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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살리는 것은 영입니다 (요 06:60-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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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나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명쾌한 해답을 얻은 게 아니라, 더 복잡해지고 혼란스러워졌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참 떡’이라는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먹일 수 있단 말인가? 예수님의 살이 참된 양식이요, 예수님의 피가 참된 음료라는 것이 말이 되는가?’하는 것이었습니다.

진리의 말씀에 ‘걸림 현상’
그들의 조상들은 만나를 먹고도 죽었지만,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떡을 먹으면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씀을 제자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60절 말씀을 보십시오.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사람은 이성이나 경험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에 대해 거부 반응을 보입니다. 거부감은 불쾌감으로 발전하고 불쾌감이 발전하면 불신하며 반항하게 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때까지,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때까지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천사들이 나타나 “너희들이 어찌하여 하늘을 쳐다보고 있느냐”며 나무라듯이 말했습니다. “올라가신 그분은 너희가 본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고 말할 때까지도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해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의 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61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진리’라는 것은 인간의 이성에 항상 걸리게 마련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진리대로 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면 진리를 받아들일 때 ‘걸림’이 되지 않습니다. 영의 세계에는 항상 육의 것들이 걸림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걸림이 되느냐?”고 질문하십니다.
걸림이 되는 이유는 인간의 한계와 죄성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과 사랑하심을 이해하기엔 인간의 죄와 불의와 미움이 너무 가득합니다. 미움은 사랑을, 불의는 의를, 죄는 거룩을 이해하지 못하고 걸림이 됩니다.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을 믿기에는 인간의 본능과 이성과 세속적인 것들이 걸림이 됩니다.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성이 어떻게 영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은 언제나 현실을 말하고 천국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합니다. 죄인은 하나님을 상상조차도 못합니다.
그러나 ‘걸림 현상’은 영적으로 거듭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점에서 축복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고 거부감을 가지며 ‘진리’에 대해 불쾌감을 느낀다는 것은 한편으로 하나님의 영의 세계를 바로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62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여기에는 굉장한 논리의 비약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하자 “그러면 내가 있던 곳으로 다시 올라가는 모습을 너희들이 목격하면 어떡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신다는 말씀은 성경 여러 곳에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하나님이셨고 그분과 함께 계시다가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또 14절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땅에 계셨지만, 본래 하늘에서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빌립보서 2장 6-8절에서 예수님의 본질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런 진리의 말씀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걸리는 이야기’입니다.

이성으로 풀 수 없는 영의 세계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걸림이 되어 서로 수군거립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이유에 대해 명쾌하게 대답하십니다. 63절 말씀을 보십시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이유가 자신이 하신 말씀이 인간의 말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즉 ‘육의 말’이 아니고 ‘영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관점에서 예수님의 말씀, 영의 말씀을 이해하고 깨달을 수 없는 것입니다. “육은 무익하다”는 말씀은 인간의 이성, 본능으로 영의 말씀을 해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해석할 수 없는 법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성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즉 육으로 듣고 이해하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육으로 해석되지 않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5절에서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와 대화를 통해 영의 말씀이 해석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설명하셨습니다. 유대 관원이며 종교적으로 성숙하여 누가 봐도 존경받을만한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니고데모는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여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라고 말합니다. 니고데모는 육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걸림이 되고 있는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요 3:5-7)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육은 육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성은 지성과 감성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만이 영을 해석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육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육은 육체를 말합니다. 육체는 땅에서 온 물질입니다. 육체는 죽어서 땅 속으로 들어가 썩어 흙이 됩니다. 그러나 육은 단순히 육체만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인간은 동물과 달라서 육체와 더불어 정신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가끔 ‘혼’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보편적으로 ‘인간’이라고 할 때 육체, 정신을 합해서 이르는 말입니다. 죽음은 육체와 정신이 분리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정신이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지성, 이성, 감성’을 포함하는 인간의 혼을 말합니다. 정신이 물질인 육체와 연합돼 있는 게 인간입니다.

문제는 인간의 육체와 정신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영을 이해할 수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정신으로 만든 위대한 사상, 철학, 종교, 예술, 과학으로 하나님을 찾을 수 없습니다. 다만 인간의 정신은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 현상만을 나타낼 뿐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 즉 하나님의 말씀을 그분께서 보내주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영은 영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고 친절하게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내 안에 성령님의 임재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이성으로 받는 사람이 있고, 영으로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성으로 받는 사람은 주님의 말씀에 대해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면서 갈증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영으로 받는 사람은 ‘아멘’하게 됩니다. 때로 성경을 읽을 때 졸리기도 합니다. 때론 하나님의 말씀이 달고 오묘하기도 합니다. 마치 스펀지에 물이 스며들듯 말씀이 쏙쏙 들어옵니다.
어떤 사람은 말씀에 감동해 눈물을 흘리며 찬송을 부릅니다. 그 사람에게 성령님이 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들어온 사람은 영의 말씀을 이해합니다. 하나님의 영을 이해하고 그리스도의 영을 이해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받으면 영이 풍성해집니다. 영이 힘을 받고 새로워지기 시작합니다. 이것을 가리켜 성경에서 ‘내가 너희에게 기쁨, 평안, 능력을 준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서 역사하실 때 희망과 생명, 기쁨과 능력을 충만하게 합니다.

