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예수를 귀신들렸다 말하는 사람들 (요 07:10-24)

첨부 1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다양하게 반응했습니다. 더러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었고,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요한복음 7장에서 예수님의 친형제들은 조롱하고 빈정대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의심하고 서로 수군거렸습니다. 예루살렘에 모인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귀신이 들렸다’고까지 했습니다. 또 바리새인을 포함한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했습니다.

‘때’를 중요하게 다루신 예수님
과연 예수님은 어떤 분일까요? 그 당시뿐 아니라, 지금도 이에 대한 논란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어떤 휴머니스트는 ‘예수는 가장 아름다운 이상을 품은 인간’이라고 했습니다. 최근에는 ‘예수는 신화다’며 극단적으로 표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한편, 무신론자들은 예수님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않는 경향을 보입니다. 예수님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무시할 수 없는 이유에는 어떤 신비한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은 초막절에 친형제들과 헤어져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10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 자기도 올라가시니 나타내지 않고 비밀히 하시니라

이 말씀에서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따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것입니다. 형제들에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아서 가지 않겠다”고 말씀하시고 홀로 가셨습니다.

둘째는 비밀리에 가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약간 모순되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모친 마리아가 혼인 잔칫집에서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말했을 때, 예수님께서 “여자여,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라며 거절하시고도,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사건과 비슷한 경우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가지 않겠다’하시고선 비밀리에 가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런 모습에서 예수님이 ‘때’를 중요하게 생각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시간을 잘 계산하심으로써 자신의 사역이 왜곡되거나 방해받는 것을 사전에 방지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르지도 않고 늦지도 않게 가장 알맞은 시간에 올라가십니다. 사람들의 오해를 불러일으키거나 체포당함으로써 ‘십자가의 길’에 지장을 주는 일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따로 조용히 가셨지만,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어디 계신지, 언제 나타날 지에 대해 관심이 많았습니다. 11절 말씀입니다.
명절 중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그가 어디 있느냐 하고

사람들은 초막절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시리라고 추측했을 것입니다. 그분이 오셔서 또 무슨 말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예민하게 신경 쓰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유대인들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반면, 명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모인 많은 순례자들 사이에는 예수님을 두고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다만 공개적으로 논쟁하지 못하는 까닭은 유대인들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12,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 대하여 무리 중에서 수군거림이 많아 혹은 좋은 사람이라 하며 혹은 아니라 무리를 미혹하게 한다 하나 그러나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드러나게 그를 말하는 자가 없더라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좋은 분으로 평가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신선했고 충격적이며 그분의 행동이 정의롭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군중은 예수님의 태도가 이기적이 아님을 느꼈고, 진실한 인격을 소유한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항상 하나님 중심이었기에 좋은 분으로 평가한 것입니다.

주님에 대한 사람들의 그릇된 평가
그러나 사람들의 평가가 좋은 것이긴 하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굉장히 피상적이고 부적절한 평가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아라는 사실을 간과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예수님은 참 좋은 분이고 성자이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인류 역사상 탁월한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다’는 말도 일반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구원자’라는 말을 절대 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대중의 선동가였다고 부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신선하지만, 전통 종교와 다르고 기득권층을 흔드는 말이기 때문에 거부감을 품었습니다. 잘못된 관점으로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에 대중을 유혹하는 선동적인 모습으로 비춰졌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가 인기 발언을 한 것 같다. 굉장히 이기적인 동기가 숨어 있다’는 식으로 평했습니다.

요즘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는 사생아다, 예수는 신화다’는 내용을 담은 책들이 잘 팔리고 있는 세태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더 혹독한 표현을 썼습니다. 마태복음 9장에 “예수는 죄인들의 친구다”고 했고, 11장에는 “예수는 술을 즐기고 탐하는 자다”라고 표현했습니다. 12장에는 “법을 파괴하는 불법자”와 “귀신의 힘을 빌어 기적을 일으킨다”고 표현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제자들의 예수님께 대하는 태도입니다.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 십자가에 넘겼습니다.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도 믿지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오해와 편견은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새롭고 충격적인 주님의 가르침
14절 말씀에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무시하고, 그에 대해 모욕하려는 충동이 일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 유대인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자 사람들은 “학문도 없는 사람이 뭘 안다고 가르치느냐”는 반응이었습니다. 또 “배운 것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잘 가르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푸신 기적뿐 아니라, 가르침에 대해 사람들이 충격을 받은 사실을 문맥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격하시키고 인정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항거할 수는 없었지만, 종교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던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구약 말씀에 대한 지식, 통찰력 등은 어떤 종교 전문가도 따라올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살 때 성전에서 제사장들과 토론하는 것을 보고 주변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도 말한 적이 없는 독특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2천년이 지난 지금도 예수님의 가르침은 세상의 어떤 사람의 가르침과도 구별됩니다.
예컨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내용은 아무도 말하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 이후로 하늘 나라에 대해 언급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용서와 사랑에 대한 가르침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종교 창시자도 예수님과 같은 차원의 사랑과 용서를 설파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삶의 기준을 명확히 말씀해 주십니다. 진리, 성령, 어둠의 세력, 종말 등에 대해 분명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이는 구약의 어떤 예언자도 얘기하지 못한 내용입니다. 예수님 이후 많은 철학자와 사상가들이 등장했지만,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는 권위와 영적 통찰력이 있어서, 당시 사람들은 말씀을 듣고 마치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굉장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내 교훈은 나를 보내신 이의 것’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거절하고 비판하며 심지어 예수님을 공격하는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16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내가 하는 말은 나의 사상이나 지식이 아니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자신들의 경험이나 사상 등을 주장하는 데 반해, 예수님께서는 말씀의 근원이 하나님의 뜻임을 선언하십니다.
설교자는 설교할 동안에 ‘내 생각을 전하는 게 아니라 성경에 있는 것을 전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설교가 끝난 후 매사를 그런 식으로 말하기는 힘듭니다. 신문이나 TV 사설은 사람의 사상이지 설교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내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이라고 확실하게 정의하십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하시면서 세 가지 기준을 언급하십니다. 17절 말씀을 보십시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첫째, ‘당신의 생각과 말이 하나님의 뜻이냐’고 말하려면 스스로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말하는 사람이나 글 쓰는 사람이 하나님의 생각을 표현한 것’이라는 사실을 자신이 안다는 것입니다. 18절 말씀을 보십시오.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둘째, 내가 스스로 생각한 것을 말함은 자기 영광을 구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이 아니라, 개인의 목적을 내포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야 합니다. 따라서 찬양할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설교도 위험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고(故)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이 있었을 때, 청년들이 “왜 목사님은 비겁하게 그에 관한 설교를 하지 않느냐”고 대들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에 그 말이 없습니다”하고 답변했습니다. 저는 임의로 본문을 뽑아서 끼워 맞추는 식으로 설교하지 않습니다.

