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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시간표 (요 1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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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에 공식이 있고, 자연에 법칙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원리를 다 알 수 없지만, 어떤 것이든 공식대로 하면 해결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학 공식과 자연 법칙을 암기해 그대로 적용해 문제를 풀면 정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공식에 맞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실제 맞지 않는 것이 아니고, 맞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시험에 들기도 하고 어쩔 줄 몰라 하며 절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예레미야 33장 3절에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금식하며 부르짖었지만 응답은 없고 상황만 더욱 나빠질 때 혼돈을 느낍니다.
마태복음 7장 7절에서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구하고 찾고 두드려도 문은 열리지 않고 오해만 쌓이며 일은 꼬이고 상황은 나빠지기만 합니다. ‘그 말씀은 정말 맞는 것일까, 하나님은 정말 살아 계시는가,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가’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믿음의 사람에게 찾아오는 시험
이런 것들로 심각하게 고민했던 사람이 바로 구약의 요셉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항상 최선을 다했고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최선은 언제나 최악의 결론을 만들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를 사랑하고 형들을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말에 순종해 형들을 위해 도시락을 싸들고 찾아갔다가 형들의 미움을 받아서 깊은 구덩이에 던져지고 애굽이라는 이방 나라로 팔려갑니다.
요셉은 절망하지 않았고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들어가 가정 총무로 최선을 다해 일했습니다. 그러나 여주인이 젊은 요셉을 유혹하는 바람에 그를 어려움에 빠뜨렸습니다. 요셉은 정직했기 때문에 유혹을 물리쳤지만,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게 됩니다. 기약도 없이 오랫동안 고통과 억울함을 당했던 요셉은 ‘왜 내가 이곳에 들어왔나’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가 이런 생각을 한 번쯤 했을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고 정직과 진실이 통함을 믿었을 것입니다.
요셉과 같은 사람이 더 있다면 아마 다니엘일 것입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왕 시대에 권력의 핵심에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로 모든 특권과 왕의 신뢰를 잃어버린 채 사자굴 속에 던져지고 화형불에 던져집니다. 불기운이 얼마나 거셌던지 다니엘을 던져 넣으려던 사람들이 모두 불에 타 죽었습니다.

이렇듯 믿음의 공식이 상식적으로 맞지 않을 때, 하나님은 보이지 않게 되고 믿음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게 됩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열심히 기도하는데, 왜 모든 일이 공식처럼 일어나지 않는가?’라는 비아냥거림 속에 고독과 외로움마저 엄습해 옵니다. 요셉은 하나님을 볼 수 없었지만 원망하지 않고 끝까지 신뢰했습니다. 다니엘은 죽음 앞에서도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더라도 여호와를 믿겠다고 고백했습니다. 그 결과, 요셉은 30세에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어 나라를 치리하였고, 다니엘은 바벨론 왕국에서 외국인으로서 서열 3위까지 오르는 복을 받았습니다.
결국 믿음의 공식은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다만 무너지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십니다.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끝까지 신뢰할 수 있는 믿음이라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간 vs 인간의 시간
오늘 본문 말씀에서 그런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여동생 마리아와 그들의 오라비 나사로를 개인적으로 굉장히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5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가정과 친근한 관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가정들을 사랑하시지만, 나사로의 가정과 개인적으로 친분 관계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사랑하셨다면,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가셔서 고쳐줬어야 했을까요?
마리아와 마르다는 나사로가 죽을 지경에 이르자, 예수님께 전갈을 보냈습니다. ‘주님, 보십시오. 당신이 사랑하시는 나사로가 지금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라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 전갈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이 6절 말씀에 있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소식을 들으시고 베다니로 가시지 않고 이틀 동안 계시던 곳에서 더 머무셨습니다. 과연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이며 우리를 돌보시는 방법일까요?
5절과 6절 말씀 사이의 갈등은 세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 번째는 시간표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생각하시는 시간과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나사로가 생각하는 시간은 달랐습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이 시간에 주님께서 오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기도도 응답 받았으면 합니다. 그것은 ‘나의 시간’에 의하기 때문입니다.
시간에는 하나님의 것과 인간의 것 두 종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항상 ‘나의 시간’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생각합니다. 나의 시간에 맞춰 하나님께서 기도 응답하시길 주문합니다. 내가 지금 급하니까 하나님께서 지금 오셔서 이런 방법으로 응답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다행히 나의 시간과 하나님의 시간이 일치하면 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간과 방법은 우리의 것과 다르고 차이가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혼돈에 빠집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여,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직 나의 때가 이르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인간의 때와 하나님의 때는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때에 움직이십니다. 그분은 늦게 오시는 법도 없고, 일찍 오시는 법도 없이 언제나 정확합니다.
지금 기도 응답이 이뤄지지 않는 이유는 아직도 하나님과 해결해야 할 문제가 남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 문제를 덮어두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시진 않으십니다. 그것은 축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때’를 기억해야 합니다. 신앙의 공식이 맞지 않을 때, 하나님의 시간과 나의 시간이 다르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다림의 비밀
왜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때에 오시지 않는가?’라는 질문에 중요한 영적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기다림’이라는 비밀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이유입니다. ‘기다림’을 다른 말로 하면 ‘인내’입니다. 믿음은 곧 ‘기다림’입니다. 기다릴 줄 모르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과 그 말씀을 믿는다면 현재 외양간에 소도 없고 포도나무에 열매도 없으며 밭에 소출이 없다 할지라도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림을 통과하지 않는 믿음은 가짜입니다.
믿음도 사랑도 기다림입니다. 정말 사랑한다면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가장 위대한 멘토는 기다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제자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기다리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기다려 줍니다. ‘희망’이란 궁극적으로 아직 오지 않은 것을 말합니다. 곧 앞으로 곧 올 것을 말합니다. 올 것을 믿고 기다리는 것이 희망입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 성취와 응답만큼 중요한 축복은 기다림의 축복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응답이 없기 때문에 조급하게 믿음을 버리고 사랑을 깨며 희망의 문을 닫아 버립니다. 기다림을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1장 2-4절에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에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시련과 고통이란 곧 기다림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몇 천 년 동안 인간을 기다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만나시려고 2천년을 기다리셨습니다. 기다림은 믿음의 클라이맥스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얼마나 고독하고 외로웠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시켜서 한 일인데, 해가 빛을 잃고 지진이 일어나며 창에 허리를 상해 죽게 되었을 때 얼마나 마음이 흔들렸겠습니까?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이사야서 30장 18절에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는 자에게는 복이 있습니다. 진정한 믿음과 사랑은 기다릴 줄 아는 것이고, 희망은 기다림의 기술입니다.


