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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수의 강이신 예수 그리스도 (요 07:3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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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7장에서는 유대인의 3대 명절 중에 하나인 초막절에 대해서 여섯 번이나 언급하고 있습니다. 성경 말씀 한 장에서 이렇게 많이 초막절을 소개한 예가 없을 정도로 특이한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초막절을 중심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2절),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8절),
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비밀히 하시니라(10절),
명절 중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그가 어디 있느냐 하고(11절),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14절),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37절).”

예수님께서 명절을 중심으로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대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명절이 주는 의미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려는 내용이 연결돼 있기 때문입니다.

초막절 끝 날에 말씀하시다
유대인들이 지키는 큰 절기가 세 개 있습니다. 그것은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입니다. 초막절을 다른 말로 하면 ‘장막절’이라고 합니다. 초막이나 장막이라는 말을 좀더 쉽게 설명하면 ‘천막’입니다. 천막 절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초막절은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띠고 있습니다.
첫째,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해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황했습니다. 그들은 약속된 축복의 땅에 들어가기 위해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광야에는 안정되게 주거할 수 있는 집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40년 동안 사막에서 천막 생활을 했습니다.
광야에는 먹을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려 주셔서 먹는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광야에는 마실 물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반석에서 생수를 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40년 동안의 장막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만나, 생수, 은혜 등을 기억하며 7일 동안 대축제를 열었습니다. 그것이 초막절입니다. 일종의 민족 축제와 같은 것입니다.

둘째,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해에 세 번 추수를 하는데 마지막 추수 때가 초막 절기입니다. 레위기 23장 39-43절의 말씀대로 첫날에는 아름다운 실과와 종려 나뭇가지와 시내버들을 들고 춤추며 축제를 열었습니다. 지금의 추수감사절과 같은 것입니다. 일년 중 마지막 추수 때, 그동안 하나님께서 비를 주셔서 농사를 잘 짓게 하시고 풍성케 하신 것을 감사하며 일주일간 하나님 앞에서 제물을 바치며 축제를 갖습니다.

초막절에는 제단에 제물을 올려놓습니다. 그 제물에 포도주를 붓는 것이 일반적인 데, 초막절에는 물을 붓습니다. 제사장은 많은 사람들과 함께 실로암 연못에 가서 물을 떠다가 수장문(Water Gate)을 거쳐 제단으로 와서 물을 붓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37절 말씀과 상징적으로 연결됩니다. 물을 부을 때, 그들은 이사야서와 시편의 말씀을 낭송하면서 축제를 즐깁니다.
‘풍성한 비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년에도 풍성한 비를 주셔서 농사가 잘 되게 해 주십시오’하는 의미로 물을 붓습니다. 축제는 칠 일 동안 계속 되는데 특히 마지막 날은 큰 날로 절정에 해당합니다. 이날을 하나님의 사죄의 날로 선언하고, 실로암 연못에서 떠온 물을 계속 제단에 붓고 나팔을 불며 종려 나뭇가지를 흔들고 환호하며 춤을 춥니다.

