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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표현 (눅 1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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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눅 17:11-19)
저는 여러분들의 기도와 사랑가운데 지난 한 주간 일본여행을 마치고 잘 돌아왔습니다. 일본, 정말 우리와 가까운 나라입니다만 왜 그렇게 멀리 느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일본은 어느 면으로 보나 선진국이요, 경제대국입니다. 정말 얄밉도록 잘해 놓은 나라입니다. 어느 것 하나 나무랄 것이 없습니다. 시골에 갈수록 더 잘해놓았습니다. 마치 저는 미국에 온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부유하고 활발한데,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복음의 뿌리를 내리기가 힘든 나라입니다. 기독교를 박해하는 회교국가도 기독교인구가 1%는 됩니다. 하지만 일본은 박해도 없고, 아니 그렇게 목이 터져라 외치고, 선교사들이 온 힘과 정성을 쏟아 붓는데도 인구의 0.4%만이 기독교를 믿고 있습니다. 교회를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조금 큰 도시에는 교회가 있지만, 작은 도시는 아예 교회가 없습니다.

'풍요 속에 빈곤'이란 말이 있듯이, 분명 일본은 잘 사는 나라입니다. 겉으로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속은 썩었고, 영적으로 병들었고, 하나님 앞에서 가장 교만하다는 것을 제가 떠나 올 때까지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이번에 어렵게 시간에 내어 찾은 곳이 '나가사끼'입니다. 이곳은 2차 대전 때 원자폭탄이 투하되어 큰 희생을 낸 곳입니다. 나가사끼는 원래 폭격의 대상지가 아니었습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터지고, 8월 9일에 투하할 곳은 원래 '코쿠라'라는 곳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날 코쿠라 지역에 짙은 구름으로 시야가 가려 몇 번 그곳을 돌다가 나가사키로 진로를 바꾸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생각지도 않은 지역이 대상이 되어 당한 것입니다. 그곳에 가서 보니 원자폭탄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 가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한 복판을 중심으로 직경 5키로까지는 거의 초토화되었고, 20키로까지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원자폭탄이 떨어진 그라운드 제로에 평화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전쟁기념관이 있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애도를 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곳에서 일본이 아직까지도 왜 원자폭탄이 터졌는지의 핵심적인 의도를 모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당했다, 이렇게 우리의 동족이 비참하게 죽었다, 그날을 영원히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만 강조할 뿐, 왜 이 일이 일어나야 했는지에 대한 반성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특히 그라운드 제로 바로 옆에 파괴된 성당을 전시관에 부각시키는 것을 보면서, 혹 미국사람들이 믿는 기독교에 우리가 당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였습니다. 영적으로 교만하고 깨달음이 없는 모습입니다. 이러니 복음이 들어가기가 쉽지 않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일본선교가 가장 어렵다고 합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이 더욱 부담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하시기에, 성령이 역사 하면 언젠가 하나님의 뜻이 일본에 임하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황무지와 같은 그곳에 선교사들이 외롭게 지내면서 복음을 전합니다.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물론 쉽지 않습니다. 마치 버려진 땅처럼 보여 힘들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복음의 씨를 뿌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일본에 비해 우리 나라는 축복 받은 나라입니다. 우리가 일본보다 조금 경제적으로 뒤떨어지긴 했지만, 이 나라는 하나님의 은혜가 머무는 나라입니다. 많은 교회가 있습니다. 말씀이 지배하고, 기도가 살아 있습니다. 성령이 기름 부음으로 고갈되지 않는 촉촉함이 온 국토를 지배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골방에서 민족과 세계를 가슴에 품고 기도하는 성도들의 열정이 식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예배 때마다 이렇게 많이 모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쁨으로 나아갑니다. 우리가 많은 것을 감사해야 하겠지만, 일본에 비한다면 이렇게 우리 민족이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이 정말 감사할 조건입니다. 민족의 20%이상이 예수를 믿는 나라, 세계에 가장 많은 선교사를 파송한 나라, 세계 기독교를 주도하는 나라, 성령의 뜨거운 역사와 은혜가 머무는 나라,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큰 감사를 올려야 합니다.

감사의 달을 맞이하여 저는 지난 두 주에 걸쳐 감사에 있어서 중요한 두 가지 요소를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는 '생각'이요, 다른 하나는 '동기'입니다. 이제 오늘 마지막으로 중요한 요소를 하나 더 소개하려고 합니다. 바로 '표현'입니다. 감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바로 표현입니다. 어쩌면 생각과 동기는 표현을 통해 절정에 이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난 두 주동안 생각과 동기를 강조하기 위해 신앙과 삶을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 보았습니다. 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과 신앙은 표현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한마디로 표현입니다. 우리가 믿는 것에 대하여 그것이 속에서부터 출발하여 밖으로 표출되는 것이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품고만 있는 것은 온전한 신앙이 아닙니다. 아니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성령이 역사하면 반드시 표출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요, 하나님의 손길과 뜻입니다.

