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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서로 발을 씻기라 (요 13: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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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시기 전에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한 다락방에 모여 최후의 만찬을 하십니다. 이것은 어떤 만찬보다 뜻 깊고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식사를 마치신 후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서 기도하시고 체포되어서 곧 십자가를 지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만찬이 마지막 식사입니다.
내일 죽을 것을 아는 사람은 오늘 말하는 것도, 사람을 만나는 것도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실 때 언제나 진실했고 순수했으며 따뜻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뜻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죽으실 것이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의 의문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식사를 마치시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중에 특별한 두 가지 일을 행하셨습니다.
첫째가 성만찬입니다. 예수님께서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것은 나의 살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잔에 포도주를 주시며 “이것은 나의 피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항상 이것들을 먹고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라”며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무슨 의미인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둘째가 식사 중에 일어나셔서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것입니다. 물론 도중에 베드로는 약간 반항했지만,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발까지 씻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벗어 두었던 겉옷을 입으시고 다시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12절 말씀이 그 내용입니다.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예수님의 질문은 왜 스스로 이런 행동을 했겠느냐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너무 황당했습니다. 과연 제자들의 생각은 어떠했을까요? 우리는 두 가지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 제자들이 무척 당황했을 것입니다. 만약 자신보다 윗사람이 무릎 꿇고 빌면 당사자는 많이 당황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무릎을 꿇으면 아들은 무척 당황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로 충격을 받고 매우 당황했을 것입니다.
또 하나는 죄책감과 죄송함이 들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제자들이 관심을 보인 것은 ‘누가 더 높으냐’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도토리 키 재기’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누가 예수님께 인정을 받고 그분의 오른팔이 되느냐는 문제로 자기들끼리 소리 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좋은 뜻이나 동기로 일을 하고 있어도 그 내면에서는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며 경쟁하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일하는 방법은 모두 이런 식입니다. 가정이나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개인적인 욕심들로 가득합니다. ‘너를 짓밟고 이겨야 내가 진급을 하지, 여기서 절대 밀릴 수는 없어’. 그래서 우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포장되고 과장된 언행으로 일관합니다.
교활한 사람은 상대방의 이기심, 질투심, 명예심을 이용해 일을 부립니다. 겉으로 보면 상대방을 위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이용하는 셈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사랑, 섬김, 동역, 비전을 갖고 진실하게 일하는 사람을 만나기란 쉽지 않습니다. 사심 없이 서로 섬기고 높이며 격려하는 동역자를 발견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겸손한 메시아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 다시 자리에 앉으시고 왜 너희들의 발을 씻겼겠느냐고 물으십니다. 발을 씻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을 씻는 일입니다. 허리를 굽히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자존심을 꺾는 일입니다. 13, 14절 말씀을 봅니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이유는 항상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을 섬기라는 뜻으로 친히 모범을 보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내면에 경쟁심을 갖지 말고 자존심을 내세우지 말며, 이런 것들로 인해 자신이 지배당하지 않게 하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주님이셨고 스승이셨습니다. 생각해 보면, 예수님 같은 주님과 스승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인류 역사상 예수님 같은 분은 결단코 없습니다. 그분은 온 인류의 메시아이시고 구원자이시며, 하나님의 독생자이시고 지고지순한 인간이셨습니다. 그런 위대하신 분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서 너희들의 발을 씻겨주었다. 그러니 너희들도 서로 발을 씻겨주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인간을 짐승, 벌레, 티끌, 먼지, 쓰레기와 같은 존재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 낮고 천한 인간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섬겨주셨는데, 동급의 인간들끼리 서로 섬기고 발을 씻어주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여기서 몇 가지 중요한 영적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높은 자일수록 더욱 낮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겸손이란 힘이 있는 자가 그 힘을 사용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겸손은 단순히 낮아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가진 자가 포기하는 것, 능력 있는 자가 져주는 것이 겸손입니다. 이길 수 있지만 져주고, 갈 수 있지만 가지 않고, 갈 수 없지만 가는 것이 겸손입니다.
오만은 힘 있는 자가 그 힘을 사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가진 자가 더 가지려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만큼 가졌으면 충분할 텐데 더 많이 가지려고 빼앗고 훔치는 것입니다. 능력 있고 권력 있는 자가 횡포를 부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만한 자들을 가끔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눈빛부터 다르고 말투마저 다릅니다. 남을 무시하고 지배하려 들며 일방적으로 명령하고 미안해하는 구석이 전혀 없습니다. 오만한 자는 목소리나 걷는 것에도 티가 납니다. 우리는 오만한 사람들을 보면 토하고 싶어집니다.
예수님의 리더십과 영적 권위는 겸손함에서 오는 것입니다. 낮아질 대로 낮아져 진정 겸손한 사람을 보면 감동이 옵니다. 그런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마구간으로 오셨고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피하고 싫어하는 세리와 창녀들을 만나주셨습니다. 그분은 여우도 머리 둘 곳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수건을 두르신 하나님
둘째 영적 교훈은 솔선수범입니다. 구약 성경에 아브라함과 롯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들은 삼촌과 조카 관계이지만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생깁니다. 그것은 땅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이 양떼를 치면서 서로 싸우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런 성격의 싸움은 어느 누구도 말리지 못합니다. 이해가 얽힌 당사자들끼리 아무리 회합을 해도 해결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두머리끼리 만나 합의해야 문제 해결이 가능한 것입니다.
당시에 아브라함은 롯을 찾아가 서로 다투지 말자고 제안합니다. 그리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고,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겠다’며 선택권을 양보한 후 각자 갈 길을 정하고 서로 헤어집니다.
분쟁이 있을 때 먼저 화해를 청하는 자가 ‘형님’이 됩니다. 나이가 많거나 학식이 높아야 형님이 되는 게 아닙니다. 먼저 문제 해결을 위해 순리로 일을 풀어나가는 자가 형님이요, 애국자입니다. 모두 죄인들인데 누가 더 잘나고 더 못난 것은 없습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어렵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나라의 정치, 경제, 교육 분야를 올바로 세울 수 있을까요?
해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답을 몰라서 지금까지 마냥 지내온 것이 아닙니다. 모두 답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알면서도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겁이 나서 못하고 이해관계가 맞물려서 못합니다. 그래서 자꾸 화려한 말로 때웁니다.

