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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를 조롱하는 형제들 (요 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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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언제부터인지 “기쁘다 구주 오셨네”라는 말은 없고, 트리만 있는 크리스마스가 되었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서울시청 앞에 세우는 대형 크리스마스 트리에 ‘축성탄’이란 말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특정 종교를 선전한다는 이유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올해에 ‘축성탄’이란 말을 사용하고 십자가도 내걸어 불을 밝혔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이 오신 것을 환영하는 것 같지만, 자세히 내막을 들여다보면 곧 실망하게 됩니다. 그들은 ‘십자가’, ‘예수’라는 말을 빼고 행사를 가질 것을 주장합니다. 최근에 유럽 교회가 무너지는 이유 중에 하나가 기독교의 특성을 빼버리고 법제화하는 것에 따른 결과입니다.

예수님 친형제들의 반응
예수님께서 활동하신 당시에도 그분을 환영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거부하고 비판하며 조롱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무렵, 그분을 환영하고 비전과 꿈을 함께 나눈 사람은 극히 소수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도 그분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해 받지 못하고 외롭게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조롱과 멸시, 불신과 빈정거림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는 것으로 반응했습니다.
요한복음 7장에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의심하고 조롱하며 민중의 선동자로 치부해 버립니다. 심지어 귀신이 들렸다고도 합니다. 그분에 대해 심하게 반대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예수님의 친형제들이었습니다. 가족, 종교 지도자들,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에 대해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며 반대했습니다. 1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당시 예수님에 대해 종교적 적대감이 팽배했던 분위기였습니다. 특히 유대와 예루살렘에 사는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 시절을 보낸 갈릴리를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는 형제 넷에 누이들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13장 53-56절 말씀에 예수님의 가족 관계가 등장합니다. “예수께서 모든 비유를 마치신 후에 거기를 떠나서 고향으로 돌아가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저희가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56절 말씀을 보면,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누이들도 있었습니다.

가족들은 예수님에 대해 굉장히 우려하고 당황하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갑자기 이상한 말을 하고 다닌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고 말씀하시고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라고도 하시며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가장 힘들어하는 사람은 바로 가족들이고, 그 중에서도 함께 자란 형제들이었습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예수가 미쳤다, 귀신 들렸다’며 죽이려 하자, 가족들 입장에서는 창피하고 괴로웠을 것입니다. 2, 3절 말씀을 보십시오.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유대인의 큰 명절인 초막절을 맞아 가족들이 예수님께 유대로 갈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형제들이 예수님으로 인해 몹시 고민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형님이 이상한 소리를 하고 다니는데, 여기서 떠들지 말고 유대로 가서 얘기하십시오.” 기적이 있으면 유대에서도 보이라는 것입니다.
2, 3절 말씀에서 형제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의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의심의 단계를 넘어서 조롱까지 하고 있습니다. 아마 형제들이 예수님으로 인해 상처를 받았기 때문에 그런 반응이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4절 말씀을 보십시오.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형제들은 나타나기를 원하면서 묻혀있는 것은 모순이라고 주장합니다. 동생들의 시각에서 보면 당연한 것입니다. 지난 2천년 동안 예수님의 형제들과 똑같은 주장을 펴는 신학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즉 예수님 스스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스스로 자신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도 그런 배경에서 태어난 작품입니다. 인간 예수는 알 수 있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현대인으로서 이해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을 돌보신 휴머니스트로서 예수는 좋은데, 물위를 걷었다거나 부활했다는 얘기 등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친형제들도 같은 생각으로 반응했습니다.

‘진리’를 거부하는 사람들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보혈에 대해 거부 반응을 보입니다. 징그러운 피에 관한 얘기는 현대인들의 감각, 이성에 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당시도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에 대해 조롱하고 빈정대며 비꼬아 얘기했습니다. 5절 말씀은 형제들의 생각을 단도직입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이 말씀에서 중요한 세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영적인 것은 피를 나눈 형제, 가까운 가족도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 육의 문제는 이해할 수 있지만, 영적인 문제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나면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피를 나눈 형제 사이가 아니라도 항상 가깝게 지내게 됩니다. 영적인 것은 육적인 것과 다른 차원입니다. 핍박은 외부에서 오는 게 아니라 가족에게서 옵니다. 저는 한 부인을 알고 있습니다. 그 부인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남편을 구박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얼마나 변변치 못했으면 예수를 믿느냐”는 식입니다.

