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주기도문 (마 06:9-13)

첨부 1


신앙생활과 기도생활은 서로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생활이 없는 신앙생활은 병든 신앙생활이라고 단정하여도 조금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무조건 기도생활만 열심히 한다고 성숙한 신앙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의 생활도 중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기도의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수준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면서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기도에도 수준이 있느냐고 말씀하실 수 있지만 분명 기도에도 수준이 있습니다. 높은 수준의 기도가 있고 낮은 수준의 기도가 분명히 있습니다. 하나님은 낮은 수준의 기도도 무시하지 않으시고 들어주시지만 기도에는 분명 낮은 수준의 기도가 있고 높은 수준의 기도가 있습니다.

교회성장적인 측면에서 볼 때 우리 한국 교회는 성공한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한국 교회와 교인들은 성숙한 교회와 성숙한 교인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우리는 좀더 성숙한 교회와 교인이 되기 위하여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숙한 교회와 성숙한 교인이 되기 위하여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기도의 수준을 높이기 위하여 힘쓰는 것입니다.

기도의 수준을 높이기 위하여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을 자세히 살펴보고 공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주기문을 보면 볼수록 정말 최고 수준의 완벽한 기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기도문을 그저 회의나 예배를 끝낼 때 주문처럼(?) 외우는 형식적인 기도가 아니라 정말 우리의 마음에서 우러나와 하나님께 드리는 간절한 기도가 되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만으로도 얼마든지 우리의 자신과 교회를 보다 성숙한 교인과 교회로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번에 주기도문을 설교하게 되면서 남은 여생을 주기도문으로 간절한 나의 기도를 삼고 그 주기도문을 철저히 이루기 위하여 살아야겠다는 분명한 목표를 설정할 수 있었습니다. 주기도문으로 나의 기도를 삼고 주기도문으로 나의 삶과 신앙의 목표를 삼아 그 목표를 하나 하나 이루어 가는 삶을 살 수만 있다면 참으로 주님을 닮아가며 주님의 향기를 발하며 주님의 편지로서의 자랑스럽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을 꼼꼼히 공부해 나가면서 주기도문을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 하시는 하나님의 교훈을 배워가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우리의 기도의 수준을 높이고 그것을 통하여 우리의 신앙과 삶을 보다 성숙하게 만들어 가려고 합니다.

주기도문 중에서 제일 먼저 생각하려고 하는 말씀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입니다. 우선 이 말씀은 우리에게 우리의 기도의 대상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분은 우리와 어떤 상관이 있으신 분인지를 분명히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 즉 우리가 기도를 하여야 할 대상은 물론 하나님이십니다.

지극히 당연하고 평범한 말씀인 것 같지만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여러 해 전 신학대학교 학생들이 어떤 문제 때문에 데모를 하고 시위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학생들이 데모를 하면서 마당에 천막을 치고 그 천막에서 금식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금식기도를 한다고 크게 글자를 써 붙이고 마당에서 사람들 보는 앞에 금식기도를 한다고 나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금식기도로 데모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학생들 대표를 불러 그것이 옳지 않음을 일러주었습니다. 경우에 따라 데모는 할 수도 있지만 금식기도로 데모를 할 수는 없다고 일러주었습니다. 금식기도로 데모를 할 때 그 기도를 받으시는 대상이 하나님이냐 사람들이냐를 물었습니다. 사람들 보라고 사람들 앞에서 금식기도를 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그것은 금식기도가 아니라 단식투쟁이라는 것을 일러주었습니다. 학생들은 제 말을 옳게 듣고 당장 금식기도를 폐지하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방법으로 데모를 하였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이 가장 평범하고도 기본이 되는 사실을 잊을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하여 기도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의 기도의 대상이 오직 하나님 한 분 뿐 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주기도문을 통하여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시라고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은 우리의 왕이시고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을 왕과 주인으로 인식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신하와 종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정확하고 완벽한 하나님 인식과 자기 인식이 됩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우리의 왕과 주인이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신하와 종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는 우리의 아버지시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을 왕으로 우리 자신을 당신의 신하로 여기며 사는 것을 옳게 여기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식하고 자신을 하나님의 종으로 여기며 사는 것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당신과 우리의 관계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식하고 부르는 것을 가장 좋아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부모를 잘 만나는 것처럼 중요한 복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부모를 잘 못 만나 놓으면 평생 고생을 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아이에게 끼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그러나 반대로 좋은 부모와 훌륭한 부모를 만난 아이들을 참으로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사람은 부모를 잘 만나야 합니다. 부모를 잘 만나는 것이 복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를 믿는 것이 왜 복이 되는지 아십니까? 예수를 믿으면서 받는 최고의 복중에 하나가 무엇인지 여러분 아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만나는 복입니다. 세상에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로 만나는 것보다 더 큰 복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 당시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은 파격 중에 파격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불경스럽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다가도 하나님이라는 글씨를 읽어야만 할 때가 되면 소리를 내지 않고 넘어갔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위대하신 분이었고 대단하신 분이었습니다. 감히 하나님이라는 소리까지도 내지 못할 만큼 엄위하신 분이었습니다.