예수님께서 식사 중에 말없이 일어나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물을 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감동을 주는 일입니다. 남이 하니까 나도 하고 남이 말하니까 나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진정한 감동이 솔선수범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예수님에게서 배울 수 있습니다.
모든 문제들을 갑작스레 한꺼번에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배우고 알며 느끼는 대로 조금씩 바꿔나갈 때 감동이 있게 됩니다.
우리 교회 성도는 가정에서 감동의 도가니에 빠져들기를 바랍니다. 직장에서 기쁨과 감사의 도가니에 빠져들기를 바랍니다. 진정한 영적 권위와 리더십은 모든 일에 솔선수범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영적 교훈은 예수님께서 내리신 결론적인 대안입니다. 즉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입니다. 누가 먼저 발을 씻고 씻겨주느냐는 문제가 아닙니다. 진정한 대안은 서로 발을 씻어주는 데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어떤 배고픈 사람들에게 푸짐하게 음식을 차려 한 상 주었습니다. 그리고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긴 숟가락을 주었습니다. 그들이 지옥에 가봤더니 긴 숟가락으로 서로 먼저 먹으려고 아우성이었습니다. 긴 숟가락으로 음식을 집어 입으로 가져가면 흘리고 또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화가 나서 비난하고 비판하며 큰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번에 그들이 천국에 가봤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긴 숟가락으로 서로에게 음식을 먹여주고 있었습니다. 아주 평온한 가운데 행복한 분위기였습니다.
서로 발을 씻어준다는 것은 여러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진정한 승리를 말합니다. 진정한 승리란 ‘윈-윈 게임(win-win game)’을 가리킵니다. 한 사람이라도 죽거나 다친다면 그것은 진정한 승리가 아닙니다. 동시에 모두 승리해야 합니다.
부부 사이도 윈-윈 게임입니다. 내가 행복해야 행복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해야 내가 행복한 것입니다. 아내가 행복할 때 남편도 행복합니다. 아이들이 행복할 때 부모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나의 동역자가 행복해야 나도 행복한 것입니다.

