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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명의 양식 (요 06: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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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수많은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주제를 나타내고있는 이야기가 ‘탕자의 비유’와 ‘오병이어의 기적’입니다. 이 이야기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로서 성경 전체의 주제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 중 ‘오병이어의 기적’은 예수님이 일으키신 기적 중에 유일하게 4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을만큼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복음서의 기자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이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것과 함께 그 안에 담고 있는 교훈을 우리들에게 알려주고자 했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그후에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난 시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후에’라는 표현이 기적이 일어난 시점을 가르키고 있습니다. ‘그 후에’가 가르키고 있는 사건은 요한복음 5장에 기록된 베데스다 연못가에 38년 동안 중풍병으로 누워있던 사람이 치유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의 배경은 예루살렘입니다. 그런데 6장을 보면 예수님은 갈릴리 바다 건너편에 계십니다. 즉 두 사건이 일어난 장소인 예루살렘과 갈릴리 바다 사이에 거리차이가 시간이 어느정도 경과했음을 보여줍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기록한 다른 복음서를 보면 기적을 행하셨을 때가 예수님 공생애의 절정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변함없는 주님의 사랑
예수님은 제자들을 훈련해서 세상에 내보냅니다. 그래서 그들이 복음을 전하고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고 돌아와서 예수님께 칭찬을 들은후에 ‘오병이어의 기적’이 벌어집니다. 이미 예수님은 놀라운 기적과 가르침을 통해서 온 유대 땅에 널리 알려져 있어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봄이러라

예수님은 혼자 계실 수가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말씀을 듣고 상담을 하고 병낫기를 원해서 그분께 모여들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데리고 사역의 현장을 떠나서 휴식을 취하려고 하셨던 것 같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예수님의 사역지는 주로 가버나움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버나움 건너편에 벳세다라는 동네로 배를 타고 가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산에 올라가서 휴식을 취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휴식을 취하려는 그 자리조차도 휴식을 취할 수 없이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4, 5절을 보십시오.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1만5천여 명 정도의 사람이 모여들었는데 이것은 갈릴리 호수 근방의 사람들이 모두 모여도 채울 수 없는 숫자입니다. 왜냐하면 나사렛만 보아도 1백여 명의 사람들이 살던 작은 동네였고, 근방의 마을들은 보통 2∼3백여 명의 사람들이 사는 작은 동네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일시에 모일 수 있었던 것은 유월절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이 되면 ‘민족대이동’을 해서 외국에 살던 사람까지도 예루살렘에 모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갈릴리 북쪽에 있던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는 도중에 마침 예수님이 그곳에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만나러 모여들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힘드셨겠습니까? 잠깐 쉬기 위해서 찾아간 장소에까지 사람들이 찾아왔으니 부담스럽고 짜증스러우셨을 것입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가끔 절박한 문제를 가진 분들이 한밤중에 찾아오거나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합니다. 얼마나 절박하면 이 시간에 연락을 할까 싶으면서도 힘이 듭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따랐던 이유 중 하나는 예수님의 병을 고치는 능력 때문이였습니다.
지금 시대에는 병원이 많고 의료제도가 잘 되어 있어도 아픈 사람이 많은데 의료시설이 제대로 없던 2천년 전은 오죽했겠습니까.
우리도 처음에 주님을 찾았을 때는 이런 비슷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진리가 무엇인가? 영생이 무엇인가? 거듭남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들은 후에 하게 된 것이고 처음에는 외롭고 곤고하고 다급해서 주님 앞에 나옵니다.