어느 날 새벽기도 후에 이 남편은 부인 때문에 속이 상해 울고 있었습니다. 그는 부인이 예수님에 대해 모르고 있는 상태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보고 영적인 문제가 보통 심각한 수준이 아님을 직감했습니다. 제가 그 부인을 만났더니 오히려 남편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교회에 가서 교양 있게 믿으면 되지, 왜 새벽기도에 가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가족들에게도 거부당해 굉장한 상처를 받으셨습니다.
셋째, 예수님께서는 친형제들에게 불신과 상처를 받았지만, 그들에 대해 원망과 섭섭한 감정이 없었습니다. 히브리서 2장 18절을 보면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고 했습니다. 마구간에서 탄생하신 예수님은 비천하게 태어난 사람을 이해하십니다. 십자가에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은 누구보다 억울한 사람의 심정을 잘 이해하십니다. 고난을 겪으신 예수님은 고난 당한 사람을 더욱 잘 이해하십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셔서 시험 당하는 사람들을 능히 도울 수 있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1절에도 비슷한 구절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신앙은 ‘시간’에 대한 이해
형제들은 예수님에게 더 이상 식구들을 창피하게 만들지 말고 빨리 가자는 식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두 가지 대답을 주셨습니다. 6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내 때’가 있고 ‘네 때’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동생들의 생각에는 초막절을 맞아 예수님께서 유대로 올라가는 것이지만, 예수님께서는 ‘내 때가 있다’고 단언하십니다. 예수님의 때란 그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요, 참된 메시아요, 구원자요, 왕 중에 왕이요, 만주의 주라는 사실을 선포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믿고 경배하게 되는 시기를 말합니다. 아직 그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그때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장차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어 들림을 받아 그분이 참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나 혼인 잔치 집에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머니 마리아가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말했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예수님께 ‘기적을 베풀어 달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말을 듣고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답변하십니다. 어쩌면 굉장히 매정하게 들릴 수 있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기적을 베풀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 기적을 베풀 시간을 조절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께서 당장 기적을 보여주셨으면 하고 바랍니다. 그래서 금식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을 압박해 갑니다. “나는 급한데, 하나님은 왜 천천히 가십니까? 왜 오랜 시간을 기다리게 하십니까?”하고 조급해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내 때가 아직 아니다’라고 하십니다. 그 말씀은 이제 기적을 베풀 때가 서서히 오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을 통해 ‘때’에 대해 자주 언급하십니다. 12장 23절에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을 얻을 때란 영웅처럼 대접받고 환영받는 때를 말하는 게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때가 왔다는 의미입니다. 이어서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하십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밀 알이 죽을 때 영광, 기적, 구원 등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광의 클라이맥스를 박수와 성공에 두고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달리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 생활이란 ‘시간에 대한 이해’입니다. 구원도 시간의 이해에서 비롯합니다. 우리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 직장, 결혼을 거치면서 시간표에 따라 생활합니다. 자신의 시간 계획에 맞춰 행동하고 ‘하나님이 자신의 시간표에 맞출 것’을 요구합니다. 자신의 시간표에 맞지 않으면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하나님이 기도를 듣지 않는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모두 자신을 중심으로 시간과 계획을 세웁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시간을 인정하고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께는 나에게 향한 계획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 축복하고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시간표에 나의 시간표를 맞추는 것이 영적 통찰력이고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에 맞추게 될 때에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을 이해하고 인내할 수 있습니다. 역사의 움직임도 하나님의 시간이란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우리는 “하나님께서 옳습니다”하고 고백하게 됩니다. 예기치 않은 고난을 통과한 후에 “하나님께서 옳습니다”라고 말하게 됩니다. 그런 믿음의 고백을 통해 영적 통찰력이 있게 되길 축원합니다.

‘인내’하는 ‘믿음의 길’
예수님께서 동생들에게 한 가지 더 대답을 주셨습니다. 7절 말씀입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예수님께서 세상의 모든 행위가 악하다고 증거하고 지적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분을 미워합니다. 심지어 종교 지도자들조차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생각한 것입니다.
요즘도 목사인지 사회 운동가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 분들이 많습니다. 최근 사회적으로 유명한 한 분이 어느 모임에서 “예수님과 부처님과 잡신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고 기도했답니다. 그 얘기를 듣고 홍정길 목사님이 화가 나서 “나는 아멘 할 수 없소”하고 말했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이 악하고 잘못됐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떼로 몰려와서 죽이려 하고 핍박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요 15:22),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예수님께서 세상의 악과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을 지적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싫어하고 미워하며 죽이려 한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8, 9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니라

친형제들은 예수님을 데려가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때가 아니다’고 말씀하신 것은 ‘때가 차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때가 차야 움직이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말씀에 사랑을 정의하면서 ‘오래 참고’로 시작합니다. 로마서에서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개념이지만, 히브리서에서 의인은 ‘기다림으로 산다’는 내용입니다. 믿음이란 조급하게 해치우는 게 아니라 언제까지나 기다리는 것입니다. 평생 한 비전을 갖고 오직 한 믿음으로 가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간다’는 말은 ‘기다림으로 간다’는 뜻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대상에 대해 오래 기다리고 참아주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의 허물과 미숙함에 대해 기다려 줍니다. 온전한 성인이 되어 결혼할 때까지 부모는 자식의 모든 것을 수용하고 사랑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미숙함을 참고 기다리며 기대감을 놓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가야 할 길
이제 가족들마저 떠나고, 예수님께서 홀로 남으셨습니다. 친형제들마저 이해하지 못하고 떠났을 때 주님은 얼마나 외로우셨을까요? 그러나 인생의 본질은 외로움입니다. 삶에서 고독을 느낄 때 특이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만약 당신에게 하나님이 계시고 진리가 있다면 고독과 외로움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진짜 두려워해야 할 것은 당신 안에 진리가 없는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진정 외로운 것은 우리 안에 하나님이 없을 때입니다. ‘불확실한 것’이 심각한 것이지, 홀로 있다는 것이 심각한 게 아닙니다. 가족이 있어도, 자식이 있어도 사람은 언제나 혼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위로가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축복은 진리이신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내 길을 잘 가고 있다. 이 삶을 넘어서 영원까지 가는 것이다. 죽음을 초월해 이 길을 가는 것이다”는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길 축원합니다. 이 믿음을 가질 때 세상은 결코 외롭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다릴 수 있고 참을 수 있으며 일어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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