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생명의 떡 예수 그리스도 (요 06:22-40)

첨부 1


요한복음 6장 말씀은 두 가지 중요한 사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먼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굶주린 5천명을 배불리 먹인 사건입니다. 다른 하나는 풍랑을 만나 대여섯 시간 동안 죽도록 고생하고 급기야 절망적 위기에 몰린 제자들을 위해, 예수님께서 새벽 3시에 물위를 걸어오셔서 제자들을 구원하신 사건입니다.

첫 번째 사건을 통해 군중들이 충격을 받았고, 두 번째 사건을 통해서는 제자들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굶주렸다가 갑자기 배불리 먹은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전례 없는 관심과 흥미를 가졌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왕으로 삼자’며 구호를 외치고 선동할 정도로 예수님은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룻밤을 지내고 무리들은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예수님을 열정적으로 찾기 시작했습니다.

가끔 유명 연예인들 앞에서 환호하고 눈물 흘리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요즘은 프로 축구 선수들의 인기가 대단합니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환호성을 지르고 박수를 치며 사인을 요구합니다. 선수들 주위에 구름 떼처럼 모여 아우성을 칩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시자, 이와 비슷한 현상이 생겼습니다. 좀더 예수님 앞에 가려하고, 그분의 옷자락이라도 잡아 보려고 야단이었습니다. 22, 23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튿날 바다 건너편에 섰는 무리가 배 한 척밖에 다른 배가 거기 없는 것과 또 어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에 오르지 아니하시고 제자들만 가는 것을 보았더니 (그러나 디베랴에서 배들이 주의 축사하신 후 여럿이 떡 먹던 그 곳에 가까이 왔더라)

어젯밤에 제자들은 배를 타고 떠났지만, 예수님은 분명히 자신들과 함께 남아 있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축사하신 후 5천명을 먹이셨다는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데 그들이 따르고 좋아했던 분이 사라진 것입니다. 24, 25절 말씀을 보십시오.
무리가 거기 예수도 없으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아이들이 정신 없이 연예인이나 운동 선수들을 따라 다니는 것처럼 이 군중도 배를 타고 예수님을 향해 가려는 열정이 대단했습니다. 드디어 그들은 배를 타고 예수님을 좇아 가버나움까지 가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항의하듯 “예수님! 왜 여기 오셨습니까? 어떻게 오셨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우리는 군중의 열화와 같은 질문에서 두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제한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
첫째, 군중이 잠든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새벽 3시에 물위를 걸어 위기에 빠진 제자들을 구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잠자는 동안 상상치 못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잠들어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시각에 세계 도처에서 쿠데타, 전쟁, 테러 등 많은 사건들이 발생합니다. 우리는 하룻밤 자고 나서 “밤새 안녕하셨습니까?”하고 인사할 정도입니다. 영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졸고 있을 때, 자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일하십니다.
시편 121편 4절은“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흔히 우리는 누명을 쓰고 고통을 겪을 때 “하나님은 주무시는가?”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왜 나의 고통을 모르시는가?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이럴 수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합니다.

그러나 본문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시간에 나를 찾아오시려고 준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알 수 없는 방법으로 나를 사랑하시고 깨달을 수 없는 방법으로 관심을 갖고 일하시며 준비하고 계십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도, 예수님도 몰랐던 2천년 전에 그분은 나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분은 내가 하나님을 모를 때 이미 나를 아셨고,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때 그분은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상상력 안에 계시는 분이 아니고 나의 믿음 안에만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내가 믿음이 없을지라도 그분은 은혜를 베푸셨고, 나를 생각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찾는 동기와 목적
둘째, 군중들이 열성으로 예수님을 찾은 동기는 영적인 것이 아니라 동물적인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2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유명 인기인을 찾아가 환호성을 지르고 눈물을 흘리는 것은 진리이기 때문인가요?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요? 물론 아닙니다. 어떤 종류의 환호성은 바람과 같습니다. 그것은 한순간 꺼져 버릴 거품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현상을 진리로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사람은 타인들의 박수소리에 착각하기 쉽습니다.
예수님은 열정적으로 자기를 찾는 군중들의 환호성에 속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너희들이 나를 찾는 까닭은 진리를 알고 참된 구원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배부른 까닭이다.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라 배부른 까닭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공공 장소에서 군중 심리에 의해 착각에 빠지기 쉽습니다. 교회도 건물이 커지고 사람이 많이 모이면, 목사도 성도들도 ‘우리 교회 괜찮다’는 착각에 빠집니다. 군중은 고난을 주면 금방 드러납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치면 내용 없는 군중은 사방으로 흩어져버립니다. 진리를 가진 사람들은 고난이 오고 핍박이 닥치면 더욱 뭉칩니다. 높은 지위에 올라 권력과 돈을 소유하면 착각하기가 쉽습니다.우리는 어쩌면 거짓된 환상과 착각을 붙들고 그것이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여기며 살아갑니다. 그런 것들이 부질없음을 깨닫는 순간, 절망하고 좌절합니다. 환상을 놓치지 않으려고 비겁해지고 천박해지는 것을 발견합니다.

