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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의 특권1 (요 01: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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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간 나흘 동안 생생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전도대회 때 귀한 강사를 세우셔서 시간, 시간 감동으로 우리 마음에 역사해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했습니다.

그러면 예수 믿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고 말합니다. 복 받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기를 '아브라함아, 내가 너에게 복을 주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창 12:2)고 무수히 많은 고비 때마다 거듭거듭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복의 내용은 동양에서 말하는 오복(五福)이 아니라 시편 1편의 복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그런가하면 주께서 또 말씀하십니다. '너 복 있는 자여, 마음이 가난한 자! 너 복 있는 자여, 애통하는 자! 너 복 있는 자여, 화평케 하는 자! 너 복 있는 자여,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 복이 있나니'(마 5:3-10) 주께서 선포한 그 축복은 우리가 피상적으로 누리는 축복이 아니라 더 근원적인 축복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복의 측면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복 받는 사람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물질 축복도 주실 수 있고 건강의 축복도 주십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우리가 누릴 최후의 축복은 아닙니다. 또 예수 믿는 것은 선한 사람이 되는 것, 착한 일 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덕을 선전하기 위하여 우리를 부르셨다'(벧전 2:9)고,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인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마 5:16)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렇지만 어떤 경우에는 아직 완숙한 선을 이루지 못해서 계속 문제를 야기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환경적인 물질 축복이나 건강의 축복 주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를 조금 더 개조시켜서 착한 사람 만드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의 생애에 더 본질적인 변화를 일으키기를 원하십니다.

진정한 복-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것!
그 본질적인 변화는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내가 예수 믿었으면 그 분을 영접했으면 그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자녀 되었는가? 13절에 기록했습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13)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나아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증거가 무엇인가요? 그 분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믿으려고 그처럼 애를 썼는데 안믿어져요. 몸부림쳐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믿어지기 시작합니다. 그 분이 내 생애 속에 들어오셨습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느낌이 없다구요? 느낌은 우리를 올바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제 아버지, 어머니가 진짜 생부, 생모일까를 혼자 많이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런데 저만 그런 줄 알았더니 제 아들놈들이 언젠가 '정말 엄마, 아빠가 나를 낳았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제 아내가 하는 말이 '내가 데려와서 키울 수 있었으면 너같이 못생긴 놈 데려왔겠냐? 잘생기고 똑똑하고 속 안썩일 놈 골라왔지'라고 하니까 '맞다'고 그럽니다. 확실한 증거입니다. 우리 감정은 우리를 속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를 때, 호적 떼어보면 내가 누구 아들인 것이 확실해지는 것처럼 성경을 보니까 '영접하는 너, 하나님 그 이름을 믿는 너, 너는 하나님의 자녀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사실 이 본문은 늘 묵상하고 설교했던 성경본문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새생명 전도대회를 통해 교회 나온 분들을 위해서 이 말씀을 다시 묵상하면서 얼마나 마음에 감격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제가 보니까 여기 스승님도 계시고 어르신도 많이 계신데 죄송합니다. 제게 아픈 것과 쇠해지는 것 외에는 제 인생이 별 볼일 없더라구요. 이곳 나으면 저곳 고치고, 저곳 고치면 이곳이 또 아프고... 이렇게 쇠해지고 조용히 무너지는 인생인데 그렇게 생각하다가는 '무슨 소리야?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데. 하나님이 내 아버지인데.'라고 소리쳐 봅니다. 아버지라는 단어 속에 담긴 의미는 사랑 밖에 못하는 존재입니다. 어떤 때는 우리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되 아프게도 사랑합니다. 우리 하나님이 슬픈 방법으로도 사랑합니다. 사랑 밖에 못하는 아버지입니다. 내 신분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새 인생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누리는 자녀의 특권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이 권세를 특권이라는 말로 바꾸어도 됩니다. 같은 말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모든 것을 함께 누릴 특권을 가지고 인생을 삽니다. 요즘 신문에 많이 회자되는 정몽준씨, 그 사람 무슨 특별한 재능이 있다든지, 돈 열심히 벌었다든지 하는 기록은 못 봤는데 한국에서 손꼽히는 부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아버지가 정주영씨니까요. 이재용이라는 젊은 청년이 부자라고 신문에 납니다. 어떻게 부자 되었습니까? 자기 아버지가 이건희씨니까요. 간단하지 않아요? 대개 보면 의사 집안의 자녀들이 의사 잘 되고, 법관 집안의 자녀들이 법관 잘 되고, 교수 집안의 아들이 교수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모로부터 그 특권들을 같이 보면서 자라서 나도 모르는 사이 그것을 내 것으로 소유하게 됩니다. 그런가하면 아버지가 자애로운 아버지이면 그 인생은 시작할 때, 봄의 양지바른 곳에 뛰노는 아이들처럼 인생을 화사하게 느끼면서 출발합니다. 아버지가 엄격한 분이시면 인생의 질서를 알고 정리를 하고 인생을 삽니다. 어떤 아버지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그 생애가 달라지고 특권을 함께 누리고 삽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라고 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자녀의 특권-죄 사함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신 특권은 무엇입니까? 첫 번째 특권은 죄 용서받는 특권입니다. 인생을 불행케 만드는 것이 죄입니다. 죄가 없으면 인생은 담대해집니다. 어떤 사람이 장난으로 50군데 무작위로 전보를 치기를 '모든 것이 들통났다. 빨리 도망가라.' 그러니까 50명이 모두 어디로 숨었답니다. 죄가 없다면 '이것, 누가 장난질 하나보다' 그럴 텐데 늘 죄의식과 두려움으로 살다가 누가 쿡 찌르니까 그 밤에 집에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던 것입니다. 죄는 우리 인생을 두려움으로 살게 만들고 햇빛보다는 어둠 속에 숨어 살게 만듭니다. 그 죄가 가정에 들어가면 가정이 무너지고, 그 죄가 사회에 들어오면 사회가 모두 아파합니다. 요즘도 젊은 친구 하나가 거짓으로 돈 장난을 하니까 온 사회가 그 거짓의 죄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도산 안창호 선생님께서 '이완용이가 이 나라를 팔아먹은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거짓이 이 나라를 팔아먹었다'고 하신 말씀은 명언입니다. 대우가 무너진 것도 거짓 때문이고 현대가 흔들거리는 것도 거짓 때문입니다. 결코 거짓이 모아져서 진실이 되는 법이 없습니다. 죄는 늘 죄를 낳고 거짓은 늘 거짓을 낳습니다. 죄는 언제든지 인생을 불행케 만듭니다.

