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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안식일과 주일 (요 05: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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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안식일에 베데스다 못가에서 절망하고 있던 38년 된 병자를 낫게 하셨습니다. 그 병자는 걸었고, 뛰었고, 춤추게 되었습니다. 너무 감격해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미간을 찌푸리며 분노했습니다. 1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

유대인들은 예수를 자신들이 신봉하는 구약 종교를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는 사람으로 이해했습니다. 또 자신들의 기득권과 권위를 짓밟는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예수가 무슨 일을 하든 기분이 나쁘고 화가 났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대답하십니다. 17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예수님은 안식일을 부정한 게 아니라 잘못된 생각을 고쳐 주신 것입니다.

사람 살리는 ‘안식일 정신’
하나님께서 만드신 안식일의 본 뜻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제사보다 자비를 원하십니다. 예배, 제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을 살리는 일입니다.
마태복음 12장 말씀에서 안식일에 대한 논쟁이 나타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안식일에 길을 가다 배가 고파 밀밭 사이로 들어가 이삭을 잘라먹었습니다. 이를 본 유대인들이 시비를 걸었습니다. 왜 안식일에 이삭을 따먹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에, 안식일 법에 저촉되는 것이라고 비난합니다.
예수님은 5-8절 말씀에서 다윗의 예를 들어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가난하고 병들어 절망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시고 사랑하시는 겁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마음을 뒷전에 두고 종교적인 권위, 형식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현재 교회 안에서 이런 모습을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형식, 제도, 전통을 중시해 자신들을 고통 안에 가둬 놓고 스스로 힘들어합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이런 고통에서 해방시키는 안식일의 정신, 즉 하나님의 마음을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자를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규례에 맞지 않는다고 분노를 터뜨렸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하시니 나도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8절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마침내 유대인들은 살기까지 품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죽여야 한다’로 발전한 겁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안식일을 다른 의미로 변질시켰습니다.

십계명에 기록된 행복의 비결
창세기 2장 1-3절 말씀에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제 7일에 쉬셨습니다. 여기서부터 안식일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안식하시는 동안 창조하신 것을 보고 좋아하며 기뻐하고 즐겼습니다.
이 중대한 사실을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율법의 계명으로 주셨습니다. 십계명은 우리가 지켜야 할 행복의 비결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는 열 가지 비법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안식일을 지키는 게 축복임을 십계명에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계명을 지키게 하여 계속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도록 하신 겁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굉장한 축복입니다. 출애굽기 20장 8-11절 말씀에 십계명 중 안식일 계명이 있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안식일은 복된 날이고 거룩한 날입니다. 누구든지 6일 동안 힘써 일하고 제 7일은 하나님을 기억하고 안식하면 세상의 모든 피곤은 사라지고 우울증이나 신경질도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새롭게 될 것입니다. 이게 축복이요, 사랑이요, 회복입니다.

유대인들의 뒤틀린 안식일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반드시 안식일 지킬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은혜, 자유, 회복, 충전 등 안식일의 축복을 율법과 계명으로 바꿔 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명령하자, 유대인들은 너무 열심이 많아 세분화된 법조문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토라에 미슈나를 더하여 39가지 금지 사항을 규정하였습니다. 물론 성경에 없는 것들입니다.

예를 들어 밭갈이, 파종, 수확, 건물의 건축과 해체, 방직, 바느질, 사냥, 도살, 망치질, 요리, 빵굽기, 글쓰기, 불을 켜는 것과 끄는 것 등에 대하여 규정하고 있습니다. 미슈나 규정은 안식일에 1천m까지 걸어가면 괜찮고, 그 이상 가면 죄가 됩니다. 그것을 준수하지 않으면 거룩하지 못한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위반하는 게 됩니다. 바느질을 두 번 하면 괜찮고, 세 번하면 죄가 됩니다. 손수건을 들고 다니면 일하는 게 되고, 붙이고 다니면 일하지 않은 게 됩니다. 지금 유대인들은 생활에서 이런 규칙들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율법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자유를 규칙과 율법으로 돌려놓았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면 안 되고, 이삭을 먹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는 사라지고 형식만 남게 되었습니다. 형식의 껍데기를 잘 지키면 좋은 믿음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게 되며, 그렇지 않으면 열등감을 느끼고 죄책감을 갖게 됩니다. 그것을 예수님이 깨뜨리신 겁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을 부정하신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말라 고 하신 적도 없습니다. 예수님도 살아 계시는 동안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안식일의 참 뜻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가 생긴 의미를 왜곡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잘못된 안식일에 대한 규례와 확대 해석을 정상으로 돌려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사보다 자비를 원하십니다. 진정한 안식일은 사람을 살리고 휴식하며, 회복을 얻고 사람으로 하여금 일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안식일의 진짜 주인은 예수님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안식일의 원래 의미대로 순종하고 살면 육신의 생활, 영적 생활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합니다. 안식일의 축복은 창조이래 지구 종말 때까지 계속할 것입니다.

