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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이 행하신 첫 번째 기적 (요 0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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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처음 베푸신 기적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어주신 사건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많은 기적 중 특히 7개를 선택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보여주신 기적이 그 첫 번째에 해당됩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한 이 사건이 주는 감동은 그 기적의 현장이 소박하고 따뜻하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를 뽑는 과정에도 이런 현상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제자를 뽑으실 때, 요즘처럼 광고를 내서 시험을 보거나 면접을 보는 방법을 쓰지 않습니다. 세례 요한의 소개나, 친구 또는 동생의 소개를 받습니다. 때론 예수님께서 일대일로 만나서 뽑으셨습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는 기적의 현장에서도 개인적이고 소박한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작은 동네의 기적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가나라는 마을에 가셨습니다. 가나는 나사렛 동네에서 멀지 않은 평범하고 초라한 도시입니다. 요즘 성지순례에서도 가나는 예수님께서 그곳에서 기적을 일으키지 않으셨다면, 특별히 여행객이 찾지 않을 소박한 동네입니다. 그렇게 소박한 동네에서 혼인잔치가 베풀어집니다. 1절과 2절을 보십시오.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인에 청함을 받았더니

그 결혼식이 열린 동네는 유명하지 않은 동네입니다. 예루살렘도 아니고 나사렛도 아닙니다.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기적이라고 하면 화려하고 멋있는 장소에서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팡파르를 울리면서 일으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보면 의도적인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서 필요에 의해서 일을 하십니다. 그래서 더 감동적입니다.

예수님께서 40일을 금식하신 후에 광야에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은 사건이 있습니다. 사단은 40일간 굶은 예수님께 돌을 떡으로 만들어 보라고 합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렇게 복잡하게 메시야임을 증명할 게 아니라 돌을 떡으로 만들어 너의 주린 배를 채울 뿐 아니라 만방에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릴 수 있지 않느냐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유혹을 단호히 거절합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라며 물리칩니다. 사단은 계속해서 예수님을 공격합니다. 네가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라 그러면 시편의 말씀처럼 천사가 너를 돌봐주지 않겠느냐고 합니다. 그러면 네가 구태여 십자가를 지지 않아도 되는 게 아니냐는 겁니다.
우리들 주변에도 이런 유혹이 많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서 화려하고 멋지게 하면 쉬울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의 법칙으로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하니
지극히 작은 동네인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베푸신 기적의 동기 또한 재미있습니다. 3절에 그 동기가 있습니다.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예수님이 ‘가나’라는 아주 작은 도시의 혼인잔치에서 기적을 베푸신 이유는 무얼까요? 포도주가 없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쉽습니까? 얼마나 간단합니까?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야인 것을 보여주기 위해 기적을 베푸신 게 아닙니다.
구제는 왜 합니까? 간단합니다. 그 사람이 배가 고프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왜 치료합니까? 그 사람이 아프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이렇게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환자가 돈을 낼 수 있는 사람인가 아닌가 먼저 구분합니다. 도와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편이니까 도와주고 상대 편이면 돕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삶의 공식이 당장에는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복선을 깔지 마십시오. 무슨 일이든 조종자가 되지 마십시오. 그냥 있는 그대로 하십시오.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주고, 병든 사람을 치료해주고, 외로운 사람은 위로해주십시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이요.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형식화되고, 제도화된 조직 속에서 우리 신앙의 현주소를 찾으려 합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사람 사이에 믿음이 깨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목적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대선’이라는 목적을 두고 말을 하니까 여당의 얘기도, 야당이 하는 말도 순수하게 전달이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하는 말이 틀려서가 아닙니다. 동기가 나쁘기 때문에 전달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관계가 순수하기 바랍니다. 동기를 순수하게 갖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뜻이 전달되고, 영향력을 미치게 됩니다.

예수님이 기적을 일으키는데 가장 순수한 영향력을 미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마리아에게는 두 가지 센스가 있었습니다. 첫째, 그의 섬세한 영적 센스입니다. 잔치가 한참 흥이 나 있기 때문에 아무도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만 발견합니다. 이것이 영적 센스입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겉으로는 왜 그렇게 우울해하는지, 어머니의 영적 센스로 원인을 발견하고 섬세하게 배려해 주어야 합니다. 자녀에게, 남편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영적 상태를 깨달을 수 있는 센스가 필요합니다. 교회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일을 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는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발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진다면, 흥겨운 분위기가 깨진다는 것을 마리아는 직감했습니다.

마리아에게서 배우는 두 번째 센스는 더 중요합니다. 마리아는 누구보다 먼저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발견했지만, 이 사람 저 사람 찾아다니며 혼내지 않았습니다. 조용히 곧장 예수께로 갑니다. 마리아가 예수께로 찾아가서 하는 말이 더욱 기막힙니다.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여기서 마리아는 월권을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더러 포도주가 떨어졌으니 만들라고 명령하지도 않습니다.
우리의 경우라면, 자신이 직접 나서고 싶어할 겁니다. 그리고 뒤에서 조종하고, 말을 부풀리고, 상대를 심부름 시킵니다. 그래서 관계에 문제가 생깁니다. 저는 여러분의 믿음에 마리아의 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무슨 일이든지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하지 못하는 것을 구분하는 것은 지혜입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오만입니다. 할 수 있는데 못한다고 하는 것 또한 지나친 겸손입니다. 할 수 있는 것을 그저 조용히 행하면 됩니다. 혹시 할 수 없는 문제에 부딛치더라도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진 것이 없는 건 죄가 아닙니다. 내가 아프고 돈이 없다고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예수님께 고백면 됩니다.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예수께로 나아가 겸손히 고백하는 것이 우리가 바라는 ‘복’입니다. 이것이 지혜입니다.