우리의 모든 필요 아시는 하나님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렇게 찾아오는 사람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내가 시간을 좀 내줄테니 그럴듯한 문제를 가지고 오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무슨 문제로 와도 짜증내지 않으십니다. 새벽에 와서 부르짖는다고 ‘넌 잠도 없냐’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가족이나 친구들이 우리를 거절한다고 해도 주님은 우리를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이 쉬려는 것을 그만두시고 무리를 영접하신 이유는 마가복음 6장 34절을 보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그분은 큰 무리가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며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긍휼이 여기셨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많은 기적들이 일어난 배경을 살펴보면 우리에게 기적이 일어날만한 자격과 조건이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기적의 가장 큰 동기는 하나님의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입니다. 받을만한 자격이 있어서 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를 향한 그분의 긍휼이 기적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여 들었을 때는 ‘오병이어의 기적’과 같은 것까지는 바라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9장과 마태복음 14장을 보면 ‘날이 저물고 이미 저녁때가 되었다’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주님은 그들이 주리고 힘들어 하고 있다는 것을 미리 헤아리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 앞에 나올 때는 고상한 모습으로 떳떳하게 나오고 싶어합니다. 기도를 해도 좀 괜찮은 기도제목으로 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무엇이든지 구하십시오. 주님은 여러분의 영혼뿐만 아니라 육신의 건강에도 관심이 있으십니다. 우리 육신의 병을 고치기를 원하시는 주님은 우리의 굶주림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배불리 먹기를 원하시고, 건강하기를 원하시고, 우리의 영혼이 잘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필요에 민감하십니다. 우리가 구하지 않은 것도 아십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구한 것만 응답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미리미리 필요한 것을 기도해야만 한다면 우리가 구하지 못할 것이 많습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 나갈 때 이런 기도를 합니다. ‘주님 불쌍히 여겨주소서’. 그러면 주님은 내 모든 필요에 응답해 주십니다.
지치고 낙심한 사람들과 정말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온 사람에게는 기도해주고 말씀을 주는 것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절박한 문제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올 때 먹지도 자지도 못한 상태로 나옵니다. 문제가 너무 심각하기 때문에 먹을 생각도 않고 쉴 생각도 없습니다. 절박함으로 인해 금식도 하고 자는 것도 잊어버리고 문제를 해결받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문제를 해결하기에 앞서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실망하고 지친 영혼들에게 기도해 주고 말씀으로 위로해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배불리 먹이고 자게 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종종 실수하는 것은 너무 영적인 것만 생각하다가 정말 필요한 것을 놓치는 것입니다.
남편들이 실망하고 지쳐서 돌아왔을 때 ‘우리 금식하고 기도합시다’라고 하지 말고,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서 맛있게 먹게 해주고 ‘오늘은 푹 쉬세요’라고 말하십시오. 그것이 훨씬 유익합니다.

엘리야의 예에서도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8백명의 거짓선지자들과 대결을 할 때 금식하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다음 순간 그가 실망해서 로뎀나무 아래에 갔을 때 주님께서 ‘엘리야야 일어나서 기도해라, 금식해라, 불받아라’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먹고 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육신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선교사님들을 대접할 때도 그렇습니다. ‘매우 힘드실테니 기도원 좀 다녀오십시오’라고 하지 말고 ‘푹 쉬십시오’라고 하는 것이 최고의 약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주님은 사람들의 배고픔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이 문제를 제자들에게 질문하십니다.
사실 이미 주님은 해결책을 가지고 계실 뿐만 아니라 이 문제는 제자들이 해결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십니다. 그를 야단치려는 뜻이 아니라 제자들의 믿음을 점검해 주시고 확고하게 해주시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떠나고나면 제자들은 수도 없이 이런 문제를 만나게 될텐데 그럴 때 어떻게 해야할지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동역 관계
그런데 왜 여러 제자들 중에서 빌립에게 먼저 물으셨을까요?
빌립은 벳세다 사람이기에 어디가서 무엇을 살 수 있는지 알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찌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빌립은 그 많은 떡을 구입하기는 힘들다고 대답합니다. 한 데나리온은 그 당시에 노동자 한 사람의 평균 하루 임금이라고 합니다. 그 임금을 6개월치 이상 모아야 살 수 있는 양의 떡이 필요합니다. 더구나 이 많은 양의 떡은 작은 동네에서 살 수 있을 만한 분량도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빌립을 ‘믿음 없는 사람’이라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우리도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저는 ‘사역축제’ 등을 통해 빌립의 대답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행사를 하다보면 식사문제가 제일 어렵습니다. 3천명이 한꺼번에 식사를 해야하는데 우리 교회 식당은 한번에 3백명을 수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몇 시간에 걸쳐서 식사를 할 수도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무척이나 힘이 듭니다. 그래서 스탭들이 별 생각을 다 해냅니다. ‘이번에는 금식집회를 하면 어떨까?’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행사를 하면서 얻은 지혜 하나는 강의가 은혜로와도 식사가 은혜롭지 못하면 사람들이 실망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빌립은 전형적으로 합리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질문을 받자마자 즉각 대답을 합니다. 이런 빌립과 같이 합리적이고 계산적인 사람이 필요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도 예산을 세우는 것은 무척 중요합니다. 생각없이 일만 벌이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따질 것은 따져야 합니다.
그러나 조심해야 할 것은 돈으로 하나님의 일을 결정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지만 돈이 많이 듭니다’라고 말하면 안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고 우리가 해야하는 일이라면 지금은 준비된 것이 없지만 믿음으로 일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주머니에 있는 것을 가지고 일 하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돈이 벌리는 일이라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해서는 안됩니다.
8, 9절을 보십시오.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빌립과 예수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안드레가 나섭니다. 한 아이가 도시락을 가져 왔습니다. 아마도 이 아이는 예수님이나 제자들을 대접하고 싶은 마음으로 가져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안드레는 겨우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가지고 ‘이것이 있기는 하지만 이 많은 사람을 먹이기에는 말도 안되게 부족한 양이다’라는 식의 상황에 맞지 않아 보이는 어찌보면 말도 안되는 황당한 소리를 합니다.
‘주님의 일에 참여하고 싶지만 이것가지고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준비하고 다시 오겠습니다’라고 우리도 말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순간 ‘그것으로 충분하다’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가지지 않은 것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 도저히 해결책이 없을 것 같은 상황이지만 이미 여러분 손에 해결책이 쥐어져 있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이 상황에서 주님이 해결할 방법이 여러분 손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산법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한이시기 때문에 무한에 모든 것을 곱하면 다 무한입니다. 일을 곱해도 무한이고, 천을 곱해도 무한입니다. 그런데 0곱하기 무한은 0입니다. 그래서 하나 드린 것 하고 전혀 안 드린 것은 엄청나게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뭔가를 요구하실 때 우리 것을 빼앗아 가기 위해서 그러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보리떡은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떡입니다. 그리고 여기 나온 물고는 ‘옵싸리온’이라는 물고기인데 ‘익수스’라는 물고기와는 다릅니다. 이것은 어부들이 버린 고기를 가난한 사람들이 주워다가 소금에 절여서 떡을 먹을 때 양념으로 먹는 물고기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드리는 것을 가려서 쓰지 않으십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신대 그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천쯤 되더라

