큰 실망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막달라 마리아를 통해서 제자들에게 주의 부활의 소식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복음이 역수출되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고향 갈릴리로 다 돌아갔지만 주님은 약속하신대로 갈릴리까지 찾아가셔서 제자들을 만나신 줄로 믿습니다.

찾아가신 주님입니다. 너무나도 연약한 모습을 그들은 보였지만 주님은 그 먼 곳까지 찾아오셔서 만나주시고 위로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만나심은 단순히 위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명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네가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다면,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요 21:15-17).

이 시대를 사는 성도 여러분들, 주님을 믿되 습관적으로 믿으면 안됩니다. 슬퍼하며 때때로 기도 하면서도 그것이 습관적인 행위가를 되어서는 구원의 감격과 은혜의 역사를 맛볼 수 없습니다. 부활의 소식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그런 존재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같이 보잘 것 없고 연약한 존재일지라도 부활의 주님께서 먼저 만나주시고, 부활의 기쁨을 전해 주셨음을 기억하면서 소망가운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주님께서 부활 후 첫 만남을 막달라 마리아를 택하심은 놀라운 일입니다. 베드로가 아니고 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을 일곱 귀신에서 쫓아내 주신 것만 해도 평생 감격하며 살일인데, 부활 후 제일 먼저 찾아와 주셨으니 너무 감격입니다. 사실 감격은 이렇게 예상하지 못하는 곳에서 넘치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부활의 확증을 주셔서 믿지못하고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만나주시고 새로운 사명을 주신 주님과 함께 세상을 향하여 '안식후 첫날, 예수께서는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고 담대히 증거할 수 있는 부활의 산 증인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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