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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빈자(貧者)의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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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루는 허풍쟁이였다. 걸핏하면 허풍을 떨었다. 그리고 말끝마다 '노 프라블럼!'을 외쳤다. 차루는 키가 작고 못생겼다. 그는 내가 묵고 있는 남인도 마드라스의 호텔 앞에서 아침마다 릭샤(바퀴 셋 달린 택시)를 받쳐놓고 손님을 기다렸다. 내가 호텔 문을 나서면 차루는 운전석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다가도 다른 릭샤꾼들을 제치고 재빨리 달려왔다. 그리고는 날 모시고 다니려고 이른 새벽부터 대기하고 있었다고 허풍을 떨었다.

처음 차루의 릭샤를 탔을 때 연신 기침을 해대는 것이 안돼 보여 약 사먹으라고 차비를 더 얹어준 적이 있었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그날부터 차루는 아예 나를 자기 주인으로 모시기로 작정한 듯 어딜 가나 따라다녔다. 나는 약간 창피했다. 오리 궁둥이를 한 못생긴 차루가 아무데서나 '주인님. 주인님!'하며 아는 체를 하는 데는 문제가 있었다. 나를 보기만 하면 차루는 목에 걸었던 지저분한 수건으로 릭샤 뒷좌석의 먼지를 털면서 어서 타라는 시늉을 했다. 근처 우체국에 가는 길이며, 걸어가도 충분한 거리라고 설명해도 차루는 막무가내였다. 그저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노 프라블럼. 써(아무 문제없어요. 선생님)!'

날마다 비싼 릭샤를 타고 다닐 만큼 돈이 많지 않다고 말하면, 그는 또 엉덩이까지 흔들며 외쳤다. '노 프라블럼. 써!' 돈 같은 건 문제가 아니니 어서 타라는 것이었다. 차루는 정말로 인생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가진 거라곤 홑바지밖에 없으면서도 언제나 밝고 익살맞았다. 또 인도인 특유의 그 끈질김이란! 마침내 하는 수 없이 내가 릭샤에 올라타면 차루는 차창에 매단 고무나팔을 푸웅푸웅 울려대며 인파 가득한 거리로 내달렸다. 앞에서 거치적거리는 사람이 나타나면, 노인이든 예쁜 처녀든 차루에게 된통 욕을 얻어먹어야 했다.

한 번은 시내에 있는 나라다 사바 음악회관에 가던 중에 서류가방을 든 관리가 길을 비키지 않자, 차루는 또다시 푸웅푸웅 경적을 울리며 욕을 한 바가지 퍼부었다. 천한 릭샤 운전사에게 욕을 먹은 고급관리는 잔뜩 화가 났다. 그는 막을 새도 없이 차루의 왼쪽 뺨을 후려쳤다. 바라보고있던 나까지도 눈에서 불꽃이 튈 만큼 험악한 손찌검이었다. 차루는 천민이었다. 신분 차별 관습이 뿌리 박힌 인도 사회에서 차루는 아무 힘이 없었다. 그래서 관리의 뺨을 맞받아 칠 수도 없었다. 차루는 얼얼한 뺨을 어루만지기만 했다. 관리는 그것도 모자라 또 한 대 후려칠 기세였다. 마냥 구경만 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얼른 릭샤에서 뛰어내려 관리를 가로막고 힘껏 떠다밀었다. 외국인이 떠다밀자 뚱뚱한 관리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엉겁결에 소똥 위로 자빠지고 말았다.

순식간에 인도인들이 몰려들었다. 그대로 있다간 사태가 불리했다. 나는 릭샤에 올라타며 차루에게 소리쳤다. '찰로, 찰로!' '찰로'는 빨리 내빼자는 뜻이다. 차루는 푸웅푸웅 고무나팔을 울리면서 바람처럼 릭샤 내몰았다. 음악회관에 도착해서 보니 차루는 뺨에 벌겋게 손자국인 나 있었다. 걱정이 된 내가 괜찮으냐고 묻자 차루는 목소리도 낭랑하게 외쳤다. '노 프라블럼, 써!'

