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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리아의 영적 통찰력 (요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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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말씀에 나오는 사건은 예수님에게 일어났던 많은 사건들 중에서 가장 기억할 만한 감동적인 일입니다. 마태복음 26장과 마가복음 19장에도 동일한 사건이 기록돼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마 26:13, 막 14:9)고 말씀하십니다.

죽음을 예비한 여인
예수님께서 특별히 말씀하실 만큼 이 사건은 의미 있고 감동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험난한 인생을 살면서 감동을 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또 감동적인 사건을 경험하는 것도 큰 축복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건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여자가 옥합을 깨뜨려 지극히 비싼 향유를 쏟아 부은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여자가 영적 통찰력을 발휘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이 사건의 감동이 있습니다. 1절 말씀입니다.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사건이 일어난 시각은 유월절이 있기 6일 전입니다. 앞서 11장 57절 말씀을 보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공연하게 예수님을 체포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특히 유월절을 맞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실 것을 미리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유월절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하십니다. 그런 후에 겟세마네 동산으로 기도하러 가십니다. 그때 가룟 유다와 로마 군인들이 따라와 예수님을 체포합니다. 그리고 다음날 야간을 이용해 예수님을 심문합니다.
당시 로마법에는 일몰 후에 심문하지 못하게 돼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법으로 심문한 것입니다. 그 다음날에 예수님에게 십자가 형을 선언합니다. 그래서 유월절 6일 전이라는 말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향유를 부음으로써 십자가의 죽음을 예비했습니다. 이것이 사건의 가장 큰 의미입니다.
1절 말씀에 예수님께서 ‘베다니’라는 곳으로 오셨습니다.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는 구절을 보면 ‘베다니’를 나사로의 집이라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머무신 곳은 나사로의 집의 아닙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따르면, 문둥병에 걸려 고침을 받았던 시몬의 집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의 집으로 가셨고, 그곳으로 나사로와 마르다 그리고 마리아가 찾아온 것입니다. 그들이 시몬의 집에 모인 이유가 2절 말씀에 있습니다.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오신 것을 환영하는 잔치가 시몬의 집에서 열렸습니다. 거기에 모인 사람들의 목적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시몬은 문둥병을 고침 받은 감동이 있고, 나사로는 죽었다가 살아나 더 깊은 감동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을 심방하시고, 그들은 예수님을 환영한 것입니다.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선 마리아
여기서 신중하게 고려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시몬의 집에서 잔치가 있기 전에 이미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체포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는 사실입니다. 체포 명령과 잔치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베다니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을 체포하라는 명령이 내려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2절 말씀에서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각 사람들의 위치입니다. 마르다는 잔치를 위해 일을 보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3절 말씀을 봅니다.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향유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마리아는 예수님 발 앞에 있었습니다. 마르다와 나사로 그리고 마리아는 모두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각자의 위치는 다릅니다. 마르다는 일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나사로는 예수님과 함께 앉은 사람들 중에 있었으며,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앞에 밀착해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굉장히 중요한 영적 교훈과 마리아의 영적 통찰력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선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 있을 만큼 영적 통찰력이 뛰어났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과 사이에 거리를 두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아마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거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주님과 거리를 둔 채 왔다 갔다 하지 말고 주님과 밀착해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 마리아에 대한 기록이 많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0장을 보면, 나사로의 부활 사건이 있기 전에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집을 방문하셨습니다. 그때도 마르다는 예수님을 맞이하느라 분주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 앞에 앉아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마르다는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주님,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않으세요? 마리아에게 저를 도우라고 말씀하세요.’ 마르다는 약간 신경질적으로 반응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지만 한 가지 일만 해도 족하다. 마리아는 좋은 일을 택했으니까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나사로가 죽은 후에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보고 달려갔습니다. ‘주여, 조금만 일찍 오셨더라면 나의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네 동생 마리아는 어디에 있느냐’라고 하셨습니다. 마르다가 마리아에게 얘기해 마리아가 급히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앞서 11장 32절 말씀에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울었습니다. 그리고 마르다와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마르다와 마리아는 서로 다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보자마자 이야기했고, 마리아는 무릎을 꿇고 이야기했습니다. 세 가지 사건에서 마리아는 모두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린 상태로 주님과 거리를 두지 않고 밀착해 있었습니다. 여기에 영적 승리의 비결이 있습니다.

향유를 아낌없이 발에 붓다
우리가 능력있고 승리하는 신앙 생활을 하려면 예수님과 거리를 두지 말고 밀착해 있어야 합니다. 후방에서 어슬렁거리지 말고 예배, 찬송, 기도할 때 주님께 밀착해야 합니다. 철야, 새벽 기도하며 아웃리치도 떠나야 합니다. 이런 것들을 하면, 일단 그 시간만큼은 주님과 밀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을 생각하도록 자신의 삶을 주님께 밀착시켜야 합니다. 이것이 영적 통찰력입니다.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는 방법이 있습니다. 자신을 성경 말씀과 기도 그리고 찬양에 밀착시키면 됩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예수님과 거리를 두지 않는 것이 시험에 빠지지 않는 비결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 발 앞에 밀착해 있었습니다. 그녀는 지극히 비싼 나드 향유 한 근을 준비해 뒀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씻겼습니다. 마리아의 행동은 모든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이것을 행하는 동안 마리아는 말이 없이 그냥 눈물만 흘리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는 깊은 의미의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 마리아가 값비싼 나드 향유 한 근을 갑자기 예수님의 발에 부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드 향유는 미리 준비해 두지 않으면 가져올 수 없는 것입니다. 아마 오래 전부터 마리아는 향유를 준비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마리아의 행동을 보고 가룟 유다가 “저 향유는 삼백 데나리온에 해당하는데, 이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줬으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말했습니다. 마태복음 20장 2절에서 노동자들에게 하루 임금으로 한 데나리온을 주겠다고 약속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시에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삼백 데나리온은 한 사람의 연봉에 해당합니다. 그만한 가치가 있는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다는 것은 갑작스레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우리가 일년 연봉에 해당하는 금액을 한꺼번에 헌금하려면 오래 전부터 많은 계획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 이를 마리아는 오래 전부터 ‘주님을 위해 써야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준비한 것입니다. 이런 준비가 있었기에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마리아는 나드 향유를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부을 수 있었습니다.