안식을 주일에 지키는 이유
이제 안식일을 왜 토요일에 지키지 않고 주일에 지키느냐 하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원래 안식일은 일주일의 끝인 토요일입니다. 주일은 일주일의 시작입니다. 유대인들이나 안식교인들이 토요일을 안식일로 고집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주일에 모여 하나님께 예배드립니다.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안식 후 첫날에 부활하셨습니다. 여기서 안식일이 주일로 바뀌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안식일을 지키셨지만, 안식일에 부활하지 않고 안식 후 첫날에 부활하심으로 주님의 날을 안식일로 바꿔주신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은 제사였습니다. 일년에 한번 성막에서 양과 송아지를 잡아 하나님께 제사 드림으로써 나아갔는데, 이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더 이상 제사 드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제사를 드리지 않고 예수님 십자가의 보혈로 단번에 완전하고 영원한 제사를 드린 겁니다.
더 이상 구약의 제사를 드릴 필요 없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의지해 나아가면 죄 용서함을 얻고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일에 부활하심으로써 주의 날, 축복의 날, 승리의 날, 감격의 날, 은총의 날, 용서의 날로 승화시켜 주신 겁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안식 후 첫날에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모든 게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안식일이라는 단어를 아홉 번 사용하는데, 그 중에 구약의 안식일 개념으로 사용된 것은 전혀 없습니다.

사도행전 1장 12절 말씀에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기록되어 있어 안식일을 지켰다는 흔적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13장 14, 27, 42, 44절 말씀에 안식일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그 날에 회당에서 성경을 가르치고 복음 전한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5장 21절, 16장 13절, 17장 2절, 18장 4절 말씀에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성경을 읽고 기도처를 찾아가며 성경을 가르쳤다고 했습니다. 구약 개념의 안식일처럼 거룩하게 지킨다고 1천m 이상 걷지 않고, 파종도 하지 않는 것은 결코 없습니다.

안식후 첫날 예수님 만난 사람들
초대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안식 후 첫날 부활하신 것으로 인해 안식일을 축제의 날, 기쁨의 날, 사람 살리는 날, 봉사의 날, 성경 공부의 날, 복음 전도의 날로 정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말하는 안식일의 개념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마가복음 16장 9절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안식 후 첫날에 처음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는 데서부터 모든 게 달라지고 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예수님을 만난 것도 안식 후 첫날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도 안식 후 첫날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날도 안식 후 첫날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축복의 주일을 주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장 10절 말씀에 밧모섬에서 요한이 환상을 본 것도 안식 후 첫날입니다.
안식일의 개념이 바뀌었다기보다 완성되었다고 봐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일에 교회로 와서 예배, 교제, 봉사하는 겁니다. 때로 주일에 더 피곤할 수도 있습니다. 쉬기는커녕 반주, 채임버, 심방, 각종 봉사활동에 저녁 예배까지 봐야 합니다.

안식일은 일주일의 끝, 주일은 시작
토요일에 반드시 쉬십시오. 몸도 마음도 안식일처럼 푹 쉬어야 합니다. 안식일은 일주일의 끝입니다. 주일은 일주일의 시작입니다. 주일은 축제의 날입니다. 교회에 와서 찬양, 기도, 전도, 교제로 떡을 떼고 이웃을 도우며 부활의 기쁨과 감격을 나누는 겁니다.
우리의 명절이나 큰 날은 일년에 한 번씩 지키지만 부활은 일주일에 한번씩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주 5일 근무제를 환영합니다. 왜냐하면 토요일에 쉬어야 하니까요. 토요일에 몸도 마음도 쉬고, 주일 부활의 축제에 참여해 팡파르를 울리며 감격이 넘치는 일주일의 삶을 승리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동안 세상에 안식일도, 주일도 다 빼앗겼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들의 방식대로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은 말씀의 방법대로 살아야 합니다. 주일에 신나게 살지 못하는 사람은 일주일을 신나게 살 수 없습니다. 가장 불쌍한 삶은 주일 예배만 보고 가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축복을 축소시켜 작게 만들어 가는 사람입니다. 예배를 마치고 봉사도 하고 청소도 하며 함께 떡을 떼는 게 주일의 개념입니다.