그것은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세상의 임금과 왕 앞에만 나가도 우리는 아마 입이 얼어 붙어서 말을 하라고 하여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함께 식사를 하자고 하면 아마 긴장이 되어서 음식이 어디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것이며 음식의 맛을 느끼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는 임금이 우리를 당신의 자녀처럼 대해 주시고 자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하였다면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 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시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바로 그와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이상의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얼마나 대단한 축복이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으로 자신 아버지를 삼은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서는 그것을 자녀의 권세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로 삼은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게 될 것이고 그것이 바로 세상에서는 얻을 수 없는 놀라운 축복이 될 것입니다.

다윗은 우리가 잘 아는 시편 23편에서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라고 고백한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 즉 자신의 아버지가 되어 주셨기 때문에 자신이 받고 누린 복을 자신의 시편 23편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윗의 시편 23편을 통하여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로 섬기는 사람이 받는 복이 어떠한 것인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어떤 것인가를 알아 낼 수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가 되시고 아버지가 되어 주시기 때문에 우선 자신의 삶에는 조금도 부족한 것이 없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자신을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 주셨다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를 부족함이 없는 삶으로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의 삶으로 인도하십니다.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의 자녀를 모든 것이 부족한 거칠고 물 없는 사막으로 인도하려는 아버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여 원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녀를 그와 같은 상황으로 인도하는 부모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당신의 자녀를 당신이 원치 않는 그런 곳으로 절대로 인도하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의 자녀는 누구나 다윗과 같이 부족함이 없는 삶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와 같은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만난 사람이 받는 복이며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권세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과연 다윗의 삶이 부족함이 없는 삶이었는가 언제나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와 같은 삶이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쉽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에 다윗처럼 험난한 인생을 산 사람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는 고사하고 그는 거의 평생을 전장과 광야에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사울에게 쫓기고 나중에는 아들에게까지 쫓기는 피곤하고 고단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결국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 주셨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아야만 했던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훈련과 연단이고 둘째는 죄로 인한 심판이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 두 가지 이유 때문에 험난한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이와 같은 과정과 삶을 거치지 않고 사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하나님은 우리를 이 모든 역경과 고난으로부터 우리를 건져 주십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를 훈련시키시고 연단 시키시기 위하여 전장과 광야로 우리를 내 모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듯이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와 같은 역경과 고난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과정을 통하여 우리를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를 좁은 길과 십자가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과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좁은 길과 십자가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좁은 길과 십자가의 길을 통하여 우리를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범죄 함으로 당하는 심판으로서의 고난과 역경으로부터 우리를 결국은 구원해 주십니다.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죄의 결박을 푸시어 결국은 우리를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이런 저런 이유로 좁은 길과 십자가의 길 그리고 역경과 고난의 길을 걸을 수 있으나 그것은 과정이요 결국이 아니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 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들은 다윗과 같이 부족함이 없는 삶,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와 같은 삶의 축복을 결국 받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해 주신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끊임없이 우리의 잠자는 영혼을 일깨워 주시고 죄로 말미암아 죽어가는 영혼도 소생시켜 주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당신의 이름과 명예를 걸고 우리를 언제나 옳고 바르고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부족한 저도 사랑하는 제 아이들을 끊임없이 정신 차리게 깨우치고 정말 최선을 다하여 바른 길과 좋은 길을 열어 주려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여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제가 아이들의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노력한다는 표현을 썼는데 사실은 그것은 잘못된 말입니다. 자식을 위하여 노력하는 부모는 엄밀히 말하면 없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하여 노력하는 것은 다른 것을 위하여 노력하는 것과 다릅니다. 다른 것은 정말 노력하여야 하는데 자식을 위한 노력은 특별한 노력이 사실 필요 없습니다. 그것은 자동으로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하여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자동으로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언제나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켜 주시고 우리를 언제나 바른 길로 의의 길로 인도해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본능입니다. 자동적으로 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동으로 우리를 깨우치시고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본능이십니다.

