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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제자들을 위해 중보 기도하신 예수님 (요 17: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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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중보 기도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곧 제자들이나 유대 민족 등 어느 것들보다 먼저 자신을 위해 중보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중보 기도에서 자신을 위해 먼저 기도하신 것이 가장 큰 특징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힘들고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지게 하심으로써 아들을 영화롭게 해 달라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영화롭게 하심으로써 아버지를 영화롭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중보 기도입니다.
창세 전에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누렸던 영화로써 아들을 영화롭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고, 그 권세를 가지신 아들은 자신의 유익을 위하는 일에 아니라 십자가를 지시는 일에 사용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기도의 모범을 보이신 예수님
우리는 종종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기 싫어해 멀리 도망가려고 합니다. 처음엔 은혜를 받고 믿음이 생겨 주님의 일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이라는 게 그리 쉽고 간단한 게 아닙니다. 주님의 사역은 좁은 길이고 욕먹는 것이며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길입니다. 안락한 생활을 접고 선교사가 되어 고통스러운 미지의 세계로 떠나가는 것입니다. 특히 부모는 자식이 외지에 나가 고생하는 것을 결코 좋아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일을 시작할 때 심하게 반대하고 나서는 사람이 바로 당사자의 부모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10년 전에 의사였던 분이 선교사로 헌신하셔서 모 처로 떠나셨습니다. 그때 주변의 사람들은 ‘왜 하필이면 당신이 가야 하나, 장로로서 교회를 잘 섬기면 되지 꼭 가야 하나, 반드시 그런 식으로 예수를 믿어야 하느냐, 예수 믿지 말자는 게 아니라 폼 좀 나게 믿자는 거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분이 선교사로 나가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은 ‘하나님도 내 입장이 돼 보면 알 겁니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십자가를 피해 가려고 하고, 십자가를 내려놓고 가려고 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앞에 두고 기도하시던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려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신다고 기도하신 후, 가능하면 그 십자가를 지나가게 해 달라고 간구하신 주님의 그 마음을요. 그 기도가 얼마나 힘드셨던지 땀이 피가 되었다는 그 마음을요. 마지막 기도에서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말씀하신 그 마음을요. 그래서 힘들고 고통스러운 그 길을 계속 가게 해 달라는 마음을요.

예수님의 자신을 위한 중보 기도는 고난의 십자가를 필하지 않고 많은 유혹과 시험에서 벗어나 가던 길을 계속 가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할 때, 많은 시험과 유혹들이 찾아옴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좀더 쉽고 편한 길을 가면서 주님을 믿었으면 하는 유혹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모든 시험과 유혹을 물리치시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면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와 순종에서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위한 중보 기도를 하신 후, 이제 사랑하는 제자들을 위해 중보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에게 제자들은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준에 따라오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영적 깨달음이 미숙했고 실수투성이에 허점투성이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시며 승천하실 때까지도 시쳇말로 철이 덜 들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 때 힘들게 하는 것이 바로 철 안난 사람들과 같이 사는 일입니다. 부부 사이에도 철 안난 남편과, 아내와 사는 것만큼 어려운 일은 없습니다. 철 안난 자녀들과 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족이기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 버릴 수도 그만둘 수도 없어 난처하게 되고 맙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영적으로 미숙하고 철 안난 제자들을 옆에 끼고 사셨습니다. 그들을 포기하시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알아듣고 깨닫도록 끝임 없이 가르치고 훈련하셨습니다. 당시 제자들의 상태가 어떠했는지 예수님의 중보 기도에서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6절 말씀입니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예수님께서 소위 철이 덜 들고 신통치도 않은 제자들에 대해 어떻게 여기셨는지 참 궁급합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제자들에 대해 ‘세상 중에서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별 볼 일 없는 제자들이지만, 그들이 자기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도 때로 마음에 들지 않는 자식들로 인해 눈물을 흘리고 고통을 겪지만, 자기 속으로 낳았기 때문에 절대 포기 못하고 사랑합니다.
둘째, 예수님께서 제자들에 대해 자신에게 속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아버지를 위해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원래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고, 아버지께서 그들을 아들에게 보내주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제자들을 선택하시고 예수님께로 보내주셨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결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함께 살고 있는 남편, 아내도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각자에게 보내셔서 서로 만난 것이 결혼입니다. 자녀도 하나님의 것으로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우리의 정체성을 스스로 깨달을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어려움도 너끈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우치시고 그분의 뜻대로 행하도록 계속 훈련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제자 훈련’입니다. 제자 훈련이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람을 가르치고 양육하는 것입니다. 7절 말씀을 봅니다.
“지금 저희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께로서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시는 동안 한 번도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신 적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하나님 아버지께만 초점을 맞추시고 그분께만 모든 영광을 돌리셨습니다. 우리가 사복음서나 신약 성경 전체를 통해 예수님께 대해 깊이 연구해 보더라도, 자신을 위한 말씀이 한 번도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능력, 기적, 기도 등 모든 것들이 오로지 하나님 아버지께로 모아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모든 것을 자신에게로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나의 생각, 주장, 의견, 비전 등이 곧 자신을 위한 것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갈등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보내주신 제자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는 것은 옛사람인 자아가 죽고 새로 태어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죽긴 죽었는데 아직 덜 죽어서 문제가 됩니다. 본인은 죽었다고 생각하지만 잠시 기절한 상태입니다. 그러다 깨어나면 옛사람인 자아가 다시 살아나는 겁니다. 자아가 자꾸 살아나게 됨으로써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느낀 것은 자기 안에 있던 옛사람이 죽은 것과 대신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자신이 육체 중에 사는 것은 자신의 힘으로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자존심이나 자의식 같은 것을 전혀 발견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상, 주장, 철학, 생각 등은 철저히 아버지와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것들에 대해 오직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럼, 내가 없다면 도대체 나는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곧 ‘나’는 변화되고 거듭난 자아를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님을 잘 믿고 싶습니까? 자존심(自尊心, 자아를 존중하는 마음)을 버리십시오. 우리가 예수님을 잘 믿는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자의식의 세계에서 벗어나면 됩니다. 그렇다면 자의식도 없이 어떻게 문학이나 예술을 할 수 있느냐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자존심으로 쌓아 올린 것들은 예술을 무론하고 모두 썩은 것들입니다. 우리는 옛사람의 자아로 이룬 것을 붙잡고 미련을 떨며 몸부림을 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불필요한 자존심을 지키느라 너무 많은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습니다. 부부 싸움이란 것도 곧 자존심 싸움입니다. 서로 무시하고 무시당했다고 생각한 끝에 자존심을 찾으려 싸우는 것입니다. 그 자존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일입니다.

