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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빛과 어둠 (요 03: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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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 주간 동안 니고데모를 통해 기독교의 핵심 진리인 거듭남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무엇인가요? 예수님께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 진정한 거듭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식, 세상, 인간적인 것으로 거듭나는 것은 가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거듭남의 실체는 무엇인가요?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이 거듭남의 실체입니다. 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믿는 것이 거듭남의 실체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을 듣고 묵상할 때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나며 감격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믿어지며 받아들여지고 내면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을 가리켜 거듭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거듭남의 주체는 사람이 아닙니다. 흔히 ‘나는 거듭났습니다, 당신은 거듭났습니까, 언제 거듭났습니까’라고 말합니다. 거듭남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거듭남에 대해 갈등하는 것은 자신의 힘으로 거듭나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담스러워 하고 어려워 합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이 거듭남의 실체라면, 그 주제와 내용은 ‘사랑’입니다. 찬송가 404장을 기억하십니까? 하늘을 두루마리로 삼고 바다를 먹물로 삼아도 하나님의 사랑을 다 표현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좋은 표현입니까? 하나님의 크고 넓고 높고 깊은 사랑을 기록한다면 어디든 무엇으로든 다 기록하지 못한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리.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이것이 요한복음 3장 16절에 나타난 하나님 사랑의 모습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포기하고 주는 사랑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주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입니다. 우리 사랑의 본질은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죽이고 내가 사는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어떤 특별함이 있습니다. 자기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였던 사랑입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하나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주십니다. 심지어 하나님됨을 포기하시면서 주는 사랑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이란 하나님 자신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모든 것을 잃은 것이고 포기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사랑의 특별함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을 가장 좋아합니다. 이 말씀에는 또 하나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신실하시고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에 불화가 발생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사랑에 열정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도 죽도록 사랑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의 사랑과 다릅니까? 우리의 사랑은 변한다는 사실입니다.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 사랑을 확신하지만, 미래의 사랑은 누구도 보장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부부가 살다가 이혼하게 되었습니다. 부인이 자꾸 이혼할 것을 요구합니다. 남편은 그걸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부인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남편은 최선을 다해 많은 것을 아내에게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내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당신은 내게 많은 것을 주었지만, 꼭 필요한 것 한 가지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당신 자신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좋은 것을 주면서 사랑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더구나 독생자까지 주셨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을 내어주는 것은 쉽습니다. 제게 죽으라고 하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의 아들을 죽이라면 저는 괴롭습니다. 제가 죽는 것보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독생자를 죽이셨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의 깊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위대한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이 말씀에 선물의 특징이 세 가지로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 위대한 사랑입니다. 둘, 구원하는 사랑입니다. 셋, 독생자를 주신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이 영원한 구원을 주는 이유는 미리 계획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창조 때부터, 내가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께서 이 선물을 주시려고 계획하시고 준비하셨습니다.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그것은 내게 꼭 필요한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없어서 안될 사랑의 선물이며 그게 바로 요한복음 3장 16절의 선물이었습니다.

여러분, 구원과 거듭남에 대해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나는 거듭나지 않은 게 아닐까? 나는 구원받지 못한 게 아닐까? 하고 의심하지 마십시오. 구원은 받는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구원을 주는 분의 문제입니다. 거듭남도 주는 분의 문제입니다. 거듭남은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선물입니다. 안심하십시오. 거듭남은 이미 준비되었고, 구원은 선물입니다. 종교적인 행위 즉 새벽기도, 십일조, 선한 행위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걸로 얻어지는 게 구원이라면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런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미 선물을 준비하셨습니다. 우리는 받기만 하면 됩니다. 지금 당장 받아들이기만 하면 구원은 우리에게 임하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앙은 율법이 아니고 은혜입니다. 이미 주어진 것이기에 감사가 있습니다. 신앙 생활에서 감사함이 필수 요소인 것은 스스로 노력해서 얻은 게 아니고 공짜로 얻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을 가진 사람의 특징은 눈물이요, 감사입니다. 그걸 가지고 자랑하거나, 뽐내거나, 자신의 이론을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좋은 신앙을 가진 사람은 찬양하며 눈물을 흘리고, 감사하며 감격하는 것입니다. 1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심판이 아닌 구원이 목적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신 목적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 목적은 세상을 심판하시는 게 아닙니다. 죄와 죽음과 저주로 이미 심판 받은 세상을 구원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자식을 야단치는 것은 자식을 버려 놓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징계의 목적은 자식을 얻는 데 있습니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많은 고난, 이해할 수 없는 일, 저주스러운 사건은 하나님께서 나를 죽이고, 심판하고, 파멸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구원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세상에서 겪는 모든 시련, 고난, 역경, 환란, 질병, 절망은 희망이 될 수 있습니다. 18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하나님의 목적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얻는 것입니다. 구원은 내가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사람은 두 가지로 반응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 결과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세상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도 서로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돌아서게 됩니다. 사랑할 사람들이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가 됩니다. 또 구원은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저 괜찮은 게 아니라 심판이라는 결과를 낳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을 받아들이는 사람, 완전하고 영원한 구원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심판은 없습니다.