목마른 자를 부르심
초막절 큰 날에 모든 축제가 절정을 향해 갈 때, 사람들이 종려 나뭇가지를 흔들고 춤을 추며 감사하고 감격할 때, 예수님께서 서서 무리를 향해 큰 소리로 외치십니다. 37절 말씀을 보십시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장막 절기가 끝나 가는 마지막 날에 모든 사람들이 축제의 절정에 빠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서서 큰 소리로 초청의 말씀을 하십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이 말씀의 특징은 초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초청하고 계십니다.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초청의 그림입니다. 비록 사람이 죄를 지었고 하나님을 떠나 세상에서 죄악된 삶을 살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십니다. 이 초청은 ‘저녁에 밥 한끼 먹자’는 식의 부름이 아니라 영원, 축복, 행복에의 초대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초청하시는 메시지가 마태복음 11장 28절에도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초청이란 반갑고 좋은 것입니다. 초청은 ‘사람들이 나를 기억하는구나. 나는 중요한 사람이구나. 나를 파티의 주인공으로 불렀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반대로 달갑지 않고 부담스러운 초청도 있습니다. 응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게 되는 초청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초청은 절대로 부담스러운 초청이 아닙니다. 절망, 혼돈, 흑암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구원을 주시는 초청입니다. 예수님의 초청은 아주 값지고 의미 있는 귀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7장 37절 말씀을 다시 주목해서 보십시오. ‘서서 외쳐’라는 두 단어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어서서 우리를 초청하시는 겁니다. 또 큰 소리로 초청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초청하시는 분의 정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또 ‘내가 너를 확실히 불렀다’고 하는 의도를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초막절 축제 중에 일어서서 큰 소리로 부르신 것은 초청의 긴급성을 말해 줍니다. 주님께서는 시간을 놓치지 않으시고 큰 소리로 부르셨습니다.
37절 말씀에서 우리는 중요한 몇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초청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면서 긴급한 초청을 하십니다. “내게로 오라”고 부르십니다. 초청의 핵심은 ‘오라’는 것입니다. 병든 자, 가난한 자, 절망하는 자 등 모두 오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축제 중에 갑자기 일어나서 외쳤기 때문에 사람들은 굉장히 놀라고 한편으론 의외의 일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평소 예수님께서 소리를 지르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아마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끄러움도 없이 조금도 주저함 없이 분명하게 메시지를 전하십니다.

모든 사람은 초청의 대상이다
37절 말씀에서 두 번째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초청의 대상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초청하고 계십니다. 어떤 특별한 사람만을 초청하지 않으십니다. 빈자나 부자, 병자나 건강한 자, 실패한 자나 성공한 자, 무명인이나 유명인, 백인이나 흑인 등을 무론하고 누구든지 목마르면 와서 마시라고 초청하십니다.
여기서 구원의 초청에는 조건이나 제한이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신도 초청의 대상입니다. 우리 모두는 초청의 대상에서 제외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2장 21절 말씀을 보면, 요엘 선지자의 이야기에 오순절에 성령님이 부어질 것이라면서 마지막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주님의 초청의 대상입니다. 주님께로 와서 목마른 인생을 해결할 수 있게 되길 축원합니다.

형용 못할 구원을 은혜로 얻다
37절 말씀에서 발견할 수 있는 세 번째는 초청의 내용입니다. 한마디로 “내게로 와서 마시라”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11장 25, 26절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 곳곳에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생수요, 영원히 배고프지 않게 하는 하늘에서 내려온 떡인 나를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요, 나를 먹는 자는 영원히 배고프지 않을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서 55장 1절 말씀에 요한복음에 있는 초청의 말씀과 비슷한 예언이 있습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목마른 자들은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초청의 메시지를 전파하십니다. 주님의 초청에는 돈이 들지 않으며 어떤 희생이나 대가를 치를 필요도 없습니다. 은혜는 ‘공짜’입니다. 은혜는 너무 비싸 값으로 매길 수 없는 것입니다. 공짜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싸다’라는 뜻과 너무 귀해 값을 매길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은 값으로 계산할 수 없는 엄청난 것입니다.