26절 말씀에는 재미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5천명을 배불리 먹인 기적 때문에 예수님을 찾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백 번 양보하셔서 ‘기적을 보고 찾아오기만 해도 괜찮겠다.’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너희들이 나를 찾는 것은 ‘기적’때문도 아니고 배가 불렀기 때문이다.”고 말씀하십니다.
달리 표현하면 “너희들의 관심은 영적인 것이 아닌 동물적인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매우 슬픈 이야기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을 가만히 분석해 보면 다분히 동물적입니다. 겉포장은 상당히 영적입니다. 그러나 내면으로 들어가 보면 굉장히 동물적이고 육적이며 성적이고 물질적입니다. 그것을 그대로 내놓으면 창피하니까 미사여구로 합리화하고 포장합니다. 바로 이것을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것입니다.

교회는 이런 부분을 깊이 성찰해야 합니다. ‘건물이 크고 사람이 많고 프로그램이 좋으면 좋은 교회다.’라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유명한 인사가 출석하고 헌금이 많이 나온다고 좋은 교회라는 등식도 성립하지 않습니다. 물론 전통 있고 소문난 유명 교회라고 모두 좋은 교회라는 등식도 성립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내면을 깊이 성찰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진정한 교회는 영적이고 성령 충만하며 거룩합니다. 유행에 따라 오가는 게 아니라, 어떤 경우에도 진리와 말씀에 바로 서서 모든 고난을 이깁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순교적인 믿음을 가진 공동체입니다.

썩는 양식을 위해 사십니까?
27절 말씀을 보십시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예수님께서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인간의 배를 채우는 양식을 ‘썩는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썩는 양식은 먹을 수록 배가 고픕니다. 계속 먹어야 하는 것이 썩는 양식입니다. 우리는 하루에 세끼 썩는 양식을 위해 일생을 바쳐 세상에서 생존 경쟁을 겪으며 살고 있습니다.
썩는 양식은 인간만 먹는 게 아니라 동물들도 먹습니다. 그래서 썩는 양식을 먹는 사람은 동물적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가끔 여행을 하면 자연의 신비에 접합니다. 아름다운 새들이나 짐승들을 보고 탄성을 자아내기도 합니다. 새들의 움직임을 잘 살펴보면 그들의 초점은 단지 하나입니다. 무섭도록 집요하게 먹을 것을 찾습니다. 사자나 표범 등이 달리는 이유는 먹을 것을 잡기 위함입니다. 한쪽 다리를 들고 고상함을 묵상하는 학도 개구리가 지나가면 순식간에 돌변하고 맙니다. 동물의 세계는 먹을 것과 성 두 가지 뿐입니다.

