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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시 불붙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논쟁 (요 07:4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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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면서 하나님을 기뻐하고 환영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품으면, 삶은 밝고 건강하게 됩니다. 사람은 누군가 자신을 의심하고 비판하면 마음의 문을 닫게 됩니다. 반대로 믿어주고 환영하면 마음의 문을 열고 대화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하고 환영하면, 하나님께서 문을 여시고 풍성하게 채워주십니다.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올해에 좋은 소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지난 7년 동안 고난을 겪었던 한동대학에 기도로 동참하며 1백 50억원 이상 헌금했습니다. 이제 모든 재판이 끝났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저도 한동대학 일로 고소를 당해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 와중에 배운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아무리 고통이 심하고 절망적이라 해도 하나님께서 끝을 내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끝이라 해도, 하나님께서 끝을 내지 않으시면 끝나지 않은 것입니다. 인생에서 하나님은 결코 끝나지 않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고 인도하십니다.

믿음이란 짧은 시간에 끊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장기간에 걸쳐 인생과 우주 전체를 보고 생각해야 합니다. 순간의 잘못을 탓하며 자학하고 절망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절망하고 자학하는 것은 믿음의 관점을 놓친 데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믿음은 일의 진행 과정을 끝까지 지켜보는 것입니다. 한동대 사건 해결에 큰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명절이 되면 가장 외로운 사람이 외국인 근로자들입니다. 설날에 교회의 공간이 비면 외국인 근로자들이 와서 채웁니다. 식당도 그분들이 사용하게 됩니다. 잔치를 벌이며 향수를 달래는데, 여기가 고향이 되는 셈입니다. 성도님이 오셔서 그분들을 위해 사랑과 정성을 베풀어주십시오. 그분들에게 큰 위로가 될 것입니다. 이국 땅에서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면 예수님을 만날 확률이 무척 높습니다.

우리는 30개 지교회에 대한 꿈이 있습니다. 외국인 근로자를 위한 교회도 세울 계획입니다. 교회가 그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할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천에 교회를 세운 지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벌써 650명이 모입니다. 자리가 모자랄 정도로 큰 부흥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다음달 2일에 수원에도 교회가 생깁니다. 창립은 4월 쯤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또 올해 들어 특히 감사한 것은 16명의 선교사를 파송한 일입니다. 우리는 선교사를 보내는 것뿐 아니라,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축복하는 일이 더욱 중요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다양한 평가
지난 2천년 동안 예수 그리스도만큼 논쟁과 토론의 대상이 된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는 죽었는가, 살았는가!’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인가, 인간의 아들인가!’ ‘예수는 초인인가, 범인(凡人)인가!’ ‘예수는 구세주인가, 성자인가!’ ‘예수는 역사인가, 신화인가!’ 이런 주제들은 예수님 당시에만 있었던 게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들입니다.
왜 2천년 동안 예수님에 대한 논쟁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는 것일까요?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죽은 자에 대한 논쟁은 없습니다. 진리가 아니라면 논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살아 계시고 진리이시기 때문에 그분에 관한 논쟁은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7장에서 당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논쟁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논쟁은 부활 사건이 있을 때까지 계속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요한복음에서 세 부류의 사람들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가족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의심하고 믿지 않았습니다. 한 집에서 같이 자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님 주위에 있던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고 조롱했습니다. “우리가 너의 집과 부모를 아는데, 네가 메시아라니….” 그래서 선지자는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셋째는 예루살렘에 있는 무리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귀신 들린 게 아니냐?”고 했습니다. 더욱이 종교 지도자들과 권력자들은 예수님을 민중의 선동가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선량한 민중을 혹세무민한다고 몰아붙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많은 비난에도 불구하고 따르는 무리들에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또 새벽 3시쯤에 배를 타고 가다 풍랑을 만나 고생하는 제자들을 보시고 물위로 걸어와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런 사건이 있을 때마다 한편의 무리들은 예수님을 좋아하고 환영하며 따랐습니다. 또 한편의 무리들은 예수님에 대해 부정적이고 의심하며 조롱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마다 사사건건 논쟁을 일삼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들에게 자신은 하나님께서 보내셔서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니 나를 먹는 자는 영원히 주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목마른 인생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다”고 가르쳤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어떤 사람들은 마음으로 믿었지만, 어떤 사람들은 의심하고 부정하며 조롱했습니다.

어떤 평가에도 십자가의 길 가신 주님
예수님께서는 언제 어디서나 사람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어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때마다 주님은 놀라운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그것은 위대한 초청과 약속이었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예수님은 자신을 비판하고 조롱하는 사람들에게 적대감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고 영원한 생명의 떡, 생수를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의 비판과 논쟁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자기 길을 가십니다. 십자가의 길, 전도자의 길을 가십니다. 그분은 자기를 체포하러 오는 무리들 앞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담대하게 영원으로, 행복으로 초대하십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사람은 너무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나게 되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가던 길에서 뒤돌아 서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처음의 길을 계속 걸을 수 있는 것은, 나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독특한 특징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주님께서 주신 은혜와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오로지 믿음의 길을 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조롱, 위험, 어려움에 귀기울이지 않고, 끊임없이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40-42절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혹은 이가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혹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의 살던 촌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예수님은 항상 논쟁의 대상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질문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께서 정체성의 혼돈으로 인해 질문하신 게 아닙니다.
사람들은 자신감이 없을 때 다른 사람의 사소한 말에도 더욱 예민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백을 듣고 싶어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 설명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하고 질문하십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베드로가 직접 고백하는 믿음의 상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의 얘기가 아닌 각 개인의 고백을 친히 듣고 싶어하십니다. 여기서 세 분류의 사람들을 소개합니다.