음악회관에 앉아서 인도의 대표적인 현악기 시타르 연주를 듣고 있는데 마당에서 기다리고 있는 차루가 마음에 걸렸다. 욕을 한 건 잘못이지만 뺨을 때리다니. 차루는 몇 살이나 됐을까? 결혼은 했을까? 가족은 있을까? 차루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았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안 그래도 이번 사건을 계기로 더욱 친근하게 굴 게 틀림없었다. 아마 이젠 친동생처럼 따라다니려고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연주회가 끝나서 나가보니 차루는 운전석에 앉아서 모든 걸 잊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차루에게, 저녁에 공항에 함께 갈 수 있느냐고 물었다. 차루는 깜짝 놀라며 오늘 떠나는냐고 했다. 그런게 아니라 내 친구들이 오늘 밤 인도에 도착할 예정이어서 마중을 나가야 한다고 설명하자 차루는 명랑하게 소리쳤다.

'당신의 친구라면 곧 내 친구인데 당연히 나가야죠. 노 프라블럼!' 그런데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 한 가지 있었다. 차루는 공항 주차장에 릭샤를 세워둘 수 없었다. 그곳은 다른 릭샤꾼들의 세력권이었던 것이다. 잘못하다간 또 얻어맞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차루는 그런 설명도 없이, 공항에서 1킬로미터 떨어진 길가 숲에다 릭샤를 숨겨 놓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이유를 물어도 대답하지 않았다. 차루는 나를 공항에 내려준 뒤 곧장 사라지더니 그 먼 거리에 릭샤를 감춰두고 맨발로 뛰어왔다. 비행기가 도착했으나 친구들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카레냄세 풍기는 구름떼 같은 인도인들 틈에서 목을 빼고 서 있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차루는 그 동안 다른 릭샤꾼들의 눈을 피해 대합실 밖 기둥 옆에 숨어 있었다.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채 빼꼼히 눈만 내놓고서 유리창 너머로 나를 바라보았다. 한 시간쯤 지났을 때였다. 바깥이 소란스러워 고개를 빼고 쳐다보니 차루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에 나는 서둘러 대합실 밖으로 뛰어나다.

아니나 다를까, 차루는 바닥에 넘어져 있고 입술에선 피가 흐르고 있었다. 차루의 주위로 웅성거리며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또 누구한테 얻어맞은 걸까. 나는 황급히 차루를 일으켜 세웠다. 그런데 알고 보니 차루는 기둥에 기대서 졸다가 앞으로 자빠지는 바람에 입술을 깬 것이었다. 어처구니없어 하는 나에게, 차루는 얼굴을 가렸던 수건으로 상처를 닦으며 소리쳤다. '노 프라블럼, 써!'

마침내 내 친구들이 나타났다. 번개처럼 뛰어가 릭샤를 가져온 차루는 내 친구들을 얼싸안으며, 나의 둘도 없는 인도인 친구 행세를 하는 것이었다. 입술이 쿤타킨테처럼 부르튼 채로. 친구들은 내가 어쩌다가 이런 괴상한 인도 친구를 사귀게 됐나 하는 표정들이었다. 다음날 아침, 나는 차루에게 내 일행과 함께 남쪽 도시로 여행을 떠나려 하니 버스표를 사다 달라고 부탁했다. 인도는 버스표나 기차표를 구하기 힘들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예약을 해두는 것이 안전했다. 차루는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큰소리쳤다. 버스표 살 돈을 주겠다고 해도 그만한 돈쯤은 자기가 갖고 있으니, 표를 사온 다음에 달라고 했다. 나중에 심부름 값까지 쳐서 두둑이 받을 심산인 것 같았다.

그러나 저녁때까지 호텔로 버스표를 갖고 오기로 한 차루는 밤 열두시가 되어도 나타나지 않았다. 우리는 할 수 없이 이른 아침에 버스 정류장으로 가서 웃돈을 얹어주고서야 겨우 버스에 올라 탈 수 있었다. 근처 도시에 있는 스리 오로빈도 명상센터에 다녀온 이튿날, 나는 거리에서 차루와 마주쳤다. 차루는 릭샤에서 뛰어내리며 반갑게 아는 체를 했다. 나는 화가 나서 버스표에 대해 따져 물었다. 차루는 놀라는 시늉을 하며 또 허풍을 떨었다.

