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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기도문 (마 06: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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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은 구원입니다. 구원이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 중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기도는 구원에 관한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옵소서'라는 기도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많은 사람들은 구원에 관심이 많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나라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의 관심은 세상에 있습니다. 물론 세상도 중요합니다. 세상도 없으면 우리에게 상당한 불편과 어려움을 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우리에게 궁극적인 구원을 주지 못합니다.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행복을 주지 못합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만족을 주지 못하는 까닭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세상보다 크고 귀하게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온 세상보다 크고 귀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세상에서 만족을 얻을 수 없습니다.

솔로몬은 세상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보통 많은 사람들이 욕심내고 부러워하는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전도서에서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든 강물은 연하여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한다라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세상의 부귀와 영화와 온갖 쾌락들이 마치 강물이 바다로 흘러 오듯 솔로몬에게로 흘러 들어 왔지만 그것으로 자신의 삶이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솔로몬은 그와 같은 경험을 통하여 세상의 것들로 구원을 얻고 만족하고 행복한 삶을 살려고 하는 것이 헛된 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고백을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기쁨과 평안 그리고 사랑과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적인 것에는 그와 같은 것들이 없습니다. 재미와 편안함은 있으나 기쁨과 평안은 없습니다. 사랑은 성적인 문란과 쾌락으로 변질되어가고 있고 보다 중요한 것은 세상적인 것에는 생명이 없어서 점점 세상은 말세 즉 죽음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것에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는 돈과 권력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돈과 권력으로 으로 기쁨과 평안을 살수도 없고 돈과 권력으로 진정한 사랑을 얻을 수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돈과 권력으로 생명을 얻을 수도 없습니다. 돈과 권력은 어느 정도 힘이 있어서 날아가는 새를 떨어트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떨어진 새를 날아가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돈과 권력 즉 세상은 죽고 망하게 하는 능력은 있으나 구원과 생명의 능력이 없습니다. 그것이 세상인 것입니다.

인간 최대의 어리석음과 불행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에게 만족과 구원을 주지 못하는 세상에 욕심을 부리며 산다는 것입니다. 그 끝없고 헛된 욕심 때문에 사람들은 누구나 다 말로 다할 수 없는 피곤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만족 없고 구원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그것 때문에 죄를 짓고 그 죄 때문에 눈물과 근심과 걱정과 아픔이 끊이지 않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쓸데없는 헛된 세상에 대한 끝도 없는 욕심이 바로 원죄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입니다. 세상은 오늘날의 선악과입니다.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지만 거기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먹어도 먹어도 배부름이 없고 마셔도 마셔도 시원함이 없습니다.

구원은, 행복한 삶은 이와 같은 사실을 깨닫고 헛되고 쓸데없는 세상에 대한 욕심을 버리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세상에 대한 욕심을 끊고 버리지 못하는 한 절대로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세상 나라에 대한 욕심을 버리는 것만큼 하나님 나라가 커집니다. 세상 나라에 대한 욕심이 크면 그만큼 하나님 나라가 우리의 삶 속에서 작아지게 되고 세상 나라에 대한 욕심이 작아지면 그만큼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삶 속에서 커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 즉 구원의 삶은 우리가 얼마나 세상에 대한 욕심을 버릴 수 있느냐에 달려있습니다.

불교도 우리에게 세상 욕심을 버리는 것의 중요함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세상의 욕심을 버리는 것에 대하여 우리 기독교와 매우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불교는 세상과 세상의 욕심을 피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속세를 떠나 산 속으로 들어갑니다. 아예 세상과 인연을 끊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세상을 떠남으로 세상을 버리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세상을 바르게 쓰고 사용함으로 세상을 버리는 종교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리자면 물질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는 물질에 대한 욕심을 버리기 위하여 물질 자체를 부정하고 버리는 종교가 아닙니다. 물질 자체를 버리고 떠나면 아예 물질에 대한 욕심을 부릴 수 없게 되겠지만 물질을 통하여 할 수 있는 선하고 귀한 일까지 할 수 없게 되는 폐단이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그럼으로 물질 자체를 부정하거나 버리는 것이 아니라 물질에 대한 욕심만 버리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물질은 긍정하고 물질에 대한 욕심만 부정하게 되면 물질을 통하여 할 수 있는 많은 선하고 귀한 일들을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우리 기독교는 엄밀히 이야기하면 세상과 물질을 버리는 것을 가르치는 종교가 아니라 물질과 세상을 바르게 쓰는 것을 가르치는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물질과 세상을 바르게 쓰는 것을 통하여 물질과 세상을 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기독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물질을 축복이라 하지 않고 은사라고 부릅니다. 물질을 축복이 아닌 은사로 이해한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축복은 예수를 믿으면 누구나 다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사는 그렇지 않습니다. 은사는 예수를 믿는다고 누구나 다 받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축복입니다. 때문에 구원은 예수르 믿으면 누구나 다 받습니다. 한 사람도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방언은 은사입니다. 때문에 예수를 믿는다고 누구나 다 방언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물질은 축복이 아니라 은사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는다고 누구나 다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질이 은사가 아니고 축복이라면 예수를 믿으면 누구나 다 부자가 되고 믿지 않으면 누구나 다 가난뱅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것과 부자가 되는 것은 직접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물질이 축복이 아니라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은사는 쓰면 늘어나고 아끼면 줄어드는 특성이 있습니다. 세상과 물질은 축복이 아니라 은사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쓰지 않고 아끼면 줄어들거나 부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쓰고 사용하면 세상과 물질은 점점 더 커지고 커질 뿐 만 아니라 깨끗해 질 것입니다.

