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사랑하시는자가 병들었나이다 (요 11:1-4)

첨부 1



인간이라면 누구나 절대 양보할 수 없고 포기할 수 없는 사람을 갖고 있습니다.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부모에게 자식이 그런 대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이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당사자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더 괴로워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차라리 자신이 대신 병들어 죽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렇듯 뜨거운 눈시울을 보이시고 우리를 대신해 죽고 싶어 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얼마나 인간을 사랑하시는지 대신해 죽고 싶어 하시며 붉은 눈시울로 인간을 바라보십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 말씀에서 이와 비슷한 장면을 발견하게 됩니다.

대신 죽을 수 있는 사랑
병이 들어 죽게 된 오라비 나사로를 뜨거운 눈시울로 바라보면서 가슴 아파하는 누이동생들이 있습니다. 바로 마리아와 마르다 입니다. 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병들어 죽게 된 사람은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입니다. 그는 1절 말씀을 기준으로 해서 3일 후에 정말로 죽게 됩니다. 누이동생들이 사랑하는 오라비가 병들어 죽게 된 것을 바라본다는 것은 얼마나 가슴 아프고 황당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병든 나사로와 예수님 사이에는 대화가 없고, 누이동생 마리아와 마르다가 예수님과 대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이 중보 기도입니다. 중보 기도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시는 기도를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중보기도 덕분에 살고 있습니다. 진정한 중보 기도는 생명을 내어놓고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대신해 제가 감옥으로 가겠습니다’, ‘그 사람을 대신해 제가 죽겠습니다’라는 마음으로 간구하는 것이 중보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을 위해 그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누군가를 위해 대신 죽어 주고 싶었던 적이 있습니까? 사랑이란 감정이 아니라, 대신해 죽을 수 있는 용기입니다. 부부 사이에 위기가 찾아오는 것은 남편이 아내를 위해 대신 죽어 줄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내도 남편을 위해 대신 죽을 줄 마음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결혼 생활은 유리알처럼 쉽게 깨어지는 것입니다.

영적인 사랑을 드린 마리아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을 위해 서로 대신 죽어 줄 수 있는 용기를 말합니다. 만약 자식이 몹시 아파 고통스러워한다면, 부모는 차라리 자신이 대신해 아팠으면 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여기에 오라비 나사로를 위해 대신 죽을 수 있는 마음을 가진 누이동생 마리아와 마르다라는 자매가 있습니다. 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러라.”

두 자매는 베다니 마을에서 유명한 사람이었고, 개인적으로 예수님과 친했습니다. 5절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볼 때, 예수님과 이 가족은 이미 친분을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2절 말씀에는 자매 중에서 마리아 이야기만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마리아와 마르다는 모두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물질적인 것으로 사랑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께서 집에 오시면 음식 준비하기에 바빴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가장 아끼는 것으로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옥합을 깨뜨려서 귀한 향유를 예수님께 붓고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겼습니다.
어떻게 보면, 사랑은 거룩한 낭비입니다. 흔히 사랑한다는 것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꽃을 사서 선물하듯, 마리아는 옥합을 깨뜨려 귀중한 향유를 예수님께 부었습니다. 그리고 여자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마리아의 모습을 보고 비난했습니다. 특히 가롯 유다가 화를 냈습니다. 그렇게 돈이 많다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줄 것이지 왜 낭비하느냐고 비난했습니다. 이것은 이데올로기에 익숙한 사람들의 사고방식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를 비난하지 말라. 나의 장례식을 준비하고 있다’고 하시며, 그 여자의 믿음은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의 기억에 오래 남는 사랑은 물질적이 아닌, 정신적이고 영적인 사랑, 희생, 순종 등입니다. 마르다는 물질적인 사랑을 표현했지만 마리아는 영적으로 사랑, 희생, 순종을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성숙한 기도란
3절 말씀에서 두 여인은 오라비가 죽게 된 사실에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담아 사람을 통해 예수님께 보냅니다. 예수님께서 오라비를 살릴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3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3절 말씀은 짧은 구절이지만, 매우 강렬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왜 누이동생들은 직접 가지 않고 사람을 대신 보냈을까’하는 것입니다. 마리아와 마르다가 예수님께 사람을 보낸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가는 것이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서,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라서 대신 사람을 보낸 것은 아닙니다.
백부장은 부하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직접 예수님께 찾아가 부하의 병을 고쳐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면서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친히 가실 필요 없습니다. 말씀만 하시면 부하의 병이 낫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고백을 듣고 굉장한 충격을 받으셨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직접 가셔서 기도하고 안수해야 안심합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예수님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백부장과 같은 믿음이 마리아와 마르다에게도 있었습니다.

믿음이란 지극히 내면적인 것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찾아와 주시지 않아도 믿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손끝에 만져지지 않아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대가를 바라서가 아니라, 사랑하고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감동을 주고 기적을 만듭니다.
두 번째 메시지는 누이동생들이 예수님께 보낸 쪽지 내용에 있습니다. 그녀들은 예수님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라고 아주 간단하게 썼습니다. 저는 이 메시지에서 여인들의 내면에 간직하고 있는 엄청난 믿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인들은 그냥 쪽지를 쓴 게 아니라 눈물을 흘리면서 썼을 것입니다. 본인들이 직접 예수님께 찾아가 면전에서 말하는 것보다 더욱 진지하고 간절한 심정으로 표현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짧은 쪽지 내용에서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 섭섭함이나 원망 등이 담겨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오라비가 죽게 된 상황에서 뭘 하시느라 여기에 오시지도 않느냐며 원망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기도에는 아무리 힘들어도 섭섭함이나 원망이 없습니다.가정에서 남편이 힘들게 해도 섭섭함이나 원망 등이 없기를 축원합니다. 아내가 당신을 섭섭하게 해도 원망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섭섭해 하고 원망도 합니다. 때로 우리는 기도 속에 하나님께 대한 섭섭함이나 원망을 자주 담고 있습니다.

