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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태초부터 존재하신 분 (요 08:4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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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랑의 고백을 듣고 싶다거나 사랑하고 싶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현대인의 정신병은 사랑의 결핍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할 정도로 누군가에게 사랑 받지 못하고, 인정 받지 못해서 생긴 병입니다. 우리는 자주 사랑한다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아무 조건 없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주고받으면서도, 죽을 때까지 그 사랑이 변치 않을 거라고 고백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거짓말이라도 그런 고백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외로운 존재인 것입니다. 죽을 때가지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다면, 사랑을 고백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큰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는 이웃 사랑을 차치하고라도, 우선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실에 대해 변명하곤 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사랑하는 것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자신을 미워하고 있으며 법과 도덕적 기준으로 닦달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시간 40일
예수님께서 부활한 후에 40일 동안 제자들과 동행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시간적으로 매우 중요한 때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전에 시간의 제약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신 이후로 인간적 개념의 시간 제한을 받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때와 공간을 초원한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에서나 누릴 수 있는 시간 개념으로 40일 동안 특별히 자신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육체를 가졌지만,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후에 부활의 몸을 가졌습니다. 우리가 육신의 몸을 벗고 이 세상을 떠날 때 만날 수 있는 시차 초월의 경험을, 예수님께서 이미 2천년 전에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나누셨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신앙 생활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나와도 육신의 시간밖에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하늘의 시간과 땅의 시간을 접목시킨 부활의 시간을 보여줍니다.

평강과 비전을 주심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하신 일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십자가 사건을 통해 절망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19).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평안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가장 먼저 하신 일은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두려움을 없애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가난, 질병, 실패 등이 아니라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두려움입니다. 인간의 미래를 포기해 버리게 만드는 것이 공포심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사실을 아시고 40일 동안 제자들의 두려움을 제거해 주셨습니다.
둘째로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인생의 목적과 희망을 주셨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슬픈 것은 삶의 목적을 상실해 버리는 일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흔히 ‘방황’이라고 말합니다. 인생을 방황하는 사람들은 방향 감각을 상실한 채 어디로 가야 할지 모릅니다. 인생에 대해 허무함만 가득 느낍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40일 인생의 목적과 희망을 주시는 일을 지속하셨습니다. 특히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한 것으로 인해 상당한 죄책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사람을 힘들게 하고 괴롭히는 것이 죄책감입니다. 사람이 죄책감을 가지게 되면,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혼자 괴로워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죄의식을 씻겨주셨습니다. 베드로로 하여금 세 번이나 예수님을 인정케 함으로써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40일 동안 두려워하고 있던 제자들에게 평강과 위로를 주시고 치유와 회복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인생에 희망, 비전, 사명, 능력을 부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라는 주제는 예수님 당시는 물론이고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눈앞에 예수님을 두고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게 된다는 것은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이성, 경험, 지식 등으로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다”, “나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다”라는 말씀은 얼른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 그 말씀이 귀에 들어오면서 이해가 되기 시작합니다. 본문 말씀에서,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해 예수님을 공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48절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몰아붙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상대방을 멸시하고 조롱할 때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말씀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고 감정에 다라 맹목적으로 믿는다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조롱하기 위해 쓰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종교를 이용해 많은 사람들을 따라다니게 한다고 보고 있었습니다. 또 그들은 예수님이 사람들을 미혹해 이단으로 몰고 간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귀신에 들렸다는 말까지 서슴지 않고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마음으로 먹는 것
49절과 50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는 귀신 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어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 나는 내 영광을 구치 아니하나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

예수님이 하나님께 경배하고 찬양하는 것을 유대인들은 귀신 들린 것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귀신 들린 것이 아님을 두 가지 이유를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하나는 ‘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하나는 ‘내가 스스로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해 설명하십니다. 51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에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구절이 자주 나옵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진리를 강조할 때 사용됩니다. 51절 말씀의 원문을 보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는 말이 먼저 나옵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 말씀을 먹으면 어떤 사람이든지 영원히 산다고 말씀하십니다. 진리는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먹고 몸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갈등이 생기는 것은 작은 머리로 이해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이해하시는 것입니다. 유한한 인간의 이성이나 경험으로 무한하고 영원하신 창조주를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머리와 이성으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그분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이 없습니다. 지구의 자전하는 소리가 귀에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지구가 돌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보이는 것만 진리가 아닙니다. 세상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많습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넓은 것이 세상입니다. 내가 만지고 느낄 수 있는 것은 손바닥뿐입니다. 만지지 못하고 느낄 수 있는 세계는 무궁무진합니다. 자연 세계보다 더 넓은 것이 영적 세계입니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육의 존재입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인간 육체의 한정된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 말씀에서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자라고 합니다.