너희가 나를 믿느냐
4절과 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포도주가 다 떨어졌다는 말을 들은 예수님의 반응은 냉랭합니다. 그 반응에 섭섭한 마음까지 듭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반응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이고, 두 번째는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입니다. 얼른 들으면 거절하는 것처럼 들리고, 불친절한 것 같고, 상처받기 쉬운 말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경험이 있습니다. 우리는 새벽마다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하고 하소연하는데 응답이 없습니다. 우리는 사람에게만 상처받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도 상처를 받습니다. 어쩌면 마리아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의 앞뒤를 살펴보면 굉장한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마태복음 15장 21절 이하에 비슷한 사건이 하나 나옵니다. 귀신들린 딸을 가진 가나안 여인이 있습니다. 그 여인이 예수께로 나와 “예수여 나의 딸을 고쳐 주소서. 내 딸이 흉악한 귀신에 붙들려 죽게 생겼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23절에 보면 예수님은 침묵을 하십니다. 예수님의 반응은 의외로 차갑고 냉정합니다. 그것을 보다 못한 제자들이 예수께로 찾아와서 여인의 청을 들어줄 것을 말합니다. 24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라고 아주 차갑게 거절합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여자가 25절에서 울면서 주님께 매달립니다. 그때 예수님이 더 듣기 거북한 이야기를 합니다. 26절을 보면,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이 말을 들은 여인이 얼마나 상처를 받았겠습니까? 그런데 이 여인은 여기서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대들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더 가까이 갑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그 여인은 자신이 개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리고는 ‘부스러기라도 주십시오’라고 간청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빙긋이 웃으면서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라고 말하자 그 딸에게서 귀신이 떠납니다.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이 여자를 골탕 먹이려고 하셨을까요? 아닙니다. 고쳐줄 마음이 없으셨을까요? 아닙니다. 여기에는 굉장히 중요한 의도가 있습니다. 믿음입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와 자기 딸의 문제를 의논했을 때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다급한 마음뿐이었습니다. 그 여인과 예수님의 관계에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간단합니다. 다른 곳에서 보여준 기적도 마찬가지입니다. 병을 고치고 기적을 베푸실 때 그냥 베푸시지 않습니다. “내가 정말 고쳐줄 거라고 믿느냐”, “예수여 내가 믿습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여기서 기적과 믿음의 관계가 나타납니다. 예수님에게도 때가 있고, 사람에게도 때가 있습니다.

오늘 성경의 4절과 5절 말씀에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에서 말하는 ‘상관’은 믿음을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자기 어머니가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요청을 했지만, 예수님은 먼저 자신이 포도주를 만들 것을 믿느냐고 묻습니다. 관계를 묻고 있는 겁니다.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것”은 예수님의 때와 마리아의 때가 다르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때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상관’과 ‘때’라는 단어에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포도주를 만드는 일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예수님이 바뀌길 원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좀 회개하고 깨지십시오. 내가 이렇게 급한데 어떻게 그러실 수 있습니까.” 우리는 언제나 이런 태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깨지길 원하고, 예수님은 우리가 깨지길 원합니다.
이런 문제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면서 시험에 듭니다. 고쳐만 주고, 해결만 해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더 중요한 것은 너와 나와의 관계’라고 말합니다. ‘네가 정말 나를 신뢰하고 있느냐, 네가 죽을지라도 나를 신뢰하느냐’ 라고 묻습니다. 이렇듯 기적은 내용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입니다.

그분 때문에 하는 순종
영적 센스가 탁월한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마자 그 뜻을 금방 알아차립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예수님의 말을 알아듣는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왜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문제를 주셨는지 깨닫는 지혜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를 하고 있지만, 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지속되는지 그것을 알아차리는 지혜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그 대답이 5절에 나타납니다.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묻지도 않고 말합니다.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라고 지시를 내립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문제의 핵심을 깨달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이렇게 오래도록 방황하는 것은 문제의 핵심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핵심을 찾지 못한 채 문제만 해결해 달라고 하고 있는 게 여러분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끔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하십니다. 노아의 방주가 좋은 예입니다. 바닷가도 아닌 산꼭대기에 그것도 왜 하필 방주 같은 배를 지으라고 하셨을까요? 하나님은 때때로 이성과 상식에 맞지 않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 내용을 보면 순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순종합니다. 기적은 그 내용을 보고 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하시는 분을 보고 따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갈대아 우르로 떠나라고 말씀하신 사건도 황당합니다. 어떻게 무작정 조국도 가족도 모두 버리고 나그네 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런 준비도 없이 말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순종합니다. 그것이 할 만해서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하시는 그분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 뒤에는 반드시 기적이 따라옵니다. 믿음이 없는 기적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통해서 믿음의 증거인 기적을 베푸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을 신뢰하십니까? 여러분이 원하는 때에 여러분이 원하는 목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도 하나님과의 관계는 지속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75세에 후사에 대한 약속을 받고서 100세까지 아이가 없었습니다. 왜 100세까지 아이를 주시지 않았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은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과 인간이 한 일과 분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나이인 100세에 아이를 주신 겁니다.
우리는 급할 때 하나님께 구하지만, 나중에는 다 자기가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 영광을 돌리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기적은 이제부터 시작됩니다. 환경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실패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여러분과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의 때를 이해하는 영적 센스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내 안에서 회복되기 시작하면 하나님이 기적을 일으키시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복을 주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변화되길 원하십니다. 여러분이 행복해지길 가장 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말씀 그대로 순종하는 마리아의 영적인 센스가 여러분에게도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기막힌 삶의 주인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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