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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환난에서 담대하라 (요 16:2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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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종교, 철학, 사상, 제도 등 어떤 것도 부활에 대해 언급하지 않습니다. 오직 기독교만이 부활을 가르치면서 그 진리를 세상에 전파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근본 ‘창조’와 ‘부활’
기독교는 두 가지 진리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하나는 삼라만상(森羅萬象)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입니다. 인간도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사실은 두말할 나위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 사실을 잘 믿으려 하지 않는 성향을 갖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인간은 태어나 모두 죽으며 그 후에 여러 모양으로 부활하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런 사실을 잘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지난 2,000년 동안 예수님의 부활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증언돼 왔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부활이 거짓이라면, 2,000년 동안 진행돼 온 검증 과정에서 도태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검증에도 불구하고 부활은 더욱 힘을 얻고 지금까지 진리로서 계승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존재하고 부흥하는 까닭은 예수님의 부활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세 가지 사실을 알았습니다. 첫째는 부활은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얘기를 듣고 ‘아멘’으로 화답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며 오히려 황당해 하는 게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둘째로 부활의 기쁨은 절대로 빼앗길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선행을 베풀며 자기 의(義)를 쌓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 위에 믿음을 굳게 세우는 것입니다.
셋째로 부활은 우리로 하여금 멀리 계시던 하나님을 가까이서 만나게 하고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들어가게 합니다.

기도에 혁명을 일으킨 부활
그러면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해 부활에 대해 세 가지 사실을 더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부활은 우리의 기도를 한층 더 높은 차원으로 인도합니다. 흔히 우리는 희망의 기도와 약속의 기도를 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인격과 선행과 도덕성을 믿는 사람들은 희망의 기도를 많이 합니다. ‘이랬으면 좋겠다, 저랬으면 좋겠다’라는 소원을 아룁니다.
그러나 신앙은 희망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부활의 예수님을 경험한 사람들은 약속의 기도를 많이 합니다. 예수님께서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4)고 말씀하신 약속을 따라 기도하는 것입니다.
덧붙여 부활은 약속의 기도를 넘어 하나님 아버지께로 인도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25절 말씀입니다.
“이것을 비사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 비사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여태껏 예수님께서 진리를 말씀하실 때 여러 비유를 들어 알기 쉽도록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는 동안 천국을 한 번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사람들에게 열심히 천국에 대해 설명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비유로 천국에 대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활에 대해 말씀하시는 시점에서 더 이상 비유로 말씀하시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부활에 대해 비유로 일러주셨지만 때가 되면 더 이상 비유로 말씀하시지 않고 직접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말씀하시겠다는 것입니다. 26절 말씀을 봅니다.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이 말씀은 아주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여기서 ‘그 날’이라는 말은 ‘부활하신 후’를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기 전에 모든 것들에 대해 중보 기도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성령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영적 진리를 알게 하시고 비유의 말씀으로 아니라 직접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깨닫게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예수님의 중보 기도로 응답받았지만,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성령님께서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직접 기도하게 하시고 응답받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가히 ‘기도의 혁명’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는 전근대적 성향의 사람, 근대적 성향의 사람, 포스트모더니즘 성향의 사람들이 뒤섞여 아주 복잡하게 살아갑니다. 기성세대와 신세대는 서로 다르기 때문에 대화조차 통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던 시대에 살고 있고, 젊은이들은 후기 모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도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기도를 할 때도 목마른 기도를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약속의 기도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같은 시간에 한 자리에 나란히 앉아 있는 사람들도 저마다 영적 이해와 경험이 다르기 때문에 기도의 내용도 제각각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메시지는, 우리가 진정으로 부활을 알게 되면 더 이상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성령님께서 지상에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약속의 기도들이 성취되는 기적들을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이며 율법적인 신앙을 극복하고 한 차원 높은 믿음의 세계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죄를 지을 것인가 말 것인가로 고민하는 단계를 넘어서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홍해를 건너기 전의 애굽에 있는 차원이 아닙니다. 같은 죄를 반복해 짓고 육체의 소욕에 따라 움직이는 단계가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슴에 품고 성령충만으로 승리의 삶을 사는 단계라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성령님께서 지상으로 오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중보 기도를 필요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친히 우리 안에 역사하셔서 기도하게 하시고 그 기도에 대한 응답도 이미 이뤄진 것으로 확신하는 믿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는 부활
둘째, 부활은 예수님께서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하십니다. 27, 28절 말씀을 읽습니다.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하나님께로서 온 줄 믿은 고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사람이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그 사람이 성령님을 받았다는 증거가 됩니다. 성령님께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직접 기도할 수 있습니다. 또 성령님께서 비유 없이 직접 진리를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도 가르쳐 주십니다. 삼위일체 진리에 대해 알게 되는 분기점이 바로 부활 사건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어디서 오셔서 무엇을 하시다가 어디로 가시는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 오셔서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것까지 압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신다는 것에 대해서 이해를 못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기억하고 있었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살아나신 후에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시는 것까지 연결할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과거와 현재는 미래와 연결됩니다. 지금 우리가 고민하는 이유는 과거도 있고 현재도 있는데, 미래를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과거로 인해 괴로워하고 현재에서 목마르며 미래에 대해 확신할 수 없어 불안합니다. 현실이 미래와 연결될 가능성이 없어 보이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조각나 있습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하나로 연결돼야 인생을 보는 눈이 생기는데, 안타깝게도 미래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미래가 더욱 중요한 이유는 인생이 죽고 난 후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사후 세계에 대해 전혀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현실에서 불안에 떨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활의 신앙을 갖는다면 미래를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라고 묻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임하시면 우리는 미래를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천국까지 볼 수 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요 14:1-2a)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미래를 볼 수 없어 불안하던 것이 곧 사라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로부터 오셔서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가신다는 말씀에 대해 이제 제자들은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부활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이라는 영적 깨달음을 줍니다. 29, 30절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말하되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사도 하지 아니하시니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서 나오심을 우리가 믿삽나이다.”
이 말씀대로 우리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 저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신 것을 믿습니다’라고 신앙을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가 부활을 믿지 않는다면 미래를 열 수 없고 천국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은 나랏일로 걱정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미래를 볼 수 있는 사람들은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나라의 미래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행동을 보고 걱정하는 것을 삼가고, 하나님을 바라는 온전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인생의 미래도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인생의 미래가 사람에게 달려 있다면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인생의 미래가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불안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승리를 주는 부활
셋째, 부활은 우리에게 궁극적인 승리를 가져다줍니다. 31, 32절 말씀을 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날 것으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나 뿔뿔이 흩어질 것을 말씀하십니다. 물론 사람은 한 곳에 오래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곳이나 직장에서 영원히 머물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다른 곳으로 떠나게 됩니다. 그래서 인생은 이별을 준비하는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대사님 한 분은 항상 보따리를 싸두고 일을 합니다. 그렇게 하면 마음이 편하다고 합니다. 그 분은 “목사님, 저의 일을 모두 끝냈습니다. 저는 항상 떠날 준비를 하고 일을 합니다. 그렇게 하니까 하나님께서 하던 일을 계속하게 하십니다. 억매여 있으면 부자유하고 노예가 됩니다. 저는 자유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한 적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떠나신다는 것은 제자들에게 매우 불안한 일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일이 힘든 것임을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특히 사랑하는 가족과 죽음으로 이별할 때,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오랫동안 근무하면서 정이 든 직장에서 떠날 때, 조국을 등지고 타국으로 떠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하나는 우리가 어떤 경우라도 절대 혼자가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가족과 이별하고 직장에서 나오며 조국을 떠나더라도, 혼자가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함께 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멀리 떠나 각각 흩어져 버려도 아버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혼자가 아니라고 강조하십니다.

