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예수님은 가시고 성령님이 오시다 (요 16:5-11)

첨부 1


인생에 세 가지 본질적인 질문이 있습니다. 첫째, 인생은 어디서 왔는가 하는 것입니다. 기원에 관한 문제입니다. 둘째, 인생은 왜 사는가 하는 것입니다. 존재에 관한 문제입니다. 셋째, 인생은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세에 관한 문제입니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어떤 사람은 인생이 우연히 세상에 왔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실수로 세상에 태어났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진화의 과정을 거쳐 자연적으로 생겼다고 주장합니다. 이도저도 아닌 사람은 삶에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인생을 창조하셨다고 고백합니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어떤 사람은 먹기 위해 산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종족 번식을 위해 산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일하기 위해 산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고 고백합니다.
세 번째 질문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어떤 사람은 죽음 후에 아무 것도 없으며 그것으로 끝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죽음 후에 혼령으로 세상을 떠돌아다닌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죽음 후에 천국이나 지옥으로 간다고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시는 이유
이와 같이 인생에 대한 정의가 사람마다 제각기 다릅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한 기원과 존재 이유 그리고 인생의 길을 확실하게 정의해 주십니다. 먼저 5, 6절 말씀입니다.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느냐 묻는 자가 없고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예수님께서 ‘내가 곧 세상을 떠나는데, 그것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이다’고 분명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빌립보서 2장 5-8절 말씀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체를 입으시고 세상에 오셔서 모든 인간을 대신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신다고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지냈던 제자들마저 이 진리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에 대해 확실하게 모르고 있는 제자들은 그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고 불안해합니다.
사실, 사안이 복잡하고 어렵더라도 그 내용을 잘 파악한다면 불안감은 가시게 됩니다. 우리는 죽은 후에 천국으로 간다는 진리를 알고 나면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죽음이란 육신의 형태를 벗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7절 말씀을 봅니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사람들은 이별에 대해 좋지 않게 여기고 슬퍼하는 것이 일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떠나시는 것이 제자들에게 유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온 인류에게 복이 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보내시는 성령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에게도 애굽에서 떠나 약속한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크리스천은 현실에 안주하는 사람이 아니라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사람입니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다가 천국으로 떠나는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실상이란 영적으로 무엇을 뜻할까요? 세상 사람들은 국가, 사회, 민족이 영원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그러나 실상 국가도 민족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지상에 있는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떠남의 원리와 진리를 모른 채 살아가는 사람은 반드시 방황하게 됩니다. 떠나기 위해 출발했는데 목적이 없다면 방황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떠남의 목적을 안다면 인생은 즐거운 것이 됩니다. 우리는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그것을 미리 알고 준비하는 사람은 밝고 건강한 미래를 약속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떠나가시지 않으면 보혜사 성령님께서 우리에게로 오시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떠나가시면 예수님께서 보혜사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본문 말씀을 두고 설교를 준비하면서 제목 때문에 갈등했습니다. “예수님은 가시고 성령님이 오시다”라는 제목은 약간 신파조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속에 놀라운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 성령님께서 세상에 오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선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써 좌절과 절망과 죽음에 빠져 있는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이루신 업적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인류의 구원을 완성하신 것을 누가 대대에 걸쳐 온 인류에게 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지금까지도 예수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지상에서 지내셔야 합니다. 그리고 오대양 육대주를 친히 돌아다니시면서 구원의 소식을 전하셔야만 합니다. 2,000년 전부터 오늘날까지 세대마다 일일이 사람들을 만나시고 복음을 증거하셔야 합니다. 그런 방식으로는 온 인류의 구원을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시·공 초월해 활동하시는 성령님
아무리 예수님께서 인류의 구원을 완성하셨더라도 모든 세대에 걸쳐 민족과 종족과 언어와 문화를 초월해 그 진리를 전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된 구원의 소식을 온 인류에게 증거할 수 있는 방법은 성령님께서 세상에 오시는 것밖에 없습니다. 영으로 오시는 그리스도만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세대를 이어 내려오는 모든 인류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가셔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셨던 곳으로 돌아가셔서 성령님을 보내주시는 겁니다. 성령님께서 세상에 오셔야 모든 세대의 인류는 성령님의 음성으로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겁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것은 바로 성령님의 역사 때문입니다. 인간은 개인의 힘으로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만약 개인이 예수님을 만나려면, 타임머신을 타고 2,000년 전의 갈릴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 시절 그곳으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많은 군중들을 헤집고 나아가야 하는 수고를 감수해야 합니다.
그리고 갈릴리 해변에 사람들을 운집시켜 복음을 전한다고 해도 기껏해야 2-3만 명이면 포화 상태를 이루기 때문에 실제로 구원받을 수 있는 인원도 매우 제한되고 맙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떠나가시는 것은 슬픈 일이거나 손해를 보는 일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는 복된 일입니다. 성령님께서 오셔야 지상에 교회를 세울 수 있었고, 예수님께서 오순절에 성령님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언을 하고 방언을 하는 등 성령 받는 것을 작은 일로 여겨선 안 됩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세상에 오신 본질적 목적은 모든 세대에 걸쳐 온 인류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시는 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하시는 일에 대해 알아봅시다. 8절 말씀을 읽습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우리가 이 말씀을 잘 깨닫기 위해선 ‘책망’의 뜻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책망’이란 단순히 잘못을 지적하고 꾸짖는 것만 의미하지 않습니다. 진실을 알 때까지 사람의 마음을 계속 두드리고 움직이며 흔든다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진리를 알도록 깊이 역사하신다는 뜻입니다.

