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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라 (요 14: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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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요한복음 14-16장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산상 보훈을 배우고 있습니다. 특히 14장 말씀은 네 명의 제자들이 나서서 예수님께 질문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베드로가 나섭니다. 예수님께서 자꾸 떠나신다고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라고 재차 물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놀라운 영적 말씀을 주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시며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위해 처소를 예비하러 가심을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두 번째로 도마가 나섭니다. 그의 질문은 베드로의 질문을 조금 변형한 것이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어떻게 그 길을 따를 수 없느냐고 질문했지만, 도마는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느냐고 질문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빌립이 나섭니다. 그는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번째로 가룟 사람이 아닌 유다가 등장합니다. 22절 말씀입니다.
“가룟인 아닌 유다가 가로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유다는 예수님의 여러 대답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질문합니다. 앞서 세 제자들의 질문을 종합 정리해 본다면, 이래도 이해가 안 되고 저래도 확신이 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을 하는 모든 사람들의 고민이기도 합니다. 설교도 많이 듣고 기도도 많이 해서 모든 것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도무지 시원하게 뚫리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날은 성령 충만했다가 어떤 날은 마냥 곤두박질하고 어떤 날은 찬양하는 등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입니다. 위기나 시련이 닥쳐오면 금새 의심하고 부인하는 바람에 믿음에 굳게 서지 못합니다. 베드로나 도마나 빌립이나 가룟 사람이 아닌 유다나 할 것 없이 우리도 똑같은 현상을 보입니다. 그래서 자꾸 의심이 들면서 질문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지켜 하나님의 사랑을 입다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가 아닌 다른 유다는 예수님에게 왜 자신을 세상에 숨기시고 극소수의 제한된 사람들에게만 보여주시느냐고 묻습니다. 이것이 당시 제자들의 영적 상태입니다. 23절 말씀을 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진리는 보편성과 동시에 배타성을 갖고 있습니다. 특히 천국의 진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적용되는 보편성을 갖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모두 알아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진리는 특정 사람들에게 제한적으로 이해되는 배타성을 갖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경을 세계의 베스트셀러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런다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성경에 대해 이해하고 있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이해되는 것이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겐 하나의 신화나 문서에 불과한 것입니다. 일반인들에겐 너무나 이해되지 않는 책이 성경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보편성과 배타성에 대해 잘 말해 주는 부분입니다.
성경 말씀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감동적이고 큰 능력을 쏟아내지만, 그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모든 사람들이 그분의 제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심지어 설교 말씀을 듣는다고 모든 사람들이 감동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진리의 성경 말씀을 받아먹는 것입니다. 24절 말씀을 읽습니다.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지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 말씀에 대해 도무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는 것입니다. 마치 씨앗이 딱딱한 땅이나 돌밭이나 가시덤불에 뿌려지는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해도 그냥 흘러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다
우리가 듣는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진리의 말씀을 거절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진리가 없는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불의한 사람은 진리를 배척합니다. 그들은 진실한 사람들의 옆에 있는 것조차 싫어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의 거짓이 모두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불의는 진리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싫어하는 이유는 그 마음에 죄와 사탄의 세력들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돌덩이를 들추면 햇빛을 받은 지렁이가 꿈틀거리며 도망가는 것처럼, 빛이 오면 어둠에 있던 사람들은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 합니다. 그래서 죽을힘을 다해 자꾸 어둠 속으로 숨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진리에 노출되지 않으려고, 은혜의 빛으로 들어오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진리를 거부하는 것은 인간의 내면에 거짓과 불의가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그 사실을 들추는 것을 싫어하고 두려워하며 오히려 어둠의 세력을 더 좋아합니다.
요즘 국내에서 상영되고 있는 영화를 보면, 세상 사람들은 포르노나 폭력물을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내면에 그런 성향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내면에서 쓰레기 같은 인격과 지저분한 생각들로 가득하기 때문에 은근히 그런 것들을 즐기는 것입니다. 빛이 있고 진리가 있는 사람들은 불의한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이에 대해 예수님께 분명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너희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빛에 거하기를 원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둠에서 떠나 더 이상 죄 짓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성령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사람들은 어둠에서 떠나고 죄를 멀리 하며 능력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다시 말해 죄를 짓지 않으려고 애쓰기보다 성령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보혜사’는 진리의 영이시다
요한복음 14장의 핵심 메시지는 보혜사 성령에 관한 것입니다. 16, 17절 말씀에서 빌립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 첫 번째로 보혜사 성령님에 대해 언급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가룟 사람이 아닌 유다의 질문을 통해 예수님께서 두 번째로 보혜사 성령님에 대해 언급하십니다. 25, 26절을 읽습니다.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 보혜사 성령님께서 오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혜사 성령님에 대해 짧고 분명하게 정의해 주십니다. 보혜사란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보내주시는 성령님입니다. 기독교의 2,000년 역사가 오늘날까지 유지해 온 것은 성령님의 은혜입니다. 보혜사 성령님께서 진리를 지키시고 사람들을 변화시키시며 교회를 세우게 하신 것입니다.