아버지의 모든 말씀들을 제자들에게 주심
자아의 생각, 주장, 철학 등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혈기, 오만, 분냄 등이 됩니다. 어떤 사람은 가만히 있다가도 벌컥 화를 내기도 합니다. 그것은 자기 안에 상처가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람에게 이런 것들이 빠진다면 약간 바보처럼 보이겠지만, 한 편으로 거듭난 것에 대한 증거가 되기도 합니다. 8절 말씀을 읽습니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중보 기도하시면서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해달라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아버지와 아들과 제자들과의 관계만을 기도하십니다. 즉 서로 일은 없고 관계만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 내용은 아버지께서 주신 말씀을 아버지께서 보내주신 제자들에게 그대로 전하셨다는 것입니다.
제자 훈련은 사람들에게 ‘나’라는 개인의 뜻, 생각, 경험을 말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 뜻, 사랑을 말하며 가르치는 것입니다. 즉 말씀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것을, 예수님도 아버지께로부터 오신 것을 알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 교회 성도님들은 ‘하용조’라는 사람을 보지 않기를 바랍니다. 인간 하용조는 껍데기에 불과하고 아무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예수님입니다. 제가 설교하는 것은 저의 철학, 비전을 말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생명, 진리, 비전을 그대로 전하는 것입니다. 하용조, 우리 교회라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고, 그 안에 계시는 주님의 말씀, 사랑, 능력이 중요합니다. 그것으로 하여금 감추지 않고 막히지 않으며 마냥 흘러갈 수 있도록 만드는 일이 중요합니다.

‘인생은 하나님께 속한 것’
우리가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에서 배워야 할 점은 하나님의 사랑, 뜻, 진리가 흐르게 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보도록 하는 것입니다. 9절 말씀입니다.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같은 말씀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중보 기도하시는데, 그들은 모두 아버지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나의 인생은 모든 게 하나님의 것’이 됩니다. 부모도, 자식도 하나님의 것이고 남편도, 아내도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가진 돈, 명예, 직업 등도 하나님 아버지의 것이 됩니다. 이에 대해 우리가 잘 깨닫는다면 모든 일에 하나님의 복이 임하실 것입니다. 10절 말씀을 봅니다.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사랑의 시금석(試金石)은 정말로 사랑하느냐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열정적으로 사랑한다고 말을 하지만, 자세히 알고 보면 집착에 불과합니다. 다만 자신이 사랑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대부분의 사랑은 그 대상을 위한 것이 아니고 자신을 위한 것일 뿐입니다.
따라서 사랑의 대상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화를 내고 맙니다. 이유는 그로 인해 기분 나쁘다는 것입니다. 왜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느냐는 것입니다. 모두 자기 집착이고 자기애(自己愛)입니다.

사랑은 중보 기도의 힘
따라서 사랑의 시금석은 사랑의 대상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진짜 사랑한다면 그 대상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 대상이 눈에 보이지 않아도 항상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중보 기도하십니다. 비록 미숙하고 실수가 많아 마음에 들지 않은 제자들이지만, 예수님께서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도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진짜 사랑한다면 그 사랑의 대상을 위해 기도하게 됩니다. ‘하나님, 그 사람을 보호해 주십시오. 그 사람이 잘못되지 않게 해 주십시오’라고 끝임없이 중보 기도하게 됩니다. 11절 말씀을 읽습니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께서 미숙하고 실수가 많은 제자들을 너무나 사랑하십니다. 원래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고,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그들을 맡기셨으며, 예수님께서 사랑하셔서 그들을 위해 아버지께 중보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께서 곧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면서 그들의 곁을 떠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홀로 남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을 위해 중보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아버지, 제가 없더라도 그들을 보호하시고 지키시며 복을 주십시오.’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을 하나님 아버지께 위탁하십니다. 우리가 돈이 있으면 얼마나 있고, 없으면 얼마나 없겠습니까! 우리가 일을 잘하면 얼마나 잘하고, 못하면 얼마나 못하겠습니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은 진정한 사랑의 마음입니다.

주님 안에서 하나 되기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얼마나 많은 일들을 시키셨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랑을 베푸셨느냐는 겁니다. 이것이 제자 훈련의 핵심입니다. 제자 훈련은 어떤 훈련 프로그램을 말하는 게 아니라 진정한 마음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버지, 제가 떠나더라도 이 땅에서 제자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옵소서. 마치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 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삼위일체 관계가 회복되고, 예수님의 사랑이 싹 트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이 자리에 모이신 모든 성도님들을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들로 알고 제 개인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중보 기도하신 것처럼, 저는 그런 제자 훈련을 하고 그런 목회를 합니다. 이것은 제 개인의 임무일 뿐 아니라, 모든 성도님들이 다같이 동참해야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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