우리는 사랑의 대상을 향해 집착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 대상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자신을 중심으로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사랑이 집착인 이유는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한 사람을 사랑한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자신을 위한 사랑인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특히 사람이 죽었을 때 그런 현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족이나 친지가 죽으면 ‘나는 어떡하란 말이냐’며 울고불고 합니다. 하지만 자세히 내막을 들여다보면, 죽은 사람이 불쌍해서라기보다 자신이 앞으로 살아야 할 일을 걱정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도 자기 집착이고 욕심입니다. 그런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정말로 사랑한다면 왜 이혼하겠습니까? 자기 욕심, 집착을 사랑으로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대가 마음에 흡족하지 않으면 그냥 돌아서 버리는 것입니다. 정말 서로 사랑한다면, 배우자의 실수를 감싸줘야 합니다.

인생은 결국 홀로서기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의지 하고 조직을 의지하며 돈을 의지하고 명예를 의지해 생존하려 합니다. 그러나 인생이 의지할 것은 오직 하나님뿐이심을 명심해야 합니다. 인생의 영원한 동행자는 하나님이십니다.
마지막으로 33절 말씀을 읽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곧 유토피아를 맞이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펼쳐지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환난과 고난입니다.
여기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은 환난과 고통 속에서 이뤄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뜻합니다. 우리에게 환난과 고통이 없다면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평안’과 담대함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미리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두 가지 복을 더하여 주십니다. 한 가지 복은 ‘예수님의 평안’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환난당할 것을 미리 말씀해 주시는 이유는 예수님의 평안을 누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환난을 이기는 최고 비결은 예수님의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평안은 예수님 안에서 나옵니다. 세상은 결코 평안을 주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우리로 하여금 환난을 이기게 하고도 남습니다. 배신을 당하고 분노가 일어 갈등할 때도 예수님의 평안으로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환난을 당했을 때,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누려야 합니다.
또 한 가지 복은 ‘담대함’입니다. 우리가 환난을 당했을 때 담대해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승리한 전쟁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세상을 이기고 승리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다릅니다.
우리가 환난으로 인해 고통을 겪지만 예수님께서 평안을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그 힘으로 우리는 모든 환난을 능히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올해 남은 기간 동안 예수님의 평안으로 모든 어려움들을 극복하고 예수님의 승리로 세상을 이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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