보혜사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세상의 수많은 학문적 이론과 과학과 철학과 이데올로기 등이 지난 2,000년 동안 기독교를 공격해 왔고 지금도 공격하고 있지만, 오늘날까지 기독교가 역사의 중심에 있는 것은 바로 보혜사 성령님의 인도하심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사실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이 성령님을 무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곧 성령님을 부인하고 있진 않지만, 자신들의 방식대로 성령님의 능력을 제한해 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국 교회의 위기는 곧 성령의 위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우리는 성령님을 믿고 체험하며 선포해야 합니다. 그럴 때 기독교의 본질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과거에 성령님을 체험하신 성도들은 더욱 새롭게 체험하시길 바랍니다. 성령님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갈급함과 같이 간절히 사모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방언이나 예언하기를 기도하고 능력을 구하며 은사가 임하시길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은 너무나 아름답고 좋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성으로 기도하고 머리로 사고하는 육적 상태에서 벗어나 영적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보내시는 성령님을 받고 그 안에서 신앙 생활을 하게 될 때, 성경에 기록돼 있는 모든 사실들을 실제로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평소에 남을 미워하고 화를 잘 내던 사람도 성령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면 곧 이웃을 사랑하게 되고 항상 웃습니다. 이상하게도 말이 많고 실수가 잦던 사람도 성령 체험으로 모든 면에서 여유를 보이며 ‘위기에 처해 어려움을 당하면 예수님께 의지합시다’라는 말을 절로 하게 됩니다.

성령님은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신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사람은 두 가지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는 성령님께서 모든 것들을 가르쳐 주시고 깨닫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특징은 한마디로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 체험이 있으면 기적, 부활의 진리마저 이해하게 됩니다. 보혜사 성령님의 사역은 주님의 진리 말씀을 깨닫게 하고 이해하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신다
또 하나는 보혜사 성령님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자꾸 생각나게 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기를 쓰고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해 냅니다. 설교 시간에 목사님이 뭐라고 했는지, 성경 말씀을 읽긴 했는데 생각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한편 어떤 사람은 다른 것은 생각나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말씀만은 항사 샘솟듯 생각해 냅니다. 그것은 아이큐나 기억력이나 추리력과도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하나님의 말씀이 줄줄이 생각나게 되는 것입니다.
26절 말씀을 다시 읽어 보면,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우선적으로 신·구약 성경의 영적 진리에 대해 깨닫게 해 주십니다. 다음으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모두 생각나게 해 주십니다. 다른 것은 생각나지 않더라도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만이라도 생각나게 된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일년에 최소한 52번 설교를 듣게 되는데 적어도 지난 주 설교 정도는 생각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어떠한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생각나게 해 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유라굴로 광풍을 만나 죽게 되었을 때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광풍으로 인해 배가 파선당할 위기에 처해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살게 됩니다. 사업을 하다가 부도가 나서 가정과 회사가 풍비박산이 나고 이리저리 쫓겨 다녀도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한다면 살게 됩니다.
암에 걸려 의사로부터 가망이 없다는 진단을 받게 되더라도 근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며 예수님께 의지한다면 살아날 수 있습니다. 자식들이 위기 상태에 빠져 있고 부부 사이는 이혼 직전에 있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한다면 모든 문제들을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힘들지 않으며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아픔을 느끼지 않게 됩니다. 전쟁 중이나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한다면 곧 평안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나의 평안’을 주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이해되지 않던 말씀들이 이해되고, 진리의 말씀들이 자꾸 생각나게 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27절 말씀에 기록돼 있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이 말씀이 성령님의 임하심에 대한 최종 결론입니다. 성령님께서 임하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들을 가르쳐 주시고, 순간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생각나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는 것입니다. 두렵고 흔들리던 마음이 이상하리만큼 위에서 내려오는 평강이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지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끼치시는 그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단어로 구성된 특별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나의 평안’이라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의 평안으로 네 가지 특성을 갖습니다.
첫째, 순간적이지 않고 영원한 평안입니다.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조건이 좋을 때 생기고 나쁠 때 사라지는 평안이 아닙니다.
둘째, 영적 평안입니다.
셋째, 내면적 평안입니다.
넷째, 완전한 평안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나의 평안’에 반해, 세상이 주는 평안도 네 가지 특징을 갖습니다. 첫째는 짧고 순간적인 것입니다. 둘째는 물질적이고 육적인 것입니다. 셋째는 외면적인 것입니다. 넷째는 불완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끼치시는 ‘나의 평안’은 영원하고 영적이며 내면적이고 완전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평안을 경험하고 소유해야겠습니다. 인생에 위기가 닥쳐도 주님의 평안을 유지하고 있어야겠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실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너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예수님의 평안이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성령님께서 임하셔서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시고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해 주시길 축원합니다. 말씀의 토씨까지도 기억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지배하게 될 때 예수님께서 끼치시는 평안이 우리를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한 주일 동안도 말씀으로 충만하고 승리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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