둘, 협박과 공갈이 없습니다. 우리는 생활 중에 협박성 발언을 자주 합니다. 상대에게 부담감을 주려는 것입니다. 때로 사랑은 협박일 수도 있습니다.

셋, 병든 오빠를 고쳐달라는 말이 없습니다. 강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랑의 이름으로 상대방의 자존심을 긁고 협박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받아내려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사랑에는 감동이 없습니다. 그러나 쪽지에는 일방적으로 예수님께 오라비의 병을 낫게 해 달라는 협박성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성숙한 기도는 사실을 그대로 주님께 내놓는 것입니다.

넷, 예수님께 속히 찾아와 달라는 부탁도 없습니다. 즉 예수님의 조건과 능력에 월권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언제 어떻게 응답해 달라고 시간과 방법을 명령하기까지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 능력, 사랑 등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분은 나에게 잘 해 주실 것이다,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나의 생각 이상으로 은혜를 베풀어주실 거라는 믿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에 간섭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와 마르다의 쪽지에는 그런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에 희망이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라는 말은 어떤 것에 대한 요구가 아니라 호소입니다. 오라비를 살리고 싶은 간절한 마음뿐입니다. 그것은 결국 죽은 나사로를 살리게 됩니다. 이것이 능력입니다. 하나님께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는 것이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권위와 능력을 신뢰하고 맡기는 것이 능력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기도답게 하는 것은 주님의 능력이 보이지 않아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주님의 주권, 선택, 지혜에 월권하지 않고 사실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며, 자신의 간절한 소망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성숙되고 깊은 기도입니다.
이런 기도에는 ‘주님’을 부르며 시작합니다. 요즘 저는 ‘주님’이라는 말이 참으로 좋습니다. 우리가 ‘주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그것은 신앙 고백이요, 신성의 고백입니다. 우리의 입에서 ‘주님’이라고 항상 부르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은 ‘보십시오’라고 합니다. 이 말은 간절한 희망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민족에 대한 간절한 열망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우리는 나라를 생각하면 눈시울이 뜨거워져야 합니다. 가정, 교회, 나라를 바로 세우려는 열망이 있어야 하고 뜨거운 눈물로 글을 쓰고 말을 해야 합니다.
그 다음은 ‘사랑하시는 자’라고 합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예수님께 ‘사랑하는 자’라고 표현하지 않고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내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데…’, ‘내가 교회를 얼마나 열심히 다니는데…’라고 말합니다. 그 말의 주체는 자신입니다. 즉 하나님께 섭섭함이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쪽지에는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주실 만큼 인간을 사랑하십니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희망이 있습니다. 인간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데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 사랑은 변덕이 많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주님을 사랑하다가 가끔 실수도 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사랑은 완전하지 못하고 가짜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는 것이 진짜입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오라비 나사로’라는 말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인척 관계를 드러냅니다. 그리고 인간관계를 엮어서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인들은 그런 말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단 한마디,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희망이 있습니다. 희망은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는 데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무엇을 해 드렸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것이 중요합니다. 거기에 구원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병들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병’이란 말에 ‘죽게 될 정도의 쇠약함’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희망을 건다는 뜻입니다. 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고난은 축복
이쯤에서 우리는 태어나면서 소경된 자의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그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본인의 죄나 부모의 죄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하는 것도 우리의 죄나 조상의 죄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덜리기 위한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질병에는 죽을병이 있고, 살 병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을병에 걸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실제로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그리고 3일 후에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걱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죽어도 다시 살아납니다. 사람은 죽음으로 모든 것을 끝내지만, 하나님은 절대 끝내지 않습니다. 죽음은 인간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그는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말씀하시며 그냥 두셨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우리 중에 병을 끼고 살아야 하는 분들이 있다면 그냥 사시길 바랍니다. 절대로 죽지 않고 괜찮습니다. 그것이 오히려 축복이 될 수도 있습니다.
칼빈은 걸어 다니는 병동이라는 별명을 얻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평생 동안 각종 질병을 달고 살았습니다. 그는 죽기 전까지 기독교 강해를 썼는데, 온몸이 아파 글을 쓸 수 없는 상황에서도 계속 집필했습니다. 그래서 위대한 작품이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망했다면 그것은 저주가 아닙니다. 우리는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위대한 사람들이 교도소에 갇혀 쓴 글들이 세계적인 작품이 된 경우가 많습니다. 고난은 비극이 아니라, 축복입니다. 그래서 순교가 아름다운 것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겪었던 병치레도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제가 죽을병에 걸린 게 아니라,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한 축복이었습니다. 제로 하여금 비전을 갖게 하시고 하늘을 바라보도록 하시며, 인간적인 안락과 평안을 위해 살지 못하도록 이끄신 하나님의 도구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고난을 축복의 도구로 삼으십시오. 외부에서 밀려드는 핍박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우리를 더욱 겸손하고 진실하며 의롭게 만드는 도구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병을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하는 고난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성도님들에게 이런 고난의 축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을 것을 아셨다면, 한번쯤 찾아가셔서 살려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람을 통해 전갈을 받으시고 3일이 지나도록 가시지 않았습니다. 나사로가 죽을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믿음이란 죽어도 다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끝냈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끝내셔야 모든 게 끝이 납니다. 성도님들의 고난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 가지로 좋지 않을 때, ‘할렐루야, 아멘’이라고 외쳐 보십시오. 분명히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고난으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