인간의 세계도 이 두 가지로 요약돼 있습니다. 사람들은 동물처럼 본능을 따라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 ‘썩는 양식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비극은 썩을 양식도 없어서 굶주리는 사람들이 세계 인구의 반이 넘는다는 사실입니다. 아프간을 다녀온 후 받은 충격이 그것입니다. 그들은 먹을 것을 보면 체면도 인격도 다 버리고 달려듭니다. 지상에서 가장 추악한 인간은 먹는 것으로 사람을 조종하는 자입니다. 지상에서 가장 추악한 정치는 식량으로 인민을 조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썩을 양식이 인생의 목표가 되지 않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인생의 참된 목적은 영생하도록 있는 생명의 양식에 있습니다. 인간의 육신은 썩을 양식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영혼은 ‘영원한 양식’을 필요로 합니다. 인간은 육신을 위한 양식에 대해 경험도 많고 준비도 하며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나 영혼을 위한 영생의 양식을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고 투쟁하는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
성경에서 영생의 양식을 주시는 분을 ‘인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인자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인간의 아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수가성의 여인에게 “이 물을 먹는 자는 다시 목마르려니와”라고 말씀하셨던 물은 야곱의 우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수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살을 찢어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곧 자신이 영원한 생수이시고 떡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먹고 마시다.’는 말과 일치합니다. 진리는 알고 이해하는 게 아니라 먹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성이 힘이 없고 나약한 까닭은 객관적인 지식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피와 살이 되지 못한 철학, 사상, 지식 등은 구름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항상 배신할 수 있고 얼마든지 변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진리는 자신의 몸 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참된 영적인 것은 내 안에 피가 되고 살이 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을 이룹니다. 이것이 ‘믿음의 떡’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생수를 주고 생명의 떡을 주겠다. 나를 먹는 자는 영원히 배고프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를 믿고 교회에 나오는 것이 그리스도가 내 안에 피가 되고 살이 되어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까?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수많은 무리와 같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나의 생각 안에 자리 잡고, 인생 전체에 자리 잡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세상에서 환란을 당해도 이길 수 있습니다. 감정적이고 착각하는 믿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믿음, 부활의 믿음이 내 안에 있기를 바랍니다.

공로의식에서 믿음으로
28절 말씀입니다.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여기서 아주 중요한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인간의 끊임없는 관심은 행동, 행위라는 것입니다. 인간 죄성의 뿌리에는 언제나 ‘행위’가 있고 ‘공로의식’이 있습니다. 행함으로 구원을 얻고 보상을 받으려는 의식이 내재돼 있습니다. 행함으로 만족과 기쁨을 누리고 자신의 믿음을 정당화하려는 불신앙이 인간 내면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어떤 젊은이가 예수님께 “내가 무엇을 행해야 영생을 얻으리이까?”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여기서도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놀랍습니다. 29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요한복음 3장 16절이나 시편 23편과 같은 성경의 ‘황금률’에 해당합니다. 아주 값지고 놀라운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다른 말로 하면 ‘사역’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요,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믿음과 은혜를 얘기하고, 인간은 언제나 공로와 행위를 주장합니다. 이게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의 주제입니다. 처음 예수님을 은혜로 믿다가 짧으면 1년, 길면 3년 안에 행위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새벽기도에 나와야 하고 전도해야 하며 헌금해야 구원받은 것 같은 ‘행위’에 집착하게 됩니다. 은혜로 하지 못하고 ‘주고받기’를 하려 합니다. “하나님, 내가 이만큼 하니까 이만큼 해 주십시오.”하는 게 모두 행위와의 관계를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께 공을 들였는데 하나님은 나한테 무엇을 해 주었느냐’는 식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믿음과 은혜를 강조하시고 인간은 행위와 공로를 주장합니다. 진짜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들을 받아들이고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모든 인간의 죄를 깨끗이 씻기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승천하심으로 천국을 보증해 주셨습니다. 장차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것입니다. 이런 사실들을 믿는 게 하나님의 일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들이 내게로 전이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십자가를 믿습니까? 죄가 사해졌습니다. 부활을 믿습니까? 승리가 보장됐습니다. 이런 진리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면 그분의 열정, 사랑, 능력, 용서, 비전으로 나의 인생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분이 하신 일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분을 믿는 일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주님이 하신 모든 일들이 내게 옮겨지는 축복이요, 은혜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썩지 않는 양식을 위해 일하라.”하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그의 보내신 아들을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더 깊어지고 확실해지기를 바랍니다. 더 충만해지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