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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 목자 (요 1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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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생명 흘러넘치는 삶 살아야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0장을 통해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두 가지 리더십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는 선한 목자의 리더십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자신을 가리켜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목자라는 말을 현대적인 의미로 표현하면 ‘리더’라는 뜻입니다. 좋은 리더십은 한 사회, 국가, 민족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리더십을 선한 목자로 표현하셨습니다.
또 다른 하나의 리더십은 선한 목자와 반대되는 삯군 목자입니다. 삯군 목자는 가짜 목자입니다. 그는 위기가 닥치고 이리 떼가 몰려오면 양들을 버리고 도망갑니다. 양들을 이용해 오직 자신의 이익만 챙기고 약탈을 일삼습니다. 그러나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까지도 희생합니다.
성경에서 목자와 양의 관계를 말할 때, 양을 짐승으로 보지 않고 ‘딸’로 보고 있습니다. 목자가 양을 사랑하는 마음은 아버지가 ‘딸’을 사랑하는 마음과 같은 것입니다. 리더십의 열쇠는 ‘사랑’인 것입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의 수가 많고 적음을 생각지 않습니다. 그는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해 아흔 아홉 마리 양을 우리에 남겨두고 위험을 무릅쓰고 나섭니다. 그것은 경제적으로 수지가 맞지 않는 일입니다. 논리적으로도 해석이 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경제나 논리가 아닙니다. 목자는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해 밤길도 마다하지 않고 나섭니다. 목자는 잃어버린 양을 찾을 때까지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았을 때, 목자는 크게 기뻐하고 기뻐합니다. 이런 리더를 가리켜 선한 목자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선한 목자의 세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선한 목자는 양을 우리 가운데로 안전하게 인도합니다. 둘째, 선한 목자는 양들을 푸른 초장과 잔잔한 시냇가로 인도해 풍성한 꼴을 먹입니다. 셋째,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어떤 위기나 위험도 친히 감당하고 자신의 목숨을 아낌없이 버립니다.
우리는 지난 주에 선한 목자의 첫 번째 특성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선한 목자는 우리의 문으로 들어와 양들을 잘 인도해 냅니다. 반면, 삯군 목자는 우리의 담을 넘거나 부수고 들어옵니다. 왜 담을 넘거나 문을 부수고 들어올까요? 그것은 양을 돌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양들의 털이나 고기를 이용하려고 노략질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미 우리는 ‘진정한 목자는 양의 이름을 기억하고 부르며 안전하게 인도해 내고, 또한 양들도 목자의 음성을 알아 듣고 따른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내가 양의 문이라”
선한 목자의 두 번째 특징은 양들을 푸른 초장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해 풍성히 꼴을 먹이는 것입니다. 7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7절에서 예수님께서 약간 변한 어조로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양 우리의 문으로 들어가는 목자라고 소개하십니다. 그러나 7절에서 예수님께서 ‘내가 양의 우리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뿐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진리 자체라고 말씀하십니다.
양에 대해 관심이 많은 어느 한 여행자가 양치는 목장을 찾아갔습니다. 그는 안내자의 도움을 받아 함께 목자를 만났습니다. 여러 질문들이 오가는 가운데 목자는 양치는 방법, 양의 우리에 대해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곳의 우리는 사면이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양들을 인도하는 길이 나 있었는데, 여행자가 보기에 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목자에게 우리의 문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목자는 양들을 인도하고 난 다음, 자신이 그 길 위에 눕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목자는 ‘내가 바로 문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양이 우리 밖으로 나가려면 목자를 밟고 지나가야 하고, 이리 떼가 공격해 오더라도 목자를 넘어야 하기 때문에 길에 누워서 밤을 지낸다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목자의 설명을 통해 양의 문이 어떤 것인지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양을 문으로 인도하는 자이지만, 내가 양의 문이다. 나를 통과하지 않는 자는 모두 이리 떼요, 도적 떼다. 양의 문을 부수고 들어오거나 담을 넘어 들어오는 것은 양을 도적질하기 위해서다. 나를 통하지 않고 우리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8절 말씀을 보십시오.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도적은 주로 야밤을 이용해 아무도 몰래 가만히 들어옵니다. 도적이 들어오는 목적은 도적질하기 위함입니다. 9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세상에서 종교나 철학 그리고 사상 등이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 같지만, 실은 인간의 영혼을 도적질해 가고 있습니다. 인간을 파멸시키고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어 버리는 철학, 사상도 더러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잘못된 철학, 사상을 마치 아편처럼 좋아하고 추종하고 있습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께서 ‘내가 길 중에 하나다’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내가 유일한 길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진리 중에 하나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영원하신 진리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생명 중에 하나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영원하신 생명입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신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을 통해 자신에 대해서 확실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라, 소금이라,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 목마른 자들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생수라, 포도나무라 등 여러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표현들을 즐겨 쓰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사도행전 4장 12절 말씀을 처음에는 부담스럽게 느끼다가 나중에는 그 말씀을 외우게 되고 ‘아멘’이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시기 위해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오직 한 사람, 그 이름 예수 그리스도뿐이며 그분을 통하는 길이 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혹자는 불교나 유교도 좋고 착하게만 살면 되지, 꼭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 배타적이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태양이 두 개일 수 없습니다.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도, 조국도 하나뿐입니다. 가장 소중한 것은 하나이고, 구원도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십니다.