'아아, 맞아요. 버스표가 있었지요! 그런데 그만 길이 막혀서 늦고 말았지 뭡니까!'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다. 무슨 길이 막혔느냐고 따지자 차루는 얼른 고백했다. '아아, 맞아요. 사실은 깜빡 잊고 말았어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이런 친구를 믿고 버스표 예약을 맡긴 내 자신이 한심했다. 내가 화를 내며 앞으로 걸어가자 차루는 뒤에 따라오며 여행은 잘 다녀왔느냐고 물었다. 나는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로 그렇다고 짧게 대답했다. 그러자 차루가 내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왜 화를 내시는 거죠? 잘 다녀왔으면 그걸로 노 프라블럼 아닌가요? 이미 지나간 일인데 그런 것 때문에 화를 낸다면 어리석은 일 아닌가요?' 이제는 그 놈의 '노 프라블럼' 소리도 지겨웠다. 나는 냉정하게 차루를 밀쳐냈다. 그 순간 차루가 또 말하는 것이었다. '모든 것은 당신 자신의 업이에요. 이미 수천 년 전부터 정해져 있는 일인 걸 내가 어쩌란 말인가요. 어쨌든 현실의 결과를 받아들여야지요.'

그렇게 말하는 순간, 차루는 한낱 릭샤 운전사가 아니었다. 인생의 문제를 초월한 성자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인도 사회의 가장 밑바닥 계층에서 어느덧 깨달음을 얻은 힌두 명상가로 변신해 있었다. 희랍의 철학자 제논이 상인이었던 시절의 일이다. 그의 집에는 특별한 노예가 한 명 있었다. 어느 날 제논이 화가 나서 노예의 뺨을 때리자 노예는 평온한 목소리로 제논에게 말했다고 한다.

'저는 아득히 먼 옛날부터 이 순간 주인님에게 뺨을 맞도록 되어 있었고, 주인님은 또 제 뺨을 때리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 두 사람은 정해진 운명에 따라 충실히 제 역할을 수행했을 뿐입니다.'

제논은 훗날 스토아 학파의 대철학자가 되었는데, 인도인으로 짐작되는 이 노예에게 영향을 받은 듯 '어떤 상황에서도 감정에 흔들림 없는 현실 수용'이 그의 주된 사상이었다. 한편 로마 철학자 세네카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갖고 있는 것이 당신에게 불만스럽게 생각된다면, 세계를 소유하더라도 당신은 불행할 것이다.'

세네카든, 제논의 노예든, 또는 차루든, 이들이한결같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다. 너의 소원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불평하지 말고 오히려 삶이 일어나는 대로 받아들여라. 그러면 넌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차루는 어디서 그런 현실 수용의 지혜를 배웠을까. 여러 명상센터를 수시로 드나들면서도 내가 얻어 갖지 못한 그것을 그는 어떻게 체득했을까. 나로선 불가해한 일이었다.

마드라스를 떠나는 날 아침, 마지막으로 차루를 만났다. 작별 인사도 할 겸, 그 동안 타고 다닌 릭샤 값을 지불하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차루는 또 손을 흔들며 허풍을 떨었다. '돈은 주고 싶은 대로 주세요. 전 아무 문제없습니다.' 내가 일부러 정색을 하면서, 그럼 1루피(30원)만 줘도 되겠느냐고 묻자 차루는 외쳤다. '노 프라블럼!'

그러면서 차루는 당당하게 덧붙였다. 1루피만 줘서 내가 행복하다면 그렇게 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이미 자기의 친구이니까, 자기한테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내 행복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잠시만의 행복이 아니라 돈을 준 내 자신이 오래도록 행복할 수 있을 만큼 돈을 달라고 했다. 영리한 차루. 얄미운 차루. 못난 차루….마드라스를 떠난 뒤에도 오랫동안 차루의 인상이 지워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생을 살면서도 '노프라블럼!'을 외치며, 푸웅푸웅 고무나팔을 울리며 세상 속으로 달려가는 차루! 많은 걸 갖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집착과 소유를 벗어 던지지 못하는 내게 그는 잊지 못할 훌륭한 스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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