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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를 돌로 치려는 사람들 (요 10: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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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진리를 동의하고 환영하지 않습니다. 진리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오직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존재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진실을 말씀하시고 진리를 전파하셨을 때 유대인들은 매우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선 19절에서 21절까지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인하여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저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혹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

진리를 거부하는 이유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보고 귀신 들렸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말이 통하지 않거나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가리켜 흔히 귀신 들려 미쳤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귀신 들려서 이상한 말하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한 편의 사람들은 ‘귀신 들린 사람이 어찌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겠느냐’고 주장해 그들은 서로 반목하고 갈등하며 논쟁을 시작했습니다. 24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가로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 하니.”

지난 2천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문제로 갈등해 왔습니다. ‘과연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인가 아니면 단순히 한 인간인가?’ ‘예수는 정말 인류의 메시아인가 아니면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난 한 청년에 불과한가?’ 유대인들은 이런 식으로 논쟁을 일삼으며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기를 거부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믿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는 이유를 예수님께서 두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불신앙
첫째, 불신앙 때문입니다. 25절 말씀 앞부분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예수님께서 누누이 말씀하시고 가르치는 것을 사람들은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믿지 않는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아예 처음부터 믿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유가 있어서도, 증거가 있어서도 아닙니다. 그냥 믿기 싫고 받아들이기 싫은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우리는 불신앙이라 합니다.
본인이 믿기를 거부한다면 옆에서 누군가 아무리 말해 주고 보여 줘도 믿지 않습니다. 기적을 일으켜 증거해도 믿으려는 마음이 없으면 믿지 않게 됩니다. 이는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 찬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내면에 거부하려는 속성과 비판하려는 태도가 항상 잠재해 있어서 삶을 어둡고 불행하게 만들고 맙니다. 마침내 모든 사태를 파멸로 끌고 가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태생적으로 매사에 부정적입니다. 다른 사람의 나쁜 점만 보게 되는 사실을 지성으로 착각합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부정적인 성격으로 굳어지는 것입니다.

1965년 제가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을 때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분이 있습니다. 당시 그 분은 치대생이었습니다. 집회에서 4-5일 동안 함께 지냈는데 그 분은 죽어도 예수님을 믿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분이 눈물로 호소해도 믿지 않았습니다. 아니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 날 집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성령님의 역사로 넘어지고 깨어지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숲 속에서 고함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놀라 뛰어나가 보니 그 분이 돌멩이로 자신의 오른손을 찍었던 것입니다. 응급 처치를 마치고 난 후에 왜 그랬느냐고 물으니 자신의 오른손이 교만해서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오른손을 찍어버리고 그 날로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집회에서 돌아온 후 일주일만에 그 분은 다시 예수님을 믿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유를 물으니 집회 당시 본인은 최면 상태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주위 분위기 때문에 예수를 믿었지 진짜로 믿은 것 같지는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제가 깨달은 것은 말하고 보여주며 증거를 대도 믿지 않을 사람은 절대로 믿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보니 그 분은 장로님이 되어 있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믿지 않으려는 불신앙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정된 사고의 틀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틀을 바꾸지 않는다면, 미래에 희망을 가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무조건 믿지 않으려는 고정된 틀을 바꿔야 합니다. 이 틀을 깨지 않거나 사고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새로운 세계, 즉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25절 뒷부분과 2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 하는도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많은 기적으로 보여주셨지만 사람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믿지 않는 게 아니라 아예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마음 속에 있는 불신앙으로 인해 거부하는 것이었습니다. 변하지 않으려는 생각들이 모든 것을 막아버린 것입니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둘째, 소속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 하는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갑니다. 그러나 자기 목자가 아니면 따라가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그 음성을 듣고 따라 가는 목자와 양의 관계입니다. 2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목자는 양들의 이름까지 기억해 부르고,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따라갑니다. 한편으로 ‘나의 양이 아니기 때문에 나를 따라 오지 않는 것’은 매우 중요한 영적 속성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가 목자와 양의 관계라면 말 그대로 축복입니다. 28절 말씀에 그 축복이 기록돼 있습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축복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축복 받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성공하고 행복하며 자녀들이 건강하기를 바랍니다. 물론 그런 것들이 축복이 아니라는 뜻은 아니지만, 다만 일시적일 뿐입니다. 진정한 축복이란 영원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은 ‘영생’입니다. 구원받는다는 것은 영생을 얻는 것을 의미합니다. 땅에서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죽은 후에도 영원까지 구원받는 축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영생보다 더 큰 축복은 없고, 더 큰 가치는 없습니다. 지상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영생입니다. 곧 땅에서부터 영원까지 가는 축복된 생명인 것입니다.

