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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청렴결백한 기대승의 명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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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와 함께 조선시대 성리학의 대가인 고봉 기대승은 전남 광주 소고룡 소현골에서 태어났는데, 그는 어려서부터 새벽같이 일어나 천지의 맑음과 고요를 마음껏 호흡하며 정좌하여 독서에 열중하였다.

하루는 찾아오는 손님과 대화를 하였다. '식자를 넣어서 연귀를 하나를 지어보게나.'
고봉은 큰 소리로 대답하였다.
'배부르도록 먹기를 구하지 않는 것이 군자의 도이다.'
그는 높은 벼슬에도 오르지 못하지만 그의 학문은 가히 대단했다.
또한 그의 성품은 강직하고 청렴결백했으며 선비로서 자세를 잃지 않았다.
그가 고향을 향하던 46세의 나이에 병환으로 죽게 되었는데, 그가 죽은 후 그의 집안은 장례를 치를 돈이 없어서 사간원에서 임금께 청하여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하였다.

다음은 상소 내용의 일부이다.
'불행히도 병이 있어 고향으로 돌아가다가 중도에서 죽었사온데 집이 대대로 청빈하여 장사지낼 도리가 없사오니 청하옵건대 관에서 장례를 치르시어 이로써 나라에서 학자를 숭상하는 뜻을 보이시옵소서.'

요즈음 매스컴에 보도되는 많은 정치인들을 보면 참으로 한심하다.
그들은 눈앞에 보이는 재물에 눈이 어두워 그들의 얼굴과 가문의 명예를 헌신짝처럼 팔아 버렸다.
조선시대 선비를 대표하는 기대승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하였고 살아서보다 죽어서 그의 명성은 더욱 길이 빛나고 있다.

우리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죽어서 더욱 큰 은총을 받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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