예수님이 가든파티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사람들이 앉아서 음식 나오기를 기다립니다. 제자들은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1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예수님이 기도를 마치자마자 주변에 산더미 같은 떡이 쌓여지면 제자들의 마음이 편할 텐데 주님 손에서 가져 가야 했습니다. 추측컨대 베드로는 처음에는 황당한 마음으로 떡을 가져 갔다가 줄지 않는 떡을 보고는 그 다음부터는 신바람이 나서 날랐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기적을 일으킬 때 제자들을 사용해서 일하신 것을 주목하십시오. 예수님은 믿음없는 그들과 동역하십니다. 제자들이 한 일은 떡을 만든 것이 아니라 배달한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내것을 가지고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누군가에게 또는 어디론가 주의 사랑을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준비하고 능력을 갖춰서 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가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일하시는 것을 보고 놀라게 됩니다.

우리 드림으로 일어나게 될 기적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능력을 빌어 쓰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순종을 쓰시고, 우리들 그대로를 쓰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실 때 우리의 것을 드리면 하나님은 그것을 풍성하게 만드셔서 다른 이들과 나누라고 하십니다.
12, 13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어떤 신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났을 때 가지고 있는 떡과 물고기를 아주 조금씩 나누어 주었는데 사람들은 믿음으로 배가 불렀을 것이라고 합니다. 마치 성찬식 때 떡과 포도주를 조금 떼어 먹고 마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이 환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시려고 남은 것을 하나도 버리지 말고 다 담으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행할 때 바구니를 가지고 다닙니다. 먹어야 할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음식을 싸가지고 다니는 것입니다. 남은 것이 열두바구니에 가득찼습니다. 한 사람이 먹기에도 부족한 양이었는데 말입니다.
만일 안드레가 그냥 먹어버렸다면 여전히 자신도 배고프고 죄책감에 시달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누었더니 다른 사람을 다 먹이고 남았습니다.
주는 것은 어리석지 않습니다. 사역축제를 하면 우리에게 있어서 절대로 손해가 아닙니다. 오시는 많은 분들도 큰 유익을 얻어가지만 우리교회가 더 많은 은혜를 받습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은 오늘도 동일하신 분입니다. 부끄러워서 내 놓기 어려운 평범하고 보잘것 없는 떡과 물고기를 가지고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입니다.
자기 혼자를 위해서 살면 만족이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 앞에 자신의 삶을 드리면 보잘 것 없는 삶을 통해서 큰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베드로의 경우도 그랬습니다. 그는 위대하지도 않고 굉장히 훌륭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갈릴리라는 조그만 호수에 모든 인생을 걸고 살았던 평범한 어부였습니다. 그런데 그 어부가 주님 손에 붙잡히자 위대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 ‘오병이어의 기적’보다 더 놀라운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그가 주님의 손에 들리니까 5천명, 때론 3천명의 사람이 그의 설교를 듣고 주님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기적은 제자들과 특별한 사람을 위해서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를 위한 기록입니다.

성찬식의 떡은 평범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앞에서 축사하면 거룩한 주님의 몸이 되고 거룩한 주님의 피가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삶을 드릴 때 우리가 드렸던 헌신을 주님 앞에 자랑하게 만드실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선택해서 쓰신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세상에서는 선택받기가 무척 힘듭니다. 계속해서 선택을 받아도 결국은 언젠가는 버림을 당합니다. 언젠가는 자신의 자리를 누군가에게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생이 다하는 날까지 우리를 선택한 것을 취소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고생하는 인생입니다. 조금 편하게 사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고생과 고통까지도 주님 앞에 가져다 내려 놓으면 복을 받습니다.
우리가 드리기만 하면 오병이어의 기적은 오늘도 일어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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