‘진리’를 등지고 ‘딴죽걸기’
하나님의 이름, 교회, 믿음을 빙자해 인간의 철학이나 사상 등을 말하는 것은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께 영광을 구하는 자는 그 속에 불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흠이 없습니다. 그로 인해 많은 오해와 비판과 공격을 받았습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누구도 예수님을 기억해 주리라곤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죽지 않는 것이며 영원한 것입니다. 죽어도 다시 사는 것이 진리입니다. 19절 말씀을 보십시오.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고 하느냐

사람들은 진리의 말씀이 이해되지 않을 때 말꼬리를 잡습니다. 본 뜻은 모두 잊어버리고 몇 가지 표현을 빌미로 물고 늘어지며 사람을 괴롭힙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꼬리를 잡아 공격했습니다. “우리가 언제 당신을 죽이려 했느냐? 예수는 확실히 귀신 들린 것 같다”며 공격했습니다. 20절 말씀입니다.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사람들은 예수님을 ‘귀신 들린 것’으로 몰고 갔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베푸신 기적은 귀신의 힘을 빌린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욕을 하면 욕한 사람만 괴롭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큰소리 치는 사람은 자신만 괴롭습니다. 이유는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조롱과 불신과 의심과 모욕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발견했습니다. 경건한 사람들,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 고통과 절망 중에 있던 사람들이 주님을 만났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막는 세력이 거세다 해도 주님을 발견하고 믿는 사람들은 생기게 마련입니다.
결국 베드로도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성령님께서 임하셨을 때 예수님을 볼 수 있는 눈을 뜨게 되어 비겁했던 베드로가 순식간에 용감하게 변했습니다.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의심 많았던 도마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며 무릎을 꿇었습니다. 예수님을 핍박했던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인생에 대전환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삶’으로 전하는 메시지
성 어거스틴, 루터, 칼빈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 웨슬레도 풍랑을 만나 죽음의 위기에 처했을 때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모라비안 형제들도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윌리엄 케리는 하나님을 만나고 인도로 들어갔습니다. 영국 ‘캠브리지 세븐’ 중의 한 명이었고, 유명한 크리켓 선수였던 C. T. 스터드는 아프리카에서 일생을 마쳤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에서 생을 보냈습니다.
주기철, 손양원 목사님은 무서운 고문 속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특히 손양원 목사님은 자신의 아들을 살해한 공산당을 양아들로 받아들였습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는 살아있는 많은 순교자들이 있습니다. 선교 현장에서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수고하며 헌신하는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돈, 권력, 인기가 있는 곳에는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듭니다. 그러나 비참한 곳, 손해보는 곳, 건강이 염려되는 곳,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곳에는 누구든 가려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곳을 스스로 찾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예수님이 2천년 전에 죽어 무덤에 갇혀 있는 분이라면, 어느 누가 감히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복음을 들고 오지로 갈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는 가난한 사람을 돕는다고 할 때, 진정으로 돕는 사람은 몇몇 되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자신의 철학을 믿고 있는 사람은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가난한 사람을 위해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국의 유명한 대주교가 인터뷰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신문 기자가 “당신은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하고 물었습니다. 대주교는 “나는 그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대주교인 나를 섬기기 위해 50명의 시종들이 있고 영국에서 제일 좋은 침대, 제일 좋은 성에서 지내는 사람이 그런 말할 자격이 있겠습니까? 저는 가난한 사람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말뿐이지 실제 그렇게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사람의 말에서 진실한 고백을 보았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님을 만난 사람만이 진실한 희생과 헌신을 이룰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아 계십니다.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삶의 현장에서 순간마다 현존하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