이 땅에 살면서도 천국을 사는 것과 같은 구원의 삶을 살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의 마음속에 원죄로 자리잡고 있는 쓸데없는 세상에 대한 욕심을 버리는 것부터 훈련하고 연습하여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욕심을 버리는 것만큼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대한 욕심을 부리는 것만큼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밀려나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이 쓸데없는 세상적인 욕심을 버리게 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훈련을 시키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안식일과 희년의 법 그리고 십일조와 구제의 법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 욕심에 눈 어두워 쉬지 않고 일하는 것을 막으시기 위하여 안식의 법을 정하여 주셨으며 세상이 궁극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희년의 법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소득의 십분의 일을 떼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과 밭의 네 귀퉁이를 남겨두어 가난한 이웃과 함께 나누는 삶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와 같은 법과 훈련을 회피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와 같은 법들을 구약의 법이라고 이야기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와 같은 법과 훈련은 지금 우리들에게도 얼마나 유효한 것인지 모릅니다.

정직한 십일조 생활을 하시기를 권합니다. 정직한 십일조 생활은 세상과 물질에 대한 원죄적인 욕심을 버리게 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훈련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십일조 생활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세상과 물질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정직한 십일조 생활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죽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모르나 살아있는 동안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축복을 누리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살아서 누리지 못한 천국을 어떻게 죽어서 들어갈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죽음은 세상의 모든 것을 떠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사람은 십일조를 한 사람과 하지 못한 사람을 불문하고 세상적인 욕심을 죽음을 통하여 완전히 떠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일조 생활과 훈련을 통하여 이 땅에서도 세상과 물질에 대한 욕심을 컨트롤하는 사람은 죽어서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도 구원의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안식의 법을 지키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에 대한 욕심 때문에 일주일 내내 쉬지 않고 살아가게 되면 혹 세상적으로 성공하고 부자가 될 수는 있을는지 몰라도 세상으로부터 자유 하는 삶을 살수는 없습니다. 엿새 동안은 힘써 일하지만 일주일에 하루는 세상 욕심 버리고 하나님께 예배하며 쉬실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떤 분들은 주일에 문을 닫고 쉬면 하나님께서 토요일과 월요일에 손님을 더 많이 보내 주신다 라고도 이야기합니다. 물론 얼마든지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습니다. 주일날 문을 닫으면 보통의 경우 손해를 봅니다. 손해를 보면서도 주일을 지키는 것을 통하여 우리는 세상에 대하여 성실하면서도 얽매이지 않는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할 수 있는 대로 희년의 법도 지키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이 너무나도 성경적으로 살기 어려운 세상이 되어 버렸지만 때문에 구약에 있는 그대로 희년의 삶을 살기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지만 생각만 하면 얼마든지 희년의 정신을 지키며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재산의 사회환원이라는 개념입니다. 살아있는 동안에도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세상에 환원 시켜야만 합니다. 그리고 죽어 세상을 떠날 때 유산을 자손들에게 남기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드림으로 희년의 정신과 삶을 실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목사입니다. 그러나 목사이기 이전에 원죄를 지니고 있는 사람입니다. 때문에 저도 세상에 대한 욕심을 버리는 것이 어렵습니다. 정직한 십일조 생활과 바른 구제 생활 그리고 안식과 희년의 삶을 실천한다는 것이 힘듭니다. 누구 못지 않게 이와 같은 부분에 열심히 노력하고 노력할 뿐만 아니라 교인들에게 설교하면서 살아왔지만 아직도 저는 이것이 힘듭니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힘쓰고 노력하고 기도할 것입니다. 죽을힘을 다하여 세상에 대한 욕심을 버리도록 애쓸 것입니다. 그래야만 다시 말해서 세상 욕심을 버려야만 그만큼 내 마음과 내 삶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부족하지만 그래도 예수를 믿기 때문에 어차피 죽으면 세상 욕심 버리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겠지만 죽어서만 가는 천국이 아니라 살아서도 천국을 사는 복을 받기 위하여 저는 세상을 떠나기 전 이 세상에서부터 정직한 십일조 생활과 구제생활 그리고 안식일과 희년의 법을 실천하는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의 삶을 누리고 싶습니다.

여러분 천국이 있습니다. 눈물도 근심도 걱정도 아픔도 없는 영원한 기쁨과 평안 그리고 사랑과 생명이 있는 천국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세상을 떠나야만 합니다. 세상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때문에 예수 믿고 구원을 얻은 사람들이 죽음으로 세상을 떠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은 세상을 떠남을 의미합니다. 죽음으로 세상을 떠나는 일이 없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물론 죽는다고 누구나 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지만 죽음으로 세상을 떠나지 않고는 누구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럼으로 구원을 얻은 사람에게 죽음은 화가 아니라 복입니다. 때문에 구원을 얻은 사람들에게 죽음은 축복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죽음으로만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죽기 이전에 마음으로 먼저 떠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에 대한 욕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연연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살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세상을 떠나면 이 세상에서도 천국을 살 수 있습니다.

세상에 미련을 두고 욕심을 두고 살면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을 명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힘이 들고 어려워도 포기하지 말고 조금씩 조금씩 세상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떠나는 훈련을 하세요. 그리하여 죽어서 갈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도 누리고 살아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우리 기독교는 세상을 부정하지 않지만 세상에 소망을 두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그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하늘에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죽은 후에도 영원히 살 수 있는 하늘이 있습니다. 그리고 죽어도 영원히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하늘이 있어서 우리는 죽음도 축복이라고 감사하지만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하늘에 소망을 두고 하늘을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욕심을 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에 소망과 소원을 두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세상 나라에 대한 욕심을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훈련하고 연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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