주일의 본보기 초대교회
사도행전 2장 42-47절 말씀에 나오는 초대교회의 모습이 주일의 전형입니다. 그들은 함께 모여 서로 가르치고 교제하며, 떡을 떼고 기도하며, 물건을 통용하고 찬미하며 지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술에 취한 사람보다 더 예수에 취해 사는 사람입니다. 예배가 끝나면 병원으로 심방하고, 우울한 사람들을 격려하고, 선물도 나누고, 가난한 사람들을 찾는 게 주일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감격을 주일마다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런 후 월요일부터 신나는 생활을 시작하는 겁니다. 이게 진정한 주일의 개념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님들, 오늘은 주일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날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하고 모인 것입니다. 또 오늘은 성령님의 날입니다. 찬양하고 전도하며 이웃을 찾는 날입니다. 주님의 부활, 사랑을 경험하는 날입니다. 또 힘들고 피곤할 정도로 기쁘게 주님을 섬기는 날이기도 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요 5:19-29)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능력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중에서 아주 특별한 주제로 반복해 말씀하신 것이 ‘하나님과 나는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게 된 결정적인 요인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고소 사건입니다. 그 내용은 예수님 스스로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주장한 때문입니다. “참람하도다. 어떻게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

일치와 투명성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강조하십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일을 행하는 것이고,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관계’라고 설명하십니다. 19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예수님은 자신이 하는 일은 모두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신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하시는 게 없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과 아버지의 관계가 완전히 하나라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첫째로 아버지와 아들의 진정한 관계는 ‘일치와 투명성’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숨기는 게 없는 관계입니다. 아버지의 생각과 뜻이 아들에게 전달돼 그대로 진행되는 관계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아들은 아버지의 행하시는 것을 행한다’라는 말이 얼른 실감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겪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그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좋지 않습니다.
물론 아버지를 존경하고 그 뜻에 맞게 사는 아들이 있긴 합니다. 그런데 사춘기를 거치면서 아버지가 하는 것마다 반대하는 게 아들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상처받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부자상’입니다.
이것은 죄를 지은 인간의 모습니다. 아버지가 사랑하심에도 불구하고 아들은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반항하고 거부하며 아버지의 가슴에 못 박는 불행한 관계로 발전한 것입니다.

오늘날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는 경제적인 것이 대부분입니다. 용돈, 학비, 생활비를 주니까 그나마 연결돼 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필요로 하는 것은 유산일 뿐입니다. 어떤 아들은 아버지가 죽기 전에 유산을 내 놓으라고 조릅니다. 그런 아들이 성경에 나오는 둘째 아들 탕자입니다.
유산이란 아버지가 소천한 다음에 갖는 것이 원칙인데 미리 빼앗아 갑니다. 그 재물을 마음대로 사용한 것을 가리켜 성경에서 탕자라고 합니다. 불행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입니다.
일반적으로 아버지는 이런 아들에 대해 사랑 대신 미움, 축복 대신 저주를 품게 됩니다. 사회적으로 덕망이 있는 아버지라도 집나간 아들로 인해 고통을 겪는 것이 우리 시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 기쁨,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소원해지면 대화가 단절됩니다. 대화가 없으면 만남이 없습니다. 만남이 없으면 관계가 끊어집니다. 이런 불행이 아버지가 병들어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 것을 주변에서 종종 봅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
예수님의 경우에서 자신과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흔히 보고 경험하는 것과 전혀 다른 관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이 다르듯이,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렇게 특별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14장 8절에서 빌립이 예수님께 “아버지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 주십시오”하고 말합니다. 9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 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말씀하십니다.
10절에서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언어, 생각, 감정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히 하나님과 자신이 일치했음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인하여 나를 믿으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예수님의 의식에는 순수하게 아버지의 뜻이 있었습니다. 나의 생각, 말, 감정이 예수님의 것과 일치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인간은 언제나 반항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배타적이고 독선적이며 거절하는 본성입니다. 가장 본질적인 마음의 상처는 거절당하는 데서 오는 겁니다. 그래서 누가 자신을 배척하고 용납하지 않으면 감당을 못합니다. 미움과 분노(anger)가 생깁니다.