이성을 넘어선 믿음을 가져야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지 ‘하나님이 어떻게 생겼다’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 말씀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을 기록한 것으로, 인간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말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는 존재이지 창조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스스로를 창조주처럼 여깁니다. 인간의 이성, 논리, 경험, 사상 등으로 하나님이 잡히지 않는다고 그분의 존재를 거부합니다. 우리가 태양에 대해 전부 알지 못한다고 해서 태양을 거부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태양은 비추고 있었습니다.
인간이 세상에 나오기 전부터 하나님께서 먼저 계셨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가진 지식의 잣대로 모든 사물을 평가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인생이란 우리가 계산하고 평가한 대로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삶과 본질에 대한 해석들이 난무하고 있지만, 정답은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인간의 문제를 풀기 위해 철학을 만들었고 철학으로 풀리지 않자 종교를 만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 이해가 되지 않을 때 그냥 믿어야 합니다. 성경의 논리가 인간의 상식이나 이성보다 높은 수준입니다. 이성의 끝은 믿음입니다. 믿음은 이성보다 높은 단계입니다. 무조건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넘어선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분의 놀랍고 영광스러운 임재를 체험해야 합니다.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을 ‘영생’이라 합니다. 인간의 실존은 죽음에 있습니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 불안해하고 공포에 떱니다. 사람은 건강하든 병들었든, 성공했든 실패했든 누구라도 죽음이라는 실재를 맛보게 됩니다.

태초부터 계셨던 예수님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면 결코 이런 말씀을 하실 수가 없습니다. 이 말씀에 대해 유대인들은 나름대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52절 말씀을 보십시오.
“유대인들이 가로되 지금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들은 ‘죽음을 맛본다’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과 선지자들 그리고 조상들도 모두 죽었는데, 인간인 너의 말을 들으면 죽음을 맛보지 않는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반박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원리, 주장, 결론 등은 항상 똑같습니다. 54절부터 56절 말씀까지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것도 아니어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같이 거짓말쟁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54절에서 예수님께서 ‘내가 영광을 돌리는 것은 자신을 향한 게 아니라, 너희들이 하나님이라 부르는 그분에게다’, ‘나는 모르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확실히 아는 것만 말한다’, ‘너희가 말하는 조상 아브라함은 나를 보고 기뻐했다. 나는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던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57절 말씀에서 유대인들은 같은 질문을 반복합니다.
“유대인들이 가로되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이 말씀에서 우리는 유대인들의 질문을 통해 예수님께서 인간이시지만, 태초부터 존재하신 하나님이시라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58절과 59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저희가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예수님께서 ‘나는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있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문제에서 혼돈을 느낍니다.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귀신들렸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과연 예수는 누구인가? 왜 그는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일까?’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해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예수님은 태초부터 계셨던 분으로 하나님이십니다. 이 믿음을 가진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논리가 일사천리로 풀리게 됩니다.

축복의 말씀을 이해하려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논리로 불가능한 부활이지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 태초부터 계셨던 영원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믿고 고백할 때 가능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이 사실이 되고,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내쫓으려 했고 죽이려 했습니다. 2천년이 지난 현재에도 그런 상황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고난의 시대에 처해 있다고 말하지만 당시 로마의 압제 하에서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 큰 혼란에 있었던 환경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다른 것이 없습니다. 칼과 창으로 전쟁하느냐, 미사일로 전쟁하느냐의 차이일 뿐입니다. 인간의 죄, 본질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도 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태초부터 계신 분이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그분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에 관한 모든 축복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말씀 앞에서 눈물을 흘리게 된다면 구원의 축복이 임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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