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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된 양식 (요 04:2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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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리아 수가성의 여인은 대화를 통해 예수님이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여인은 대화의 끝마무리에서 예수님에게 내가 바로 그로라 하는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늘도 땅도 우물도 그대로였지만 메시아를 발견한 여인의 마음에는 엄청난 충격으로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사람이 그리스도를 만나면 변합니다. 세상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바라보는 세상은 달리 보이기 시작합니다.

삶의 목적을 찾은 여인
바로 그때 빵을 사러 갔던 제자들이 도착했습니다. 27절 말씀입니다.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저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이가 없더라

예수님께서 여자와 대화하는 모습을 목격한 제자들은 놀라고 의아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관습에 랍비가 여자와 단둘이 공개적으로 만나는 것은 적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을 천대하는 사회 분위기에 예수님의 행하심으로 제자들은 몹시 당황했습니다. 28, 29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이 여인에게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제자들은 그것을 이해할 수도, 알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28, 29절에서 여인에게 일어난 일을 세 가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첫째,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떠난 것입니다. 여인이 우물에 온 목적은 물을 긷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메시아를 만난 후 자신의 목적을 잊어버렸습니다. 물동이에, 물긷는 것에 관심조차 없어졌습니다. 여인은 모든 것을 내버려두고 동네로 뛰어갔습니다.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의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나름대로 인생의 목적과 사명을 가지고 삽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나면 전혀 다른 세계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 두고 지금까지 살아왔던 인생의 목적과 방향을 전부 바꿨습니다.

둘째, 여인은 동네로 뛰어 들어가 사람들에게 자신이 만난 메시아를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메시아를 만났는데 와서 보시오. 그분을 만나 보시오’라고 초청했습니다. 여인은 동네 사람들이 자신을 가십거리로 삼는 게 싫었습니다. 그래서 사람 만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항상 피해 다녔습니다. 그런데 메시아를 만난 후 마을 사람들을 찾아간 것입니다.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갔습니다. 복음이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내가 꺼려했던 사람을 찾아가게 합니다. 가고 싶지 않은 곳으로 기쁘게 뛰어 갑니다. 이 여인처럼 ‘메시아를 만났다. 와 보라’고 초청하는 용기도 생깁니다.

셋째, ‘우리가 대망했던 메시아, 오실 메시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메시지를 정확히 찾았습니다. 지성인이며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있었고, 종교적으로 성숙했던 니고데모는 진리를 갈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에게 ‘거듭나야 하겠다’는 요구를 받았지만, 그는 확실하게 대답하지 못하고 사라집니다. 이 여인은 무식하고 천박하며,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이름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님을 만났고, 인생의 목적을 확실히 붙잡는 메시지를 가졌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이 30절 말씀에 있습니다.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에수께로 오더라

사마리아 수가성 사람들이 여인의 단순한 메시지를 듣고 예수님 앞으로 나왔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입니다. 누가 이 여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겠습니까? 신기하게도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비록 부족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일지라도 내가 예수님을 만났다라고 확신있게 선포하면 사람들은 그 말을 듣습니다. 수가성의 사람들은 여인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정말 메시아인지 알아보려고 예수님께로 나왔습니다. 39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자의 말이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거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말을 듣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개인의 지식, 능력, 사회적 지위를 전하는 게 아닙니다. ‘내가 예수님을 만났다라는 이 단순한 고백과 감격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예수님을 믿게 하는 능력이 됩니다. 40, 41절 말씀을 보십시오.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

수가성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여인이 전한 말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이 직접 예수님을 만나 말씀을 듣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예수님께 인도하는 중간 역할을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그 사람의 마음에 믿음을 심으십니다. 42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니라 하였더라

전도할 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을 소개하고 사람들을 데리고 주님 앞에 나아오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믿게 하십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지 못해 믿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기회가 없어 못 믿는 것뿐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만나기만 하면 믿을 것입니다.