영생-진정한 축복
인간은 죽으면 끝이 나고 모든 것은 썩어 없어지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영혼이 없는 동물은 죽으면 끝입니다. 동물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존재는 오직 인간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격체이며 영생의 축복이 주어져 있습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영생이란 무엇인가요?
하나, 영원히 멸망하지 않는 생명입니다. 모든 것에는 끝이 있지만, 영생에는 끝이 없습니다. 모든 것에는 부족함이 있지만, 영생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죽음을 맞이하지만, 영생은 죽음이 없습니다. 삼라만상 중에 죽음이 없는 존재는 인간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영생의 축복을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둘, 절대 빼앗기지 않는 것입니다. 영생이 우리 손에 있다면 죽음 앞에서 빼앗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생은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누구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받은 영생을 빼앗기는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영생은 아주 귀한 축복입니다.
언젠가 우리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이 세상을 떠나야 합니다. 그러나 영생은 절대 빼앗기는 법이 없으니 안심해도 됩니다. 우리는 죽어도 다시 살아납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을 여는 문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실패나 죽음이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29, 30절 말씀입니다.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성경대로 믿어야
이 말씀을 듣고 유대인들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예수님을 미워하고 증오하기 시작했습니다. 31, 32절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께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을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하느냐.”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귀신 들려 미쳤다고 하고, 돌을 들어 쳐죽이려 하는 이유는 그들의 마음 속에 있는 미움, 분노, 불신앙, 고집, 불합리, 억지 등 때문입니다. 이것은 2천년 전 유대인들의 모습일 뿐 아니라, 아직도 예수님을 믿지 않고 거부하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요즘 교회 밖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믿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아예 그들은 믿지 않으려는 불신앙, 고집, 분노, 상처, 미움 등으로 하나님을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3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주님에 대한 편견 때문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유대인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편견으로 가득 차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나름의 방식대로 믿으면서 자신들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모두 틀린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방식대로 하나님을 믿으면 안 됩니다. 반드시 성경 말씀대로 믿어야 합니다. 나의 취향, 방법, 습관대로 만든 하나님은 가짜입니다. 진짜 하나님은 성경 말씀 속에 있습니다.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하나님은 모두 가짜입니다. 자신들의 구미에 맞춰 놓고 하나님으로 믿지 않으면 모두 틀린 것으로 여기는 것이 바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기독교의 핵심 진리
결국 논쟁의 쟁점은 예수님의 신성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인간이냐 아니면 하나님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이라고 주장한 사실에 분노했습니다. 인간인 예수가 스스로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은 신성 모독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구원의 열쇠입니다. 기독교의 핵심 진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이냐 아니면 인간이냐 하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인간이라면 ‘인간은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는 문제에 부딪히게 됩니다. 인간의 진정한 구원자는 하나님이십니다. 많은 종교 창시자들은 인간이기 때문에 구원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존재는 인간 이상이어야 합니다. 인간은 신이 될 수 없습니다. 만약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다면, 아마 그분은 하나님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능히 인간이 될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가능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될 수 있지만, 인간은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결론으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존재는 하나님으로서 인간이 되신 분인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문제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선인으로 믿는 게 아니라,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아들로 믿어야 영생의 축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생은 영원 불멸한 것이며, 하나님의 손에 있는 영생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이런 논쟁에 예수님께서 34절부터 39절까지 말씀으로 대답해 주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율법에 기록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신대 저희가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

여기서 예수님께서 시편을 인용하셔서 말씀하십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를 ‘신’이라 하지 않았느냐. 하나님의 말씀만 받아도 신이 되는데,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을 왜 믿지 못하느냐. 내 말을 못 믿겠거든 내가 행한 일을 믿어라. 그것은 확실하지 않느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사람들은 더욱 화를 냈습니다.

성품이 변하는 특별한 축복
분노, 불신앙, 미움 등을 억제한다고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잠시 수면 밑으로 가라앉은 상태에 불과합니다. 그런 것들은 뿌리째 뽑아야 합니다. 그냥 두게 되면 언젠가 다시 살아납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분노, 불신앙, 미움 등을 뿌리째 뽑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변화한다는 것은 자신의 옛사람을 뿌리째 뽑아버리는 일입니다. 우리는 뿌리를 뽑지 않고 줄기만 끊으면서 변화를 원하고 있습니다. 줄기는 계속 자라 평생 동안 자신을 괴롭힐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많은 부분에서 진정한 변화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신앙 생활을 보면 개인의 성격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잘 믿으면 성격마저 변하게 됩니다. 긍정적인 사고와 남을 축복하는 마음 그리고 이웃을 격려하는 성품으로 변하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받는 특별한 축복입니다. 과거가 미래를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겐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축복의 미래가 있습니다. 미래로 가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미래는 미지의 세계입니다. 스스로 자신의 미래를 막지 마십시오. 미래는 무한히 열려 있는 축복의 세계이고 그곳엔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미래를 바라보십시오.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시고 항상 희망을 갖고 바라보십시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놀랍고도 아름다운 축복을 내리실 것입니다.
39절 말씀에 사람들은 다시 예수님을 잡아서 감옥에 넣으려고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을 믿는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미래의 희망적인 사고, 믿음, 세계관 등을 가져야 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 교회, 사회, 민족이 변화될 수 있습니다. 나라가 어렵더라도 민족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십시오. 역사, 가정, 일 등에 대해 발전적인 생각을 가지십시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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