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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물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 (요 06: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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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말씀에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배불리 먹이시고 남은 것을 열두 광주리나 거둔 사건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떡을 먹은 수많은 군중들은 착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잘못된 환상을 갖게 된 것입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과 동기가 잘못된 것임을 아시고 그들의 환호와 인기에 야합하지 않았습니다. 15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마가복음 6장은 좀 다른 표현으로 이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군중의 잘못된 생각을 아시고 즉시 제자들을 재촉해 갈릴리 바다로 내려가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군중은 예수님께서 5천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직접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푹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군중들의 환호성에 휩쓸리지 않으시고, 군중을 해산시킨 후 산으로 오르셨습니다. 신약성경 전체에서 예수님은 큰 기적을 베푸실 때, 인기가 집중될 때 언제나 산에 오르셔서 조용히 기도하시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공격을 받는 것도 위기지만, 높이 드러나는 것도 위기입니다. 어느 날 생각지도 못한 진급을 하고, 높은 자리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도 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위기 때마다 군중들을 버리고 홀로 산에 올라, 하나님을 만나고 묵상과 성찰의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광풍을 만난 제자들
인생에는 높이 올라갈 때도 있고 깊이 떨어질 때도 있습니다. 인기가 높을 때, 사람들이 박수를 보낼 때, 하던 일이 잘 될 때 우리는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본문 말씀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즉시 바닷가로 내려가서 배를 타고 건너편 가버나움으로 이동했습니다. 16, 17절 말씀입니다.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저희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여기서 제자들의 상황을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 제자들은 해가 저물 때에 떠났습니다. 해가 지는 저녁을 상상해 보십시오. 가로등이 많아 도시에서는 상상이 잘 안됩니다. 오히려 밤이 되면 서울의 한강변은 더 멋진 모습으로 변합니다. 그러나 시골은 해가 지고 밤이 되면 빛을 찾아볼 수 없게 됩니다. 지금 제자들은 해가 지고 어둠이 깔려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상황입니다. 한편, 저녁이 됐다는 것은 사물이 잘 보이지 않아 불안해졌다는 의미입니다.
둘,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 한복판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칠흑같이 어두워졌습니다. 어둠이 밀려오면 불빛이 필요합니다. 사면이 보이지 않아 사물을 가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셋,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았습니다. 어두운 것, 배고픈 것도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면 괜찮을 텐데 말입니다.
위의 세 가지 상황으로 보아 겁먹고 불안해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에 오는 18절 말씀에는 설상가상입니다.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큰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광풍에 파도가 치고 배가 뒤집힐 듯 흔들립니다. 아무리 노를 저어도 전진할 수가 없습니다. 18절 말씀을 보십시오.
큰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마태복음 14장 24절에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하고 자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배가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 있고 어둠 속에 강한 맞바람이 불고 있는 위기의 상황입니다. 마가복음 6장 48절에는 “바람이 거스리므로 제자들의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라고 표현합니다. 맞바람에 부딪혀 아무리 노를 저어도 배는 ‘제자리걸음’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에 오시는 주님
인생에서도 종종 이런 경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신앙 생활을 잘 해 오다가 어느 날 갑자기 삶에서 예수님이 없는 것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생각지 못한 역풍을 만난 것입니다. 모든 계획이 잘 진행되었는데, 어느 날 정체하기 시작합니다. 고생만 되고 전혀 진보가 없습니다. 19절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 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도움을 받으면 19절 말씀을 그림처럼 자세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아무리 노를 저어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다보고 계셨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주 독특한 기록입니다. 산 정상에서 갈릴리 바다가 보입니다. 예수님은 풍랑을 만나 고생하는 제자들을 보시고 밤 사경(새벽 3시에 해당)에 바다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가셨습니다.