영혼을 채우는 영원한 양식
이런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대화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31, 32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가로되 랍비여 잡수소서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대화가 삐걱거리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육적인 데 관심이 있고, 예수님은 영적인 데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대화가 통해야 합니다. 부부, 부모와 자녀, 형제 사이에 대화가 통해야 합니다. 빵을 사러 동네로 들어갔던 제자들이 돌아왔습니다. 다같이 빵을 먹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잡수시지 않았습니다. 33, 34절 말씀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제자들은 빵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육적인 사람의 관심은 오로지 육적인 것입니다. 영적인 사람은 항상 영적인 것입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는 말씀처럼 육적인 것은 결국 사망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육신의 배를 채우는 양식에 있는 게 아니라 영혼을 채우는 영원한 참된 양식에 있습니다. 4장 10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라고 하십니다.
여인은 물을 길으러 우물에 왔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과 여인은 서로 관심사가 달랐던 것입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적인 생각에 말려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오늘날 말씀이 없어서 들리지 않는 게 아니라, 알아듣지 못해서 진리가 없는 시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계속 친절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참된 양식이란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고…. 제자들은 예수님과 여자의 대화 내용이 무엇인지 몰랐을 뿐만 아니라 관심도 없었습니다. 여인의 영혼에 대해 불쌍히 여기거나 구원의 관점에서 보지 못한 겁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일을 할 때면 영적인 관점으로 봐야 하는데 자꾸 실리적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게 대부분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제자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병들고 지치고 외로운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일이고, 뜻입니다. 그들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양식을 주는 게 하나님의 일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양식이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고 또 그것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양식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고 누리기 위해 오신 게 아닙니다. 죄인을 위하여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곡식이 무르익어 추수할 때
그리고 제자들에게 자신의 비전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비전이 35, 36절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이것이 예수님의 비전입니다. 비전은 높게 멀리 보는 것입니다. 남이 볼 수 없는 것을 봐야 합니다.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지 않았느냐, 죽어 가는 수많은 영혼들을 보느냐? 낫을 대기만 하면 곡식을 거두는 때가 되었다’. 저들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 영원히 배고프지 않는 양식을 먹이는 게 예수님의 비전입니다. 넉 달이라는 것은 씨를 뿌리고 나서 추수하게 될 때까지 기간을 말합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고 난 후 4개월이 지나면 추수 시기가 되는데, 지금은 씨 뿌리는 때가 아니라 곡식이 무르익어 추수할 때입니다. 추수할 때 하지 못하면 곡식을 다 버리게 됩니다. 눈앞에 펼쳐진 기막히게 잘 익은 곡식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세계에는 굶주려 죽어 가는 영혼들, 1달러로 하루를 사는 사람이 10억-12억 명 가량 된다고 합니다. 중국이 12억, 인도가 10억, 모슬렘 국가가 12억 인구입니다. 종교적으로 힌두교가 8억, 불교가 3억 6천, 무종교가 7억 6천 명 정도입니다. 중국의 전통 종교가 4억 명으로 추산됩니다. 예수님을 모르고 죽어 가는 수많은 영혼들이 천지에 가득합니다. 직장에서 주위를 한번 둘러보십시오. 동서남북을 살펴보면 추수할 곡식들이 낫을 기다리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곡식이 희어져 추수할 때라고 말씀하십니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은다고 했습니다.

추수하는 자가 누리는 복
여기에 중요한 게 있습니다. 하나, 긴급성을 말합니다. 눈을 들어 밭을 보라, 때가 되었으니 낫을 들고 빨리 가서 추수하라는 것입니다. 시간을 놓치면 모든 걸 망쳐버립니다. 둘, 추수하면 상급과 열매가 있습니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도 거두게 됩니다. 셋, 기쁨을 주십니다. 씨 뿌리는 자와 추수하는 자가 함께 기쁨을 얻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씨 뿌리는 자와 추수하는 자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씨 뿌리는 수고를 하지 않고, 추수하여 상급과 열매를 얻는 일에 동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씨를 뿌렸으므로 지금은 열매를 얻는 때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자의 영광에 추수하는 자로서 참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37, 38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느니라

오늘, 예수님의 비전을 선포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할 때가 되었다. 씨 뿌리는 노력을 하지 않았지만 나가서 곡식을 거두기만 하면 추수하는 축복과 기쁨과 상급과 열매에 동참시킬 것이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우리 교회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비전에 가슴 벅차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과 동일한 비전을 소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썩어질 양식을 위해 인생을 낭비하지 말고 영원히 썩지 아니할 양식을 위해 삶을 규모있게 설계하십시오. 우리의 인생을 예수님께 바치기 바랍니다. 더 높은 사회적 위치, 더 안락한 육신의 생활에 인생을 팔지 마십시오. 젊었을 때 고생이 되더라도 썩지 않는 영원한 양식에 투자하십시오. 이것이 주안에서 인생의 보람이요, 축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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