잠든 인간을 깨우시는 하나님
세 번째는 참된 사랑과 구원과 기쁨을 주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기쁨은 피상적이고 순간적인 것이 아니라 완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구원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입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기까지 기다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병든 나사로를 살리려고 하시는 게 아니라, 죽은 나사로를 부활시키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구원, 사랑, 기쁨 등을 경험시키려고 나사로가 죽기까지 기다리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7절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이런 여유를 가지십니다.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제자들은 예수님의 뜻을 잘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8절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질문에 다음과 같은 영적 교훈을 주십니다. 9절과 10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낮과 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지난번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은 낮이니 일 할 때다. 밤이 오면 일을 못한다. 인생에서 일할 날이 그리 많지 않다. 곧 당신도 늙어 죽게 된다. 그때는 일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 지금 일하라. 낮이고 해가 있으니 일할 때다. 고민하고 방황할 시간이 없다’. 지금은 고민할 때가 아니라 일 할 때입니다. 이 말씀 후에 예수님께서 기가 막힌 말씀을 하십니다. 1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예수님께서 결코 나사로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틀 동안 더 유하시고 유대로 가셨으니 나사로를 포기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여기서 하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잊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버리시지 않습니다. 단지 응답의 시간이 우리와 맞지 않을 뿐입니다. 인간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독, 눈물, 고통 안에서 더욱 괴로워하십니다.
둘, 우리는 예수님의 친구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가리켜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귀하게 생각하시고 높이 생각하시는지 모릅니다.
셋, 예수님은 죽음을 잠자는 것으로 해석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겐 죽음이 없습니다. 죽음은 잠시 잠자는 것입니다. 잠이 들었다는 것은 다시 깨어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죽음은 끝을 의미합니다. 죽음에는 희망과 미래가 없고, 생명과 부활도 없습니다. 곧 죽음은 심판입니다. 그러나 똑같이 눈을 감았어도 잠자는 것과 죽음은 아주 다릅니다.
인간이 잠잔다는 것은 휴식을 취하는 일입니다. 낮에 일한 후 밤에 잠을 자면 긴장을 풀 수 있습니다. 잠은 우리의 친구입니다. 또 잠은 회복입니다. 잠을 잘 자고 나면 아픈 것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잠에는 깨어남이 있습니다. 잠을 충분히 자고 나면 기분이 상쾌해지고 정신이 맑습니다. 잠을 잘 잔 사람은 일하고 싶은 의욕으로 넘쳐납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병들어 죽은 것을 잠에 비유하셨습니다.

한치의 오차도 없는 은혜
12절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가로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는 것 같지만, 전혀 딴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못 알아들은 것입니다. 13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저희는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죽음을 잠자는 것으로 바꿔 주셨습니다. 14절 말씀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동안 예수님께서 병든 사람들을 고쳐 주셨지만 나사로의 경우는 죽음에서 살려주셨습니다. 복의 깊이가 다릅니다. 1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신대.”

이 말씀은 ‘왜 내가 거기에 가지 않은지, 왜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즉각 응답하시지 않은지 알겠느냐?’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시간을 계산하시고 하나님의 축복은 이등품이 아니라, 특상품이라는 것입니다. 15절의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께서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나사로에게 갈 시간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몸은 죽은 나사로를 향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쯤에서 정리해야 하는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시간을 세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멈춘 게 아니라, 계속 흐르며 계산되고 있습니다. 둘째, 사람이 끝냈다고 하나님께서도 끝내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죽었다고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면 오판입니다. 그때부터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셋째, 하나님은 반드시 생명과 부활로 다시 오십니다. 마지막으로 16절 말씀입니다.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잠꼬대 같은 소리입니다. 언뜻 들어 보면 굉장히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열정은 믿음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해야 할 말은 ‘우리도 주님과 함께 나사로가 부활하는 현장을 목격하러 가자’입니다. 지금 주님께서 역사하시는 현장을 보러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전, 수원, 부천의 우리 교회입니다. 작은 교회이지만 그곳에서 부활의 현장을 목격해야 합니다. 세계 각처로 아웃리치를 떠나야 합니다. 그곳에 부활의 현장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더 넓은 곳으로 나가 목격해야 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죽으러 가자며 뚱딴지같은 소리를 합니다. 우리는 참된 믿음의 소리를 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나사로는 일어날 것이고 곧이어 기적이 발생할 것입니다. 성도의 생애에도 기적은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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