심판이란 무엇입니까? 예를 들면 검찰에서 죄를 기소합니다. 그때까지는 괜찮습니다. 재판부에서 재판을 하고 마지막 확정에서 선고를 합니다. 그러면 끝입니다. 심판은 인간이 죄를 지은 것에 대한 하나님의 선고가 끝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심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받아들였다는 것은 이미 선고가 끝났는데 그것을 특별 사면, 특별 복권을 시켜서 없었던 일로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에서 3절까지 말씀에서 인간의 본질을 네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인간은 허물과 죄로 이미 죽은 존재라고 합니다. 둘째, 세상 풍속을 따라다니는 존재라고 합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본질적으로 세상을 따라가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을 따르지 않으려고 할 때 어려움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본질적으로 죄를 짓게 되어 있고, 세상 풍속을 좇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세 번째 본질은 어떤 것인가요? 공중 권세 잡은 사탄에게 종노릇하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제일 쉬운 게 사탄을 따라 다니는 겁니다. 그것은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다고 합니다. 이미 인간은 죄로 인해 영적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믿음만이 구원의 탈출구
19절 말씀은 영원한 진노와 심판을 받을 존재이지만, 그분을 믿고 사랑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심판이 없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공간에 폭탄이 설치되어 있고 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 문을 통해 나가면 살고 그렇지 않으면 죽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저주와 절망과 심판의 죽음에서 탈출하는 것과 같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심판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롯에게 당장 아내와 자식을 데리고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롯이 가지고 있던 재산, 사업은 중요하지 않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롯이 그 화려하고 매력있는 도시를 버리고 떠납니다. 왜냐하면 그곳에 있으면 죽게 되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롯의 아내는 아름답고 화려한 소돔과 고모라를 잊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됩니다. 죄에서 탈출했을 때 그게 구원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 노아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방주를 지으라고 하십니다.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모양과 크기의 방주를 바다가 아닌 산에다 지으라고 하십니다. 하루 이틀도 아닌 몇백 년 동안 지으라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합니다. 여러분이라면 할 수 있습니까? 노아는 지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내게 늘 익숙한 경험, 이성, 상식, 사고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아이디어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아이디어였다면 쉽게 이해했을 겁니다.

우리는 모두 아무 탈 없이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삶의 순간을 견뎌내는 것밖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편을 먹고 순간을 견뎌내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쫓기고 불안해합니다. 언제 병에 걸릴지, 삶이 어떻게 끝날지 모릅니다. 눈을 돌려 세계를 보십시오. 일부 선진국 사람들을 제외하고 중국, 인도, 아프리카 등 인류의 90%는 지옥과 같은 환경에서 살고 있습니다. 최근 우리는 그 지옥을 경험했습니다. 매춘 굴에서 화재가 났는데 감금당해 빠져 나오지 못하고 죽은 영혼들이 있습니다. 얼마나 불쌍한 영혼들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업소 주인은 인신매매를 통해 치부하여 호화주택에 살고 있습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동물은 그런 짓 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사람에 대해 적이 되고, 착취하고, 남의 피를 빨아 나만 잘 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개인뿐 아니라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우리는 심판 안에 살고 있는 겁니다.

왜 빛으로 나오지 못하는가
19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사람들은 왜 빛을 믿지 못하는가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인간의 교만으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잘못되어서 안 믿는 게 아니라 교만 때문입니다. 19절 말씀에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라고 되어 있습니다. 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선이 잘못된 게 아니라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악은 선을 거부합니다. 불의는 진리를 거부합니다. 어두움은 빛을 거부합니다. 요즘 우리 주변에 발생하고 있는 많은 일들이 다 이런 현상을 말해 줍니다. 몰라서 하지 못하는 게 아닙니다. 내가 어둠 속에 있고, 내가 부정을 행했고, 내가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빛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겁니다. 모르는 게 아니라 알면서도 못 가는 겁니다. 이것이 어둠의 속성이요, 불의의 속성이요, 악의 속성입니다.

19절 말씀에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깡패 조직에 속한 사람은 잘못 된 것인 줄 알면서도 빠져 나오지 못합니다. 어둠 안에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습니다. 그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더 악하게 나쁜 일을 저질러야 합니다. 그곳에서 선한 일을 하면 밀리게 됩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악하고 잔인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빛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까닭은 내가 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20, 21절 말씀을 보십시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왜 빛으로 나아오지 못하는가 하면 자신의 악이 드러나고 겁이 나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만 두고 빛으로 나아가고 싶어도 그러지 못합니다. 어둠에는 불안이 있습니다. 절망과 좌절이 있습니다. 그래서 빛에 대한 질투, 미움, 복수심에 불타게 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복수심, 믿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를 갖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결론은 하나입니다. 빛으로 나오십시오. 그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빠져나와야 삽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고쳐보겠다는 생각은 위험합니다. 지금 빠져나오지 않으면 죄악과 사탄과 더불어 죽게 됩니다. 죄에서 나오십시오. 그것이 구원입니다. 그것이 요한복음 3장 16절의 이야기이며 거듭남의 이야기입니다.
“이 기쁜 소식을 온 세상 전하세.” 거듭남의 이야기를 미룰 것이 아니라 온 세상에 빨리 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 죽을 지 모르는 인생입니다. 오늘 빛으로 나오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은혜의 잔치에 들어오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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