살다보면 힘든 일을 만날 수도 있고 어려운 일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위험한 일을 만날 수 도 있습니다. 다윗은 그것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고 표현을 하였습니다.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만은 다윗은 실제로 그와 같은 삶을 많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그와 같은 일을 당할 때 해 받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까닭은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와 아버지가 되어 주셔서 당신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자신을 안위해 주실 줄로 믿었기 때문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목자는 양을 지키고 부모는 자식을 지킵니다. 부모와 목자는 능력이 부족하여 자식을 잘 그리고 바르게 지키려고 하는 마음은 있으나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경우도 없지 않아 많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는 그런 무능함과 부족함이 없으십니다. 하늘에 계시는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우리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난다고 하여도 능히 당신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 내실 수 있으십니다. 다윗은 그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대로 되었습니다. 여러분들도 다윗과 같이 이 놀라운 사실을 믿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다윗과 같이 그 믿음으로 승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땅의 부모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어합니다. 살이라도 베어주고 싶고 피라도 쏟아 부어 주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마음 뿐 실제로 그렇게 하지는 못합니다. 세상의 어떤 부모도 자식의 삶을 충만히 채워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수 있으십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채우시기를 원하시며 또 실제로 그렇게 하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 때문에 자신의 잔이 언제나 넘쳤다 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언제나 자신에게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풀어주시고 머리에 기름을 발라 주심으로 자신의 삶은 언제나 넘치는 삶이었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신데 어떻게 그것이 당연한 일이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둔 사람이 원수 앞에서 망신을 당하며 채워지지 않는 빈잔의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이치에 맞지 않고 논리에 맞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다윗은 선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평생을 함께 하실 것이고 자신도 영원토록 하나님의 집에 거할 것이라고 고백하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삼은 사람이 받는 최고의 복은 구원의 복입니다. 구원이란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집에서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사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녀의 권세인 것입니다. 자녀는 때때로 실수합니다. 잘못합니다. 죄를 지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녀는 그것과 상관없이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집에서 삽니다.

우리 자녀보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도 세상에는 많이 있고 성격과 성품이 좋은 아이도 세상에는 얼마든지 많이 있습니다. 그래도 저는 제 아이와 함께 삽니다. 다른 아이들이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아무리 성격이 좋고 성품이 좋아도 저는 제 아이하고만 삽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은 실력 때문도 아니고 성품 때문도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녀의 권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사는 구원의 축복은 자녀의 권세입니다. 자녀만이 누릴 수 있는 권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귀한 복음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고 거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거부하시는 법이 없으십니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하였다면 그것은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거부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거부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영접하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자녀가 아니라고 거부하시는 법을 없습니다. 절대로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거부하고 부인하지 않는 한 하나님은 그 어떤 경우에도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우리는 그 어떤 경우에도 그분의 자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는 실족하지 않습니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납니다. 어떤 경우에도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실족하고 망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소리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주기도문의 첫 번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을 절대로 거부하지 않으십니다. 아니 못하십니다. 그가 어떤 사람이라도 상관없습니다. 그가 지존파라도 상관없고 라합 이라도 상관없고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라도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나는 너 같은 자식을 둔 적이 없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누구든지 진심으로 그리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 그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축복으로 누릴 수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자녀가 됨으로 받았다고 간증하고 고백한 시편 23편의 축복을 누구나 다 받을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세요. 이것저것 길게 기도하지 않아도 됩니다. 어지간히 힘들 땐 이런 저런 기도가 나오지만 정말 다급하고 힘이 들면 기도도 말도 나오지 않는 법입니다. 그때 구태여 이런 저런 말로 기도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럴 땐 그냥 엎드리어 하나님을 부르기만 하시면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기만 하시면 됩니다.

그것으로 기도는 완벽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순간 기도는 완성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 맞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베푸시는 본능적인 축복을 받게 될 줄 믿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 한 마디에 완전하고 완벽한 기도가 이미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다윗이 받았던 그 놀라운 축복을 여러분들도 다 받으시고 다윗과 같은 간증을 하면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