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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 계명을 주노라 (요 13:3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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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자그마한 장소에 모여 최후의 만찬을 가지셨습니다. 주님께서 저녁 식사를 하시던 도중에 두 가지 위대한 일을 하셨는데, 하나는 우리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입니다.
또 하나는 예수님께서 떡을 떼시고 포도주를 주셔서 나의 살이고 피라며 성만찬을 하시고 영원히 기념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긴 것은 성만찬과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우리가 자신을 스스로 겸손하게 낮추고 누군가를 위해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예수님께서 자신의 살을 주시고 피를 주신 십자가의 사건과 같은 의미라는 뜻입니다.

새 계명,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성만찬을 나누신 후, 지금까지 하신 모든 말씀을 종합하고 아름다운 감동을 주는 기가 막힌 새 계명을 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들 중에서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34절 말씀에 있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제자들에게 발을 씻겨주시고 살과 피를 나눠주신 예수님께서 이제 새로운 계명을 주십니다. 이 새 계명은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들을 요약한 핵심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들의 정점엔 항상 사랑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사랑으로 통하고 사랑을 위해 존재하며 사랑을 목표로 합니다.
마태복음 22장 35에서 40절까지 말씀에서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율법사란 율법을 전문적으로 공부해 율법에 대한 어떤 토론이나 논쟁에도 자신이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어떤 계명이 가장 크냐고 질문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즉시 대답을 주시면서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어떤 교리나 율법보다 크고 어떤 사상이나 철학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우선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것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구약에서 인용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신명기 6장 5절에서 인용하셨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하나님을 사랑할 때 우리의 몸과 마음의 모든 것을 다하는 것이 구약의 정신입니다.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레위기 19장 18절에서 인용하셨습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이웃 사랑하기를 자신의 몸을 사랑하는 것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사상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고 예수님이며 기독교인 것입니다. 우리가 기독교와 교회라는 이름으로 많은 일을 행하고 있는데, 이를 농축해 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것은 스스로 만족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성경 공부하는 것도 스스로 성장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배하고 성경 공부하며 기도하는 모든 것들은 오로지 두 가지에 집중돼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사랑보다 더 높은 사상이 없고 사랑보다 더 큰 철학이 없으며 사랑보다 더 높은 가치가 없음을 성경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본성이고, 죄는 인간의 본성입니다. 요한일서 4장 7-8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빼놓고 사랑을 말할 수 없고 사랑을 빼놓고 하나님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양과 기도에도 사랑으로 점철돼 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자신을 돌아볼 때 가장 결핍돼 있는 것이 사랑이라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많은 일들을 하고 있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사랑의 그림자마저 찾기 힘들 정도로 마음은 각박해져 있습니다. 또 하나님을 믿는 것에서도 얼마나 이기적인지 모릅니다. 매우 본능적이고 육체적임을 스스로 자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신명기와 레위기의 말씀을 보면, 구약의 본질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34절에서 예수님께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신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지금까지도 사랑에 관한 계명을 충분히 주셨는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새 계명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34절 말씀을 다시 읽어 봅시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구약의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인데,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대로 상상하고 좋아하며 느끼는 대로 사랑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랑에 대한 개념을 정의해 주신 대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특히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주신 계명은 새 계명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사랑하라’
우리의 취향대로 사랑하는 것은 새 계명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우리의 스타일대로, 생각대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것도 마음대로 입니다.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이 기준으로 작용합니다. 교회에 오고 싶으면 오고, 말고 싶으면 오지 않으면서도 교회에 다닌다고 말합니다. 헌금하고 싶으면 하고 싫으면 하지 않으면서,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고 행동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봉사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하나님께 봉사하는 것도 아닌 착각인 것입니다.
사랑의 기준은 우리가 불쌍히 여기고 우리의 도덕성과 윤리성을 만족시키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새 계명을 구약의 계명들과 비교해 보면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대상을 구분하지 않는 사랑
첫째는 사랑의 대상입니다. 구약에서 사랑의 대상은 이방인이 제외돼 있었습니다. 유대인들끼리 사랑한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 어떠한 지경에도 참을 수 있는 것은 가족이기 때문이지 남의 자식을 위해선 그렇게 하진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구약의 사랑은 하나님께 선택받은 동족끼리라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은 사랑의 대상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모든 민족과 열방을 포함해 유대인이나 이방인, 지혜자나 어리석은 자, 백인이나 흑인, 늙은이나 젊은이, 남종이나 여종, 성별이나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라고 모두 같은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는 사랑과 하나님께서 하시는 사랑은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우리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기준을 예수님께서 새 계명으로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새 계명입니다.