생명을 풍성히 얻게 하심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10절 말씀입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이 말씀은 요한복음의 핵심이며, 기독교 신앙의 본체라 할 수 있습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죽이고 파멸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양으로 더불어 생명을 얻게 하고 그 생명을 풍성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요, 기독교의 목적입니다. 구원의 목적은 생명을 얻고 그 생명을 더욱 풍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도적이나 사탄은 세 가지 이유로 우리에게 접근합니다. 첫째는 나의 영혼을 도적질하기 위해서 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영혼을 도적질하려 합니다. 행복, 성공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유혹해 이단에 빠지게 하거나 잘못된 이데올로기에 착념케 합니다. 우리가 그릇된 가치관을 갖게해서 우리의 영혼을 도적질 해가는 것입니다. 결국은 우리의 모든 것이 파멸되고 육체, 영혼, 인생이 망가져 스스로 삶을 포기할 수밖에 없게 만듭니다. 죽이고 파멸시키는 실체가 바로 도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죽음을 통해 수많은 영혼들에게 생명을 주시고 거듭나게 하십니다. 이것이 십자가요, 부활이요, 구원입니다. 구원의 핵심은 생명에 있습니다. 행복의 핵심도 생명에 있습니다. 돈, 건강, 인기, 성공을 소유해야 행복한 것이 아니라 생명을 소유해야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생명입니다. 생명을 주신 하나님, 생명의 원천이신 예수 그리스도, 생명의 전달자이신 성령님입니다.

10절 말씀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한마디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이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에게 있고, 그 생명이 풍성하게 흘러 넘쳐야 합니다.
생명이 풍성한 삶이란 단순히 오래 사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슬픔, 고통, 질병이 없는 삶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인생은 슬픔, 고통, 질병 등이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겐 세상이 알지 못하는 비밀한 생명의 삶이 있는 것입니다. 풍성한 삶이란 것은 아름답고 의미가 깊으며 기적 같은 삶만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풍성하다’는 말의 영어 어원을 조사해 보면, ‘파도를 일으키다’는 뜻입니다. 바닷가에는 끊임없이 파도가 밀려왔다가 사라지곤 합니다. 파도는 변함 없이 하루종일 출렁입니다. 즉, 풍성함이란 끊임없이 출렁이는 파도와 같이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영원히 계속되는 것입니다.
‘풍성하다’의 헬라어 어원을 조사해 보면, ‘초과분’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시고 남은 것을 열두 광주리에 거둬들였습니다. 그 열두 광주리는 초과분에 해당합니다. 이미 5천명을 배불리 먹이고도 초과분이 있을 때 풍성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풍성한 삶이란 부족함이 없고 초과분이 있으며 100% 이상 만족하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구원 받고 천국으로 가는 은혜를 받았는데, 생명을 초과분으로 주셨습니다. 달리 말하면, ‘초과분이 파도처럼 계속 친다’가 됩니다. 내가 가진 것은 족한데 12광주리의 초과분이 파도처럼 계속 생긴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교회 성도님들, 풍성한 삶을 사시길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풍성한 삶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았을 뿐 아니라, 우리의 삶에 매일 초과분의 은혜가 넘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생명을 주겠고 그 생명이 풍성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풍성함이 계속되는 삶이란
시편 23편에 초과분이 파도처럼 넘치는 삶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23편 말씀을 다섯 가지로 분석해 보면 풍성한 삶의 모든 정의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부족함이 없는 삶입니다. 1절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성도님들의 삶이 모자라지 않고 차고 넘치는, 초과분이 파도처럼 항상 넘치게 되길 축원합니다.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는 삶이 돼야 합니다. 돈, 건강, 성공이 있어서 좋은 것이 아니라 여호와가 나의 목자가 되시니 부족함이 없어서 좋은 것입니다. 양들은 모든 위험이 지나가고 안정감을 느낄 때 비로소 눕습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는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위험을 제거해 주시고 편히 쉬게 하십니다.

둘째는 인도 받는 삶입니다. 3절 말씀에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풍성한 삶이란 주님의 길로 인도 받는 것이요, 꼴만 풍성히 먹는 게 아니라 물도 마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풍성한 삶을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셋째는 위기 탈출의 삶입니다. 4절에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풍성한 삶이란 인생의 위기를 만나도 주님께서 능히 구해 주시고 놀랍도록 삶을 변화시켜 주심을 믿는 것입니다.

넷째는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는 삶입니다. 5절에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소풍가서 보물찾기할 때 한 번도 보물을 찾아보지 못해 비참해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풍성한 삶이란 상 받는 것입니다. 위로와 상금으로 잔이 넘치는 것입니다.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우며 축복 받는 것이 풍성한 삶입니다.

다섯째는 하나님의 집에 영원히 거하는 삶입니다. 6절에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우리는 시편 23편 말씀을 통해 풍성한 삶의 다섯 가지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부족함이 없는 삶, 인도 받는 삶, 위기 탈출의 삶,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는 삶, 하나님의 집에 영원히 거하는 삶 등입니다. 이 모든 삶들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풍성한 삶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내가 세상에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나는 그것을 위해 십자가를 졌고, 약속대로 부활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교회 성도님들, 오늘부터 풍성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주님 안에서 풍성한 삶이 성도님들의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떤 위기, 절망, 고통, 가난이 찾아와도 두려워하지 않고 찬송과 기쁨, 희망이 흘러 넘쳐 날마다 영원히 사는 축복이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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