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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가난 짊어진 '낮은곳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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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하나님의 손에 쥐어진 몽당연필'에 비유했던 `마더 테레사' 수녀.

가난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하나로 어우러져 온 세상에 사랑의 메시지를 쓰고 또 쓴 테레사 수녀의 삶은 이제 하나의 전설이 됐다.

50년전인 1948년, 테레사가 인도 캘커타의 한 빈민굴에 쓰러져가는 가건물을 빌려 구호소를 차렸을 때, 이를 눈여겨 본 세상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 수녀를 알지, 촛불도 켤 줄 모르는 애숭이지.” 당시 카톨릭 캘커타교구 대주교는 테레사의 행위를 비웃었다. 빈자들을 향한 테레사의 첫 구원의 손길은 그를 잘아는 사람들에게는 `무모한 짓'으로 비쳐질 정도였다.

테레사는 오직 “가장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을 섬겨라”는 하나님의 계시를 되새기며 역경을 헤쳐나갈 뿐이었다. 캘커타의 빈민굴을 찾기 2년전 결핵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요양차 히말라야 산기슭의 다르질링 수녀원으로 가던중 열차 안에서 들은 `빈자 구원'의 하나님 말씀은 테레사의 유일한 의지처였다.

캘커타의 부유층과 인도의 다수교인 힌두교 보수파는 테레사의 행위에 대해 `개종을 노린 자선'이라며 따거운 눈초리를 보냈지만 테레사는 굴하지 않았다.

테레사는 캘커타 거리를 부지런히 헤짚고 다니면서 굶고 병들어 죽어가는 부랑아들을 닥치는 대로 데려다가 먹을 것을 주고 편안하게 영면하도록 도왔다. 힌두교도들을 위해서는 화장터를 세워 그들 방식의 장례식을 치러주는 등 종교를 초월해 오로지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데 헌신했다.

테레사의 자선은 그러나 이들에 대한 동정심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테레사는 “그들을 존경하고 그들에게서 무한히 배울 게 많기 때문에 오히려 베품을 받는 사람은 나 자신”이라고 말하곤 했다.

“나는 모든 인간에서 신을 본다. 내가 나환자의 상처를 씻을 때 그리스도를 돌보는 느낌을 갖는다. 어찌 아름다운 경험이 아닌가.” 74년의 한 인터뷰에서 테레사는 가난한 사람들을 성자로 대하는 마음을 이렇게 토로했다.

150㎝의 단신인 테레사는 온세상의 가난을 짊어지기에는 너무나 왜소하고, 자신의 말처럼 “고통의 바다에 떨어진 한방울의 구원”이었다. 그러나 테레사는 `빈자 구원'의 계시를 실천에 옮긴 지 반세기만에 전세계 120개국 600여 곳에 무려 4000여명의 `제2의 테레사'들을 남겼다. 테레사가 1950년 정식 발족시킨 `사랑의 선교회' 소속 수녀들과 63년 출범한 `사랑의 수사 선교회' 소속 수사들이 그들이다.

테레사는 79년 가난한 사람들의 이름으로 노벨평화상을 받고 그 상금마저 자선기금에 출연했다. 테레사는 낙태반대 등 보수적 가치를 열렬하게 옹호해 일부 여성운동가들로부터 비판을 받는 한편 출처가 의심스런 자선기금을 받았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빈민굴의 성자' 테레사는 그가 처음 캘커타의 슬럼가에 뛰어들 때 입은 이래 사랑의 선교회 수녀들의 제복이 된 `하얀 천에 푸른 띠가 있는 사리'와 함께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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