한계를 두지 않는 사랑
둘째는 사랑의 한계입니다. 구약의 사랑은 용서와 더불어 채찍과 징계라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은 한계가 없습니다. 원수까지 사랑하고 원수를 위해 목숨까지 버리는 사랑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죄에 대한 용서를 일곱 번까지 해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베드로의 용서는 일곱 번이 최대 용량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일곱 번씩 일흔 번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용서에 한계가 없다는 뜻입니다. 한국인의 정서는 삼 세 번입니다. 그 다음엔 흔히 ‘국물도 없다’고 표현합니다. 예수님의 개념과 많이 다른 것입니다.

본을 보이신 사랑의 방법
셋째는 사랑의 방법입니다. 구약에서 사랑의 방법은 율법과 명령입니다. 율법에 어긋나고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죄가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의무적이거나 율법적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방법은 먼저 본을 보이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바닥에 휴지가 떨어져 있을 때 주울 것을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솔선수범해 줍는 것이 예수님의 사랑의 방법입니다.
우리는 손가락 사랑을 많이 합니다. ‘이것 하라, 저것 하라’고 손가락으로 지시하는 사랑을 합니다. 그리고 입으로 사랑을 많이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기도에 자신이 속아 넘어가기도 합니다. 화려하게 기도한 후에 그게 자신인 양 착각합니다. 사랑은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방법은 구약의 율법적 사랑과 전혀 다른 것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이 주님의 사랑의 방법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조건 없이 희생하는 무한하고 영원한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해 본 적도, 가져본 적도 없는 사랑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 심장부는 그만 두더라도 그 사랑의 이름만 불러도, 겉모양만 만져도, 냄새만 맡아도 우리는 충격을 받습니다. 우리가 하는 사랑을 촛불에 비교한다면, 하나님께서 하신 사랑을 태양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태양과 같은 존재라고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김일성과 김정일이 민족의 태양이 될 수 있고, 운동선수나 이데올로기 등이 대중의 태양이 될 수 있나요? 그런 것은 하나님에게만 어울리는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이 독특한 것은 주님께서 친히 본을 보여주신 점과 사랑을 이성, 훈련, 노력, 의지 등으로 오지 않고 성령으로 부어주신다는 점입니다. 로마서 5장 5절에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으로 부어주시는 사랑
사랑은 성령으로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여름에 강한 소낙비가 내리 듯, 우리의 마음에 성령으로 사랑의 소낙비가 강하게 임하시길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우리의 사랑은 대상, 한계, 방법 등 모든 면에서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을 지키는 방법은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간절히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성령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사랑, 봉사, 헌금, 전도 등도 성령으로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고운 ‘기브 앤 테이크’(give and take)식입니다.
인간의 사랑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 사도 바울의 새롭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마지막 절에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후서에 보면 사랑은 모든 실수와 허물을 덮어주며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든 말을 잊어버려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오직 ‘서로 사랑하라’는 말을 절대로 잊어선 안 됩니다. 무슨 일이든지, 어디서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서로 사랑하라’는 말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35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여기서 그리스도인과 제자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란 제자 훈련을 받은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것같이 서로 사랑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일정한 단계를 거쳐야만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아웃리치를 가서 용서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봉사하면서 상처를 받았느니 말았느니 말들이 많고 불평하며 미움을 갖는다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주님의 제자들에게 핵심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예수님의 제자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행하는 자가 주님의 제자
우리가 예수님의 참된 제자라는 것을 확인하고 증명하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고 세례 받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며 하나가 되는 것에서 예수님의 제자임을 알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면서 서로 싸우고 분열하며 미워한다면 그리스도인이 될는지 몰라도 주님의 제자는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임을 자신 있게 밝히려면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며 하나가 되는 것뿐입니다. 35절 말씀을 다시 읽어 봅시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사랑하는 우리 교회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주셨던 메시지는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며 섬기고 격려하라는 것입니다. 제자 훈련이 없었다고 할지라도, 사랑과 용서와 봉사와 헌신과 섬김이 있으면 예수님의 제자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동차 후면에 물고기 스티커를 붙이고 다닙니다. 그러면서 운전 규칙을 어기고 과속하며 누가 끼어들기라도 한다면, 화를 내고 삿대질을 해대며 싸움을 벌이기도 합니다. 그럴 때 자동차 후면에서 물고기 스티커가 반짝 반짝 빛을 발합니다.
교회의 본질은 서로 사랑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을 기억하고 삶에서 그대로 적용할 때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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