첫째,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굉장한 평가입니다. 왜냐하면 구약의 선지자는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하나님의 종이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백성들에게 전하는 예언자입니다.

둘째, 41절 말씀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살펴보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여기면서도 마음에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주위에는 예수님도 믿고 교회에 다니지만, 절대로 변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 예수님, 성경도 모두 믿지만 결코 자신의 삶을 예수님과 연결시키지 않습니다.

셋째, 예수님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또 41-42절 말씀에 “어떤 이는 그리스도가 갈릴리에서 나겠느냐?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의 살던 촌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고 합니다.
이들은 성경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습니다. 종교에 익숙해서 메시아 사상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미가서에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나온다는 예언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예수가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이것은 성경, 종교, 전통적으로 틀리다”고 주장합니다. 한마디로 종교적 지식이 많고 구약에 정통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흔적을 가진 사람들
그렇다면 정말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어떤지 생각해 봅시다.

첫째,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인류의 구원자이심을 받아들이며 환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하나님을 믿느냐? 귀신도 믿고 떠느니라”고 하십니다.

둘째,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단계를 넘어 그분 없이 못 산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존재와 위치와 신분을 인정하고 그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믿음의 단계를 넘어, 주관된 인격으로 그분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는 매일 연락을 취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죽기까지 헌신합니다. 삶에서 예수님께 대한 헌신, 희생이 없다면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한 사람 중에 옥합을 깨뜨린 여인이 있습니다. 그녀는 가장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고 머리카락으로 씻겼습니다. 우리는 그 여인에게서 깊은 사랑의 고백을 읽을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 수가성의 여인도 물 길러 왔다가 물동이를 우물가에 내버려두고 동네로 뛰어들어가 “내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외쳤습니다. 여인의 마음에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헌신이 교감하고 있습니다. 간음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으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의 마음 속에는 예수님이 각인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양쪽 십자가에 두 강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살아난 바라바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스스로 재수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을까요? 바라바의 마음 속에는 예수라는 이름이 각인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마음에 각인되는 일입니다. 자신의 몸에 그리스도의 흔적을 남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제 몸에는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흔적이 있습니다. X 레이를 찍으면 폐병을 앓은 흔적이 나타납니다. 그것은 저에게 아주 중요한 자극제가 됩니다. 왜냐하면 폐병에 걸렸을 때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저를 잃은 양을 찾아 섬기는 일꾼으로 부르셨습니다. 저는 X 레이 촬영 필름만 보면 항상 “하나님께서 나를 폐병에서 건져 목사 되게 하셨다”는 흔적으로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흔적을 가진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왜 우리는 그분을 위해 희생하지 못하고 죽지 못하는 걸까요? 그것은 받은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받은 만큼 줍니다.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자신을 사랑할 줄도 모릅니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조건 없는 사랑, 변함 없는 사랑, 의심 없는 사랑을 받은 사람은 그분을 위해 희생하며 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말이나 생각 그리고 교리적으로 ‘예수님은 그리스도시다’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삶 속에 생생한 흔적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피어나는 새인생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두고 논쟁을 벌이고 있을 때, 한편에서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했습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 권력층의 지시를 받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러 갔다가 실패하고 돌아왔습니다. 43-46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를 인하여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 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 하속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로 오니 저희가 묻되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냐 하속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

하속들의 말에 의하면 예수 같은 분은 없다고 합니다. 그분의 말씀은 지금까지 어떤 누구에게서도 들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에게는 영적 권위와 탁월성이 있었다고 증언합니다.
그뿐 아닙니다. 예수님의 기원과 탄생에도 독특성이 있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태어나신 분입니다. 그분의 삶에는 어떤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독특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 치유와 회복에는 비교할 수 없는 독특성이 있습니다. 그분은 문둥병자, 앉은뱅이, 눈먼 사람, 혈루병에 걸린 사람 등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는 일에 독특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귀신들린 사람들을 정상으로 돌아오게 했고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인류 역사상 예수님 같은 분은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말하고, 삶으로 그 말을 증거한 사람은 결코 없습니다. 47-48절 말씀을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이 대답하되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이가 있느냐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하속들을 보낸 사람들이 얼마나 당황하고 있는지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잡으러 갔다가 도리어 예수에게 빠진 게 아니냐? 그렇다면 당국자나 바리새인 중에 예수를 믿는 자가 있는 게 아니냐?”는 뜻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난 사람을 보게 되면 뭔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항상 눈이 촉촉하게 젖어 있고 가슴이 뛰고 있으며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어딘가 가려고 합니다. 예수를 만난 사람은 항상 옷 입고 있으며 부르면 즉시 달려갑니다.

그런 분들은 인생이 바뀌고 삶의 목적이 바뀌었습니다. 세상에서 유명해지고 돈을 많이 벌어 안락하게 살려고 수없이 노력하다가,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나 갑자기 변한 것입니다. 죄 문제로 고민하며 자신을 학대하던 사람이 자유롭게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항상 불안하고 긴장하던 사람이 어느 날 편안함을 누리고 있습니다.
갑자기 좋은 직장을 잡았거나 복권에 당첨된 것도 아닌데, 마냥 즐거워하는 이유는 그 사람이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항상 열등감에 사로잡혀 남과 비교하며 원망의 세월을 살았는데, 어느 날 그 사람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고 자신감이 흐릅니다.
지금 당장 죽어도 좋겠다는 풍족한 표정을 보입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세상에 주님과 같은 분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여러분의 주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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