산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시고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힘들어 하고 어려운 고난을 당했을 때,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며 지켜보십니다. 결코 주님은 우리를 외면하거나 잊지 않으십니다. 지금 제자들이 바다에서 고생하고 있는 것을 주님은 모두 보고 계십니다.
여기서 사도행전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스데반이 유대인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죽게 됐을 때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서 계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스데반의 순교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당하는 모든 억울함을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보시고 기도만 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19절에서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은 물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가셨습니다. 그러나 19절 뒷부분에 제자들은 의외의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제자들이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물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본 제자들의 반응은 ‘유령이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와 너무나 닮은 모습입니다. 새벽 3시에 사람이 바닷물 위로 걸어오는 것을 보고, 제자들은 설마 예수님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유령으로 착각하고 두려워했습니다.
“내니 두려워말라”

좀더 깊이 생각하면 아주 재미있습니다. 어제 저녁에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이신 사건을 목격한 제자들이 몇 시간이 지나자,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 부스러기를 버리지 말고 거두라고 말씀하셔서 열두 광주리를 모았습니다. 아마 열두 광주리를 배에 실었을 지도 모릅니다. 열두 광주리가 증거인데도 그들은 예수님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다급한 상황이 벌어지면 모든 것을 잊고 맙니다. 은혜, 기적, 축복도 잊고 오직 현실에 발목이 잡혀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희망을 잃고 가능성을 닫아 버립니다.
예수님은 살아 계십니다. 그분은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지금 내가 어려움을 겪고 억울한 일을 당하고 이해되지 않는 일을 겪는다고 해서 주님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분은 유령이 아니십니다. 새벽 3시에도 물위를 걸어 나를 도우러 오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비슷한 이야기가 출애굽기 16장에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인도를 따라 홍해를 건넜습니다. 그들은 홍해를 통과했을 때 얼마나 감격하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겠습니까? 감격과 눈물에 속지 마십시오. 사람은 자기 믿음에 도취할 때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먹을 게 없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돌변했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아론에게 “우리를 여기까지 데려와 목말라 죽게 하느냐”며 심하게 불평했습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목격하고도 삶에 적용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위기에 처했을 때 과거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들을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오늘날까지 지켜주신 하나님의 신실함과 사랑을 잊지 마십시오. 그분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외면하시지 않습니다. 지금 내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잊으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이 없어 기적을 베풀지 않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중히 여기시면 새벽 3시에 물위를 걸어서라도 찾아오십니다. 그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요, 주님이십니다. 20절 말씀입니다.

가라사대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신대
“내니 두려워 말라”는 말씀은 무한한 안정의 느낌을 가져다 줍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어떤 허물과 실수가 있다 하더라도, 해석되지 않는 환경의 어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를 구하러 오십니다. 자신의 실수에 대해 하나님보다 더 가혹한 사람은 본인입니다. 하나님은 용서하시는데, 자신이 용서하지 못할 때가 더 많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약함을 아시고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합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병든 자를 만나시면 조건 없이 치유하시고 “네 죄가 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조건을 걸지 않았고 대가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요구 조건 없이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신앙생활’의 현주소
마태복음 14장에 보면 요한복음 6장에 빠진 기록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본 제자들이 “유령이다”하며 놀라자, 주님은 “나다, 안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순간에 베드로가 “만일 당신이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위로 걷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따지지 않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바닷물 위로 발을 내딛고 걸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14장 30절 말씀에는, 베드로가 바람을 느끼는 순간에 물 속으로 빠져 버리고 맙니다. 그는 다급한 목소리로 “주여, 나를 구원하여 주옵소서”하고 말합니다. 이때 예수님은 즉시 손을 내밀어 잡고 건져 주시면서 “믿음이 적은 자여, 어찌하여 의심하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이끌어 배에 오르셨습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사람은 물 위에서 살지 못합니다. 그러나 물위에 잠깐 떠 있는 것은 괜찮습니다. 기적이 계속되면 그것은 ‘자연’입니다. 우리는 이상한 일을 겪으면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매일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 하나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기적은 어쩌다 한두 번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기적인 것입니다. 사실 자연은 모든 게 기적입니다.
예수님께서 배 위에 오르셨다는 말에 얼마나 안심이 되는 지 모릅니다. 신앙은 물 위를 걷는 일이기도 하지만, 땅에서 하는 일입니다. 다시 베드로를 데리고 배 위로 올라가시는 것을 보면 안심하게 됩니다. 신앙 생활의 현 주소는 땅이며 배 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경우에 물 위에 서 있어야 할 때가 있고 물 위를 걸을 때도 있는 것입니다. 21절 말씀입니다.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저희의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바람도 불지 않고 파도도 잠잠해졌습니다.