모든 인간은 부족한 존재이지만, 하나님의 영이 임하실 때 영의 말씀을 깨닫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라는 말씀이 뜻하는 바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며 힘이 되지 않고 기쁨이 되지 않는 까닭은 육으로 듣고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11절에 재미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육은 스스로 부활할 수 없습니다. 육이 육을 부활시킬 수도 없습니다. 육을 살릴 수 있는 것은 영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영이 내 안에 들어오면 죽어 썩을 몸도 부활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절에서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죄는 죄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죽음은 죽음을 이기지 못합니다.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는 방법은 생명의 성령의 법이 각 사람 안에 들어오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구원을 얻게 되고 하나님의 영의 말씀을 이해하게 됩니다. 인간의 사상, 철학, 학문 등은 이성으로 이해가 됩니다. 그것은 곧 인간의 경험이 되고 새로운 사상을 만들며 종교화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은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도 없고 잡히지도 않습니다.

영이 영을 아는 법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이 있을 때 죽어 썩을 몸, 병든 몸도 부활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 과학, 의술로 죽을 몸을 다시 살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실 때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살리는 것은 영이다”라는 의미입니다. 내 안에 영이신 성령님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실 때 그리스도의 영이 나를 지배하고 역사와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에 이끌리는 삶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여러분 안에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내 안에서 어둠, 죽음, 절망, 좌절을 몰아내는 능력과 기적을 만드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 사실을 잘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64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당시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셔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예수님을 믿고 목사가 된 것을 생각하면 신기하기만 합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다를 게 없습니다. 모두 그렇고 그렇게 살아온 사람들인데 어쩌려고 제가 목사가 돼서 설교하는 위치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어둠을 물리치고 새벽부터 와서 예배하게 합니다. 누가 하게 했을까요? 65절 말씀을 보십시오.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섭리, 선택, 불가항력적인 은혜에 부딪히게 됩니다. 인생에서 설명할 수 있는 것보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더 많습니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많습니다. 잡히는 것보다 잡히지 않는 것이 더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끌지 아니하셨으면 나는 예수님께로 올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신기한 일입니다. 구원받은 것은 더욱 신기한 일입니다. 그것은 형용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왜 나는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주님의 은혜에 눈물을 흘리며 그분께 자신을 의탁하게 되었나요? 세상에 많은 사람들 중에서 ‘왜 나를’이라는 문제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66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와서 말씀도 듣고 기적도 보며 배부르게 먹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전부가 예수님을 따른 게 아니었습니다. 교회에 나왔다고 모두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언젠가 교회를 떠날 사람도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과 원수지간처럼 생각하고 살았던 사람이 생각지도 못하게 예수님께 돌아와 회개하여 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일본에서 있었던 집회가 몇 주 째 저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두 사람의 간증 때문입니다. 사업에 실패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되지 않게 자살하려고 방황하며 괴로워하던 남자 분이 동경 우리 교회에서 상상조차 못했던 예수님을 만나고 세례까지 받게 됐습니다.

또 우에다에서 만난 여인은 부도덕하고 재산마저 탕진한 남편에게 배신당하고 절망감에 싸여 죽음을 생각하다가 우에다교회에 와서 예수님을 만나고 아들과 함께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날 집회에 참석했던 3백여명은 모두 함께 울었습니다. 그 남자 분과 여인이 받은 구원의 감동이 모두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들의 안에 성령님이 들어가신 것입니다. ‘살아야 하는 희망’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원망하고 저주하던 생각에서 용서하고 받아들이겠다는 생각으로 변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사랑하는 형제 자매님들, 오래 교회에 다닌 것을 자랑하지 마시고 여러분 안에 하나님의 영이 계신 사실을 기뻐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인 되시고 그분의 영이 내 안에 있어서 영의 말씀을 듣고 죽을 몸도 다시 사는 은혜와 감격을 누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 있으면 학문하는 사람에게 학자의 영감을, 예술하는 사람에게 작품의 감성을, 작가에게 좋은 문장의 영감을, 일하는 사람에게는 노동의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사람의 이성이나 판단으로 삶을 이끌어 가지 않도록 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의 삶을 이끌게 하십시오. 그럴 때 상상도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넘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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