서로 발을 씻기라
서로 발을 씻어주라는 말씀은 그런 의미입니다. 누가 누구에게 일방적으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 교황청에서 신도들의 발을 씻어주는 것은 종교적인 의식에 불과합니다. ‘서로 발을 씻어주라’는 것은 서로 물고, 뜯고, 치고받는 험악한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이끄는 예수님의 대안입니다.
남북 관계도 윈윈 게임이어야 합니다. 남한이 살기 위해 북한을 죽여서는 안 됩니다. 북한이 살기 위해 남한을 죽여서도 안 됩니다. 남북한이 동시에 잘 살아야 행복한 것입니다.
국내 정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불법 대선 자금으로 정국이 어수선합니다. 각 당은 서로 자기 당은 아무 상관이 없다고 발뺌하다가 속속들이 덜미를 잡히고 있습니다. 그러다간 모두 죽게 됩니다.

‘서로 발을 씻어주라’는 간단한 말씀 안에 예수님께서 주신 복과 승리의 비결이 있습니다. 남을 살리면서 내가 살아야 합니다. 남을 망하게 하고 사지로 몰아가면서 내가 잘될 것을 바라면 안 됩니다. 남의 회사를 죽이면서 내 회사가 성공할 것을 바라면 안 됩니다. 다른 회사가 살아야 내 회사도 살고 동시에 두 회사가 함께 발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범입니다. 서로 발을 씻겨주면 피차 상처를 치유할 수 있습니다. 상대를 죽이고 나만 살아난다면 양자 간에 소리 없는 전쟁은 영원히 계속될 것입니다.
서로 발을 씻어준다는 의미의 다른 하나는 서로 필요를 채워 주는 것을 말합니다. 너는 너, 나는 나의 필요만 채우는 게 아니라 피차 서로 필요한 부분을 채워주는 것입니다. 이번에 우리 교회 대학부 250명이 청담교회에 가는 것이 서로 발을 씻겨주는 모델이 될 수 있습니다.
서로 발을 씻어주라는 마지막 의미는 서로 신뢰를 쌓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문제는 서로 믿지 못하는 데서 발생합니다. 그 사람의 말과 행동과 인격을 믿을 때 축복된 사회를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주신 방법입니다. 아내는 남편의 발을, 남편은 아내의 발을 씻어주고 사장은 부하의 발을, 부하는 사장의 발을 씻겨주며 서로 존경하고 신뢰하며 필요를 채워주는 관계여야 합니다. 이는 단순히 성경의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삶의 현장에 이 말씀을 그대로 적용한다면,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 기적들이 우리의 가정, 직장, 사회에서 풍성하게 이뤄지기를 축원합니다.

너희도 이와 같이 행하라
15절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드디어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친히 본을 보이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범을 보인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모델이 있을 때 그대로 복사하면 수많은 복제품을 양산할 수 있는 이점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나름대로 새로운 무엇을 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그대로 닮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본, 모양, 모델대로 따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새로운 뭔가를 하려면 어려움이 따르지만, 본을 보고 그대로 따라하면 쉽기만 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처럼 쉬운 것이 없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보이신 모범대로 따라하면 됩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막을 지을 것을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그에 관해 모든 사랑을 자세히 일러주십니다. 치수는 물론이고 디자인까지 지시하십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일러주신 그대로 일을 수행합니다. 자신의 취향, 생각, 의지대로 하지 않습니다. 다자인도 멋대로 바꾸지 않습니다.
건축 설계사가 설계를 했는데 시공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임의로 바꿔버리면 안 됩니다. 설계도면 그대로 시공해야 합니다. 철근이나 시멘트의 양을 조금이라도 빼면 안 됩니다.

본을 보고 따라가는 것을 가리켜 순종이라고 합니다. 순종이라는 것은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에 본을 보이신 예수님께서 사신 대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항상 따라 한다는 것은 재미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기가 막히는 것은 그대로 따라 했더니 죽은 자가 살아나고 삼십, 육십, 일백 배의 열매가 맺히는 기적이 일어나더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아름다움이 있는 것입니다. 16, 17절 말씀을 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인생에서 복은 돈, 성공, 건강, 명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17절 말씀과 같은 것이 진정한 복입니다. 우리가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민족을 구원하는 대안입니다. 그럴 때 남북한이 통일되고 사회와 가정이 회복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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