여기서 우리가 회복해야 할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반항하는 체질’이 없어지기를 축원합니다. ‘분노하는 체질’이 없어지기를 축원합니다. 상처로 생긴 모든 것들이 녹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이 미움보다 크고, 포기가 소유보다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변화되듯, 스스로 자신을 바꿀 때 주변 사람들이 변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의 중보기도입니다. 21-22절에서 한 가지를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저는 이 말씀을 듣고 많이 회개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뜻에 맞춰 목사, 성도들의 비전이 동일해야 합니다. 같은 꿈, 생각, 행동…. 1백 명이 모여 싸우면 1만 명같이 여겨지고, 1만 명이 모여 한마음이 되면 하나같이 느껴집니다. 저는 우리 교회 성도 수가 아무리 많아도 갈등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생각이 같으니까 복잡하지 않습니다.
생각이 다르면 부부 사이도 복잡해집니다. 부자나 형제간에도 복잡해집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다.” 20절 말씀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이 말씀에서 투명성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숨기는 게 없으십니다. 투명성은 곧 믿음을 주게 됩니다. 일치와 투명성은 축복을 줍니다.
둘째로 아버지와 아들의 진정한 관계는 ‘부활’입니다. 21절 말씀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부활의 능력’ 이양 관계
하나님 아버지의 매우 독특한 모습이 있습니다. 아들이 등장하면 아버지는 역할을 끝내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아들이 등장해도 아버지가 계속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후계자가 전승되지 않는 게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전임자는 후임자에게 맡기고 물러나야 하는데, 계속 뒤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합니다. 여기서 갈등이 발생합니다.
원래 하나님은 부활이십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로마서 4장 17절에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대로 아브라함이 백세 때 의학적, 물리적으로 더 이상 임신할 능력이 없는 사라에게 아이를 잉태하게 합니다. 그것은 부활의 능력 때문입니다.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롬 4:19-20).

부활의 능력으로 죽은 자를 살리신 하나님이 사라에게 아기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능력이요, 부활이요, 부활 안에 있는 생명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7-19절에서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은 이삭으로 인해 불가능에서 생명을 얻는 경험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삭을 내놓으라고 하셨을 때 ‘하나님은 다시 살리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죽어도 다시 삽니다. 부활의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어떤 절망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부활하니까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으로 가서 아들에게 칼을 댈 수 있었던 것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 아들을 다시 살리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모든 게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죽어도 다시 삽니다. 이게 믿음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부활의 하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 하나님은 부활의 능력으로 예수님을 살리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육신으로 이 세상에 오셨을 때부터 하나님은 모든 부활의 권위와 능력을 예수님께 이양하셨습니다. ‘신뢰 관계’를 형성하는 겁니다.

신뢰 관계가 이뤄지지 않는 것은 뒤에서 조종하기 때문입니다. 맡긴 후 원격 조종합니다. 대리인을 내세워 조종하기도 합니다. 그런 방법이 잘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망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부활의 능력을 모두 예수님께 이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치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부활의 능력을 이양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것은 부활과 기적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고 예수님 안에 들어간 자는 예수님의 부활과 기적의 능력을 동일하게 체험합니다.

심판의 권리 이양 관계
아버지와 아들의 진정한 관계는 ‘일치와 투명성’, ‘부활 능력의 이양’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예수님께 부활의 능력과 동시에 ‘심판의 권리’도 이양하셨습니다. 22, 23절 말씀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죄악, 불의한 자들, 불순종의 사람들을 심판하셨습니다. 바벨탑, 노아 홍수, 소돔과 고모라 등 하나님께서 친히 심판하셨습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순종할 때 하나님이 징계하셔서 죽이기도 하고 포로로 잡혀가게도 하셨습니다. 전염병으로 죽이기도 하고 이방인의 칼에 죽게 하며 온 나라를 뒤집어 놓기도 하셨습니다. 또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애굽,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로마까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하루 아침에 손바닥 뒤집어지듯 날려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역사를 심판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심으로 하나님께서 직접 하시던 심판을 예수님에게 맡기셨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존경하는 것을 아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처럼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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