구원이 특별히 그렇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표현이 되지 않으면 나 자신도, 다른 사람도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로마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얻느니라' 내가 주님을 믿는다는 신앙은 반드시 우리의 입으로 시인해야 합니다. 믿음을 마음에 품고만 있는 것은 온전한 구원이 아닙니다. 입으로 고백해야 됩니다. 고백하는 것이 쉬워 보여도 그렇지가 않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 그분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를 따르는 자가 많지 않았습니다. 입으로 '내가 믿겠습니다, 따르겠습니다'라는 단계까지 가야 온전한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냥 속으로 '믿어볼까' 하는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아니 우리 안에 성령이 역사 하면 반드시 밖으로 표출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는 것도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아주 귀한 표현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필요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데 특별히 교회에 나갈 이유가 무엇이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교회에 나와야 합니다. 내가 내 발로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고 사는 삶은, 신앙을 하나님께 표현하는 행위입니다. 내가 용서받고, 힘을 얻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산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구체적인 증거가 바로 교회생활입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교회생활은 어떤 일과 사역과 연관해서도 물론 중요하지만 내가 하나님을 신실히 믿고 따라가는 크리스챤임을 알 수 있는 통로입니다. 교회에 나오는 분명한 표현 없이 나의 신앙을 나도, 다른 사람도, 하나님도 인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도 표현입니다. 사랑은 표현되어야 가장 아름다운 것입니다. 어떤 형태로든지, 사랑은 표현되어야 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한마디로 표현된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이처럼'이 얼만큼의 사랑인지를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 사랑을 알게 하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이지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와 높이와 깊이는 십자가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예수님이 죽으셨습니다. 그분은 죄가 있어서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죄, 바로 여러분과 저의 죄를 대신하여 속죄양이 되신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었고, 그분이 상한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신 것입니다. 십자가를 볼때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표현인 것처럼, 인간의 사랑도 표현되어야 합니다. 사랑은 한마디로 표현입니다. 남녀간의 사랑, 부모의 사랑, 스승의 사랑, 부부의 사랑, 이웃사랑은 모두가 표현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사랑은 반드시 표현되어야 합니다.

서양사람들은 사랑을 아주 잘 표현합니다. 지나칠 정도로 표현을 잘합니다. 매일 아내와 남편에게 ' I love you'를 입에 달고 삽니다. 무슨 때가 되면, 서로에게 정말 흡족할 만큼 사랑을 표현합니다. 아이들에게 하는 것을 보면, 정말 배울 점이 많습니다. 그런 서양사람에 비해 사랑을 표현하지 못하는 민족 중에 하나가 바로 우리나라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쑥스럽게 생각하는 민족입니다. 우리가 매일 아내와 남편에서 '사랑해'라고 말하면 이상하게 쳐다 볼 것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많이 당당해졌습니다. 어디에서든지 손을 잡고, 붙어 다니고, 거침없이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도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아직까지는 뭔가 어색하고 잘 안되는 것이 바로 사랑의 표현입니다. 사랑을 표현해야 합니다.

이처럼 삶의 모든 것이 표현이듯이, 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감사는 한마디로 표현입니다. 감사는 생각도 중요하고, 동기도 있어야 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표현되어야 합니다. 표현되지 않는 감사, 그것은 진정한 감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끊임없이 감사에 있어서의 표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이 바로 대표적인 말씀입니다. 본문은 예수님 시대에 있었던 열명의 문둥병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 예루살렘으로 내려가시다가 한 촌에서 열 명의 문둥병자를 만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란 소문을 듣고, 결사적으로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다 고쳐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하나만이 예수님께 다시 돌아와 사례했습니다. 예수님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하시며 몹시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가 배우는 진리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잘 감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감사의 표현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은혜를 모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표현을 못한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안타깝게 생각한 것입니다.

구약시대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하나님 앞에 나올 때 반드시 빈손으로 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생각해 보면, 인간이 가지고 나가는 모든 예물은 인간을 위해 사용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빈손으로 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이유겠습니까? 감사는 반드시 표현되어야 함을 심어주신 것입니다.
감사를 표현하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아신다면 은혜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감사요, 감사는 표현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감사를 표현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 있습니다. 찬송가의 가사처럼 손과 발을 주님을 위해 드려야 합니다. 나의 음성, 나의 시간, 나의 희생, 그리고 나의 생명까지도 드리며 감사를 표현해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표은 나의 소중한 보화를 드리는 것입니다. 왜 이것이 중요할까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의 보물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2003년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지난 일년, 아니 지난 과거의 모든 삶을 돌아보십시오. 이제껏 내가 산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앞으로도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삽니다. 조금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지만,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를 한 걸음, 한 걸음 계속해서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은혜를 헤아려 감사하고, 이제 그 감사를 마음껏 표현하며 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서해원 목사
 (2005-06-23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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