죄·의·심판에 대해 책망하시는 성령님
특히 ‘책망’이란 단어는 영적 권세가 있는 말입니다. 분명한 증거, 정확한 판단, 영적이고 초자연적인 감수성과 통찰력을 가진 것을 말합니다. 로고스 학자 필로에 따르면, ‘책망’이란 사람이 회개할 때 영혼의 양심을 지켜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성령님께서 죄를 통해, 의를 통해, 심판을 통해 진리를 알 수 있도록 때로 채찍을 가하거나 때로 격려하시면서 지속적으로 깨닫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봅시다.
첫째, 성령님께서 죄에 대해 책망하시고 깨닫게 해 주십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죄인이라는 사실을 잘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오셔서 닫혀 있는 마음의 문을 계속 두드려서 열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만나려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들어가셔서 죄인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나이가 들수록, 고난을 받을수록 그 사실을 깊이 깨닫게 하십니다.
인간은 죄와 허물이 많으며 교만하고 불순종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사실을 잘 인정하지 않는 철옹성 같은 내면의 세계를 갖고 있습니다. 그것을 성령님께서 뚫고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둘째, 성령님께서 의에 대해 책망하시고 깨닫게 해 주십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구원 받을 만한 의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십니다. 인간은 처음에 누구나 자신이 의롭다고 여깁니다. 따라서 자기주장이 많고 강합니다. 자신은 착하고 법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이라고 억지를 부립니다. 자신의 의로 살 수 있으며, 선행을 통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오셔서 그 생각을 깨뜨려 주십니다. 인간의 선한 의지가 인간 자체를 구원할 수 없다는 진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의의 본질에 대해 말씀해 주십니다.
셋째, 성령님께서 심판에 대해 책망하시고 깨닫게 해 주십니다. 세상에 개인의 종말이 있고, 지구의 종말이 있습니다. 30-40대 나이에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살다가 나이가 더 들고 병이 나면 인생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을 성령님께서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리고 죽은 후 심판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십니다. 성령님께서 지속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죄에서 벗어나 진리의 본질에 이르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
그러면 이런 것들에 대해 성령님께서 어떻게 가르쳐 주실까요? 9절 말씀입니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성령님께서 죄에 대해 깨닫게 해 주시는데, 죄란 한마디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은 성령님을 만나기 전에 이 말씀에 대해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임하시면 한순간 전적으로 동의하게 됩니다. 인간의 이성이나 사고로는 죄에 대해 깨달을 수 없고, 전적으로 성령님의 도우심에 의지해야 합니다. 10절 말씀을 봅니다.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의는 선행을 하거나 죄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곧 예수님 자체입니다. 예수님의 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늘나라로 올라가심으로써 완성됩니다. 우리의 의는 선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얻게 됩니다. 이것도 인간의 이성이나 사고로 이해할 수 없고 오로지 성령님께서 오셔서 역사하셔야 이해가 가능합니다. 11절 말씀을 읽습니다.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인간은 성령님의 활동이 없으면 사탄과 귀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면서도 건물을 짓거나 어떤 일을 시작할 때, 고사를 지내는 것을 보게 되면 참으로 어이가 없습니다. 사탄이 죽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영적으로 깨닫게 되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어야 영적 구원, 실상에 대한 본질을 이해할 수 있고 믿음이 자라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4, 15장은 ‘성령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로마서 8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요한복음 14장 16-21절 말씀을 모두 함께 읽어봅시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이 말씀에서 핵심 단어는 ‘성령님’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강조하십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없어도 아무 이상을 느끼지 않습니다. 성령님께서 오셔서 예수님께서 계실 때보다 더욱 든든하게 우리를 지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실패나 죽음에 처해져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갖게 된 것은 바로 성령님의 역사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을 이뤄라
또 요한복음 15장 26-27절 말씀을 같이 읽어봅시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하느니라”
요한복음 14, 15장은 16장과 더불어 성령님에 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모든 진리를 성령님께서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해 주십니다. 부활, 천국, 미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교회 성도님들, 험한 세상을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름 부으심과 같은 성령 충만을 체험하는 일입니다. 저는 모든 성도님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성령 세례를 받기를 축원합니다. 그럴 때 우리 모두는 험한 세상을 넉넉히 이기고도 남을 것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