어떻게 사랑을 값으로 계산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가 집안에서 빨래하고 청소하며 아이들을 키우는 일을 어떻게 돈으로 계산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것이기에 아예 값을 매기지 않는 것입니다. 구원도 값으로 매길 수 없는 것입니다. 구원은 너무나 값어치 있는 것이지만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겐 공짜로 주십니다.
37절 말씀에서 알 수 있는 네 번째는 예수님의 초청에 응하는 방법입니다. 38절 말씀을 보십시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예수님을 믿고 초대에 응하다
예수님께서 초청에 응답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초청에 응하는 방법입니다. 믿음은 이성을 초월합니다. 알고 나서 믿는 게 아니라 믿고 나서 알게 되는 것이 믿음입니다. 사람의 이성으로 결코 믿음을 만들 수 없습니다.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주님으로 마음 속에 모셔들이는 것이 초청에 대한 응답입니다.
지금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속히 예수님을 영접하십시오. 인생의 경험으로는 예수님에 대해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는 이유는, 예수님은 이성으로 붙잡을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이성은 지극히 제한적이고 무능하기까지 합니다. 그런 이성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나가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께 대한 믿음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초청의 열매입니다. 시편 78편 15, 16절에 “광야에서 반석을 쪼개시고 깊은 수원에서 나는 것같이 저희에게 물을 흡족히 마시우셨으며 또 반석에서 시내를 내사 물이 강같이 흐르게 하셨으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초청을 받아들여 몸과 영혼에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스가랴서 14장 8절에도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생수는 예루살렘에서 나옵니다. 에스겔서에서는 생수가 성전에서 나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수의 강은 일년 열두 달, 사계절 어느 때나 쉼이 없습니다. 생수는 휴식 없이 계속 흐릅니다.
정말 놀라운 말씀입니다. 정말 영원하고 완전한 축복의 말씀입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게 되기를 바랍니다. 요한계시록 21장에 나오는 생수의 강 양쪽에는 열두 나무가 자라, 시냇가의 나무가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듯이, 열두 나무가 날마다 새로운 과실을 내는 축복이 있습니다.

인생의 광야에서 ‘생수의 강’을 경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39절 말씀에서 확실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생수의 강이 흐르는 것은 성령님의 활동, 살아있는 능력, 풍성한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와 예수님을 믿고 물세례를 받지만,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령님 안에서 흐르는 생수의 강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가야지요’라고 말하면서 보통 때와 별 다른 것 없이 살아갑니다. 오랜 세월 동안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들으며 헌금도 합니다. 그러면서 바깥에서는 가끔 술도 한잔씩 합니다. 그런 생활에 전혀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나오지만, 생수의 강이 흐른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제나 오늘이나 똑같고 아무런 감동도 없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생수의 강이 흐르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겁니다.
물이 흐르지 않는 강이 있습니다. 물이 말라 버린 우물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나오고 성경도 보는데, 그 사람의 삶에서 감동과 충만과 열정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 얼굴이 그 얼굴입니다.그런데 어떤 사람의 얼굴에는 빛이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돈이 없어도 불안하지 않고 병들어도 위축되지 않으며 실패해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얼굴에는 항상 기쁨으로 충만하고 자신감에 차 있습니다.

제가 신학생이었을 때 친구들과 함께 영락기도원에 간 적이 있습니다. 새벽 1시에 도착했는데 기도원의 문이 잠겨 있었습니다. 그래서 문 앞에 앉아 날이 밝도록 찬양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는 사람은 약간 미친 사람과 같습니다. 돈이 없고 가진 것이 없어도 기쁘고 즐겁기만 합니다. 오늘 여러분은 그런 은혜를 경험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성령님이 계십니다. 여러분 안에 성령이 충만하고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예수님의 초대장을 드리고 싶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른 것처럼, 스가랴서나 시편의 말씀처럼, 조상들이 광야에서 샘물을 경험한 것처럼, 생수의 강의 흘러 넘칠 것이다.”
우리의 인생은 모두 광야와 같습니다. 세상은 마치 사막과 같습니다. 인간의 실존이란 사막에서 장막을 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 인생에서 생수가 터져 흘러 넘친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사건입니다. 생수가 있는 곳에 나무를 심으면 잘 자랄 수 있습니다. 생수가 있는 곳에는 물고기마저 잘 살 수 있는 있습니다.

여러분, 바닥난 인생을 살지 마십시오. 우리는 충만한 사람입니다. 생수가 흘러 넘치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이 시간에 여러분을 위해 간절히 중보 기도합니다.
“주님, 우리 성도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십시오. 그냥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왔다 갔다 하고, 헌금 좀 하고, 좋은 일 조금 하는 것으로 그치는 무기력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생애를 헌신할 수 있고 삶 전체를 주님께 드릴 수 있는 충만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샘물이 있는 곳에 나무가 살아나듯이, 나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살아나고 내가 존재하는 곳에서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는 행복의 축제를 여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모든 성도들이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는 경험을 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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