‘물 위로 걸으신 사건’이 주는 교훈
우리는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으시는 짧은 사건을 통해 몇 가지 사항을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인생에는 생각지 못한 폭풍과 파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좋다고 없는 게 아닙니다. 기도를 많이 해도 위기는 옵니다. 누구에게든지 올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게도 위기가 많이 왔습니다. 사탄이 찾아와 예수님을 유혹했습니다. 마귀가 얼마나 많이 예수님을 공격했는지 모릅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공격도 있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장미빛이 아닙니다. 때로 자녀가 병에 걸릴 수도 있고,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큰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없는 어려운 일들이 인생의 고비마다 도사리고 있습니다. 선인이건 악인이건 누구에게나 고난은 있는 법입니다. 우리는 계획된 고난도 있지만 계획되지 않는 고난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 우리가 고난을 겪고 있을 때 예수님은 외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가 건강하면 그냥 두지만, 심히 아프면 자녀의 곁을 떠나지 못합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어렵고 힘들 때 하나님은 우리 가까이 계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셋째, 예수님은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나십니다. 지금 그분이 나타나지 않은 것은 모든 상황이 ‘괜찮다’는 것을 의미입니다. 개인적으로 희망을 잃어버리지 않고 있으면 예수님이 나타나십니다. 우리가 기도를 하는 것은 좌절하지 않고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아직 나의 힘으로 뭔가 해 보려고 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주님은 기다리고 계시는 겁니다. 주님은 새벽 3시에 물 위를 걸어서라도 찾아오십니다. 곧 숨이 넘어가는 순간에도 주님이 오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초자연적 방법으로도 일을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넷째, 예수님은 언제든지 기적을 베풀 수 있습니다. 베드로를 물 위로 걷게 하신 것을 보면 우리에게도 기적을 누리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지만, 인간 이상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기도하는 것을 쉬지 말고, 예수님께 기대하는 것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은 실망을 줘도 주님은 실망을 주지 않으십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기적을 베푸시지만 기적 안에 머물러 있지 않으시고 일상 생활로 돌아오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은혜를 받으면 기적 안에서만 살려고 합니다. 주님은 그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직장, 가정 등 우리가 책임 맡고 있는 곳을 주님은 버리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자칫 잘못하면 신앙을 지나치게 ‘기적’으로만 몰고 가서 초자연적인 축복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공기, 태양, 비 등에 대해 감사함을 잊고 살게 됩니다.

‘예수님을 발견하는 눈’을 뜨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눈을 떴다’는 말은 자연에 대해서도 눈을 떴다는 것입니다. 은총에 대해 눈을 떴다는 것입니다. 모든 게 감사, 축복, 은혜입니다. 내가 은혜의 삶에서 부족했을 때, 하나님은 특별히 기적을 베푸셔서 다시 은혜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시계와 톱밥’ 이야기를 아십니까? 어느 집안에 톱밥이 많은 곳에서 놀이를 했습니다. 한참 재미있게 놀다가 어떤 사람이 귀한 시계를 잃어 버렸습니다. 톱밥이 많아 아무리 뒤져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시계를 잃은 사람이 “시계를 찾아 주면 후사하겠다”고 하자, 많은 사람들이 갈퀴로 톱밥을 헤집었습니다.
점심 무렵, 사람들이 쉬려고 밖으로 나가자, 어린 꼬마가 들어가서 금방 시계를 찾아왔습니다. “어떻게 시계를 찾았니?”하고 물으니 “간단해요. 가만히 귀를 대고 들어보니까 째깍 째깍 소리가 나더라고요.”
여러분, 너무 휘젓고 다니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가만히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면 달라집니다. 그리고 주님이 예비하신 축복이 임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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