둘째, 마리아는 아낌없이 향유를 부었습니다. 우리는 살기 힘들다며 적당히 드려도 된다고 생각할 때가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우리와 달랐습니다. 그녀는 전량을 아낌없이 주님께 드린 것입니다.

셋째, 마리아는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나드 향유는 머리에 붓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수건이 아니라, 여자에게 가장 중요한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씻겼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헌신’이라고 합니다.
마리아가 얼마 동안 삼백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돈을 모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극히 비싼 향유를 미리 준비해 두었다가, 예수님의 발에 전량 쏟아 붓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씻겼습니다. 이것이 바로 헌신이고 예배이며 마리아의 영적 통찰력입니다.

머리카락까지 드리는 사랑
그러나 사람들은 그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제자들도,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전혀 몰랐습니다. 예수님만 마리아의 영적 통찰력을 아셨습니다.
군대에서 만났던 한 하사관이 생각납니다. 저는 군대에서 폐결핵이 악화돼 마산에 있는 결핵 요양원으로 후송돼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때 하사관 한 분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 분이었습니다. 우리는 텐트 교회에서 신앙 생활했는데, 철야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그 하사관은 토요일이 되면 걸레를 들고 한 시간 내지 두 시간 정도 무릎을 꿇고 강대상, 의자, 마루 등을 닦았습니다. 제가 전역하는 날까지 그 일을 한번도 거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물어 보았습니다. “왜 그렇게 열심히 하십니까?” 그 분은 수줍어하면서 “제가 좋아서 그냥 닦는 거예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먼지 하나 없도록 열심히 닦는 그 모습에 감동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집을 깨끗이 청소합니다. 그곳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누가 시키지 않아도 열심히 닦습니다. 저는 교회에서 누군가가 잘 보이지 않는 구석구석을 열심히 닦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에는 주일마다 1만 5천 명 이상이 왕래합니다. 많은 먼지가 발생하지만,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마리아가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기듯이, 누가 교회의 한 구석이라도 닦았으면 합니다. 다른 사람을 의식하거나 누가 시켜서 아니라, 마치 그 하사관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저녁에 강대상을 닦듯이 교회의 구석구석을 닦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언제 봐도 깨끗하고 잘 정돈 된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크리스천 두 사람이 여행을 떠났습니다. 한 사람은 신문을 들고 있었고, 한 사람은 성경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기차를 타고 한참동안 달렸습니다. 자리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던 사람은 옆에서 성경을 읽고 있는 사람을 보고 마음속으로 ‘다음부터 나도 성경을 읽어야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우선 신문을 읽거나 텔레비전을 보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묵상하고 그분의 발 앞에 엎드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말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생활에서 마리아가 예수님 앞에 밀착해 말씀을 듣는 것과 같은 모습은 찾기 힘듭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일은 잘 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일은 잘 하지 않습니다. 마리아가 향유를 붓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긴 것처럼 교회의 더러운 곳, 보이지 않는 곳, 냄새나는 곳에 자신의 향유를 붓고 머리카락으로 씻는 사람이 많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찾는 사람
마리아가 부은 나드 향유로 집 안에 향이 가득했습니다. 사람들은 나드 향기가 어디서 나는 줄 몰랐습니다. 두리번거리다가 한 여자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씻기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기막힌 영적 통찰력의 사건을 보고 모든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칭찬하진 않습니다. 이 사건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 남자는 정의감과 도덕성이 있으며 휴머니즘이 가득했습니다.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그는 적어도 말로는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정의감에 불타고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4-6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당시 가룟 유다에 대한 6절 말씀의 후반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가룟 유다에 대해 아는 것은 그의 박애주의, 정의감, 휴머니즘이 넘치는 모습뿐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의 말에 속아 넘어 갔습니다. 우리는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을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가룟 유다의 말이 매우 매력적으로 들리고 굉장히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 뒤의 해설에 가룟 유다의 다른 얼굴이 있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을 했지만, 실제 다른 속셈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정치적 목적과 이해 관계였습니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자신의 말처럼 스스로를 멋진 사람이라고 착각한다는 사실입니다.
가룟 유다의 선동적인 발언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7, 8절 말씀을 읽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영적 통찰력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영적 상태를 꿰뚫어 보십니다. 우리의 헌금하는 모습, 봉사하는 모습, 교회 오는 모습 등이 예수님의 눈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아셨지만, 가룟 유다를 강하게 몰아붙이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가만 둬라. 여자는 나의 장례식을 준비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라는 말씀이 추가돼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잘 믿고, 잘 섬기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때때로 마르다나 가룟 유다와 같은 방법으로 예수님을 믿고 섬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와 같은 방법으로 예수님을 믿고 섬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초점은 항상 마리아에게 맞춰져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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