이 죄는 인생만 불행케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불행케 합니다. 아들 예수가 밤이 맞도록 기도합니다. 그 간절한 기도 때문에 땀방울이 이마에 맺히더니 기도가 깊어지는 그 밤에 땀방울이 변해서 핏방울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보이시리라'고 '네가 기도하면 내가 들어주겠다'고 약속했는데도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단 한가지의 기도를 듣지 않습니다.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물리쳐주시옵소서.' 밤이 맞는 기도였습니다. 목숨을 건 기도였습니다. 땀방울이 핏방울이 된 기도였습니다. 우리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이 할 수 없는 일이 있었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고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죄를 그냥 무효화할 수 없었단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두 팔을 스스로 묶으시면서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하고 외쳐대는 아들의 소리에 귀를 막고 외면하시면서 끝까지 아들을 죽게 하는 아픔을 친히 당하셨습니다. 죄가 있는 곳에 불행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그처럼 불행케했던 죄, 그 죄 문제를 예수님을 통해 십자가 위에서 모두 해결해주셨습니다. 죄는 두 가지로만 해결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그 죄의 값을 지불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죄 지은 사람에게 용서받든지 둘 중의 하나가 아니면 안됩니다. 그런데 십자가 위에서 내가 지은 죄 값을 주님께서 대신 치루셨고 그것을 보시고 화목 제물로 받으신 하나님께서는 나를 용서하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주께서 이 죄를 십자가에서 완전히 용서해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또 죄를 짓습니다. 그런 나를 향해서 하나님은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의 또 다른 모습이 있다면 그것은 심판주입니다. 우리 하나님만이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의 3대 주권을 신학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 주권은 하나님만이 창조합니다. 사람은 개조하고 발견할 뿐이지 창조하지 못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만 섭리하십니다. 온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사람은 모든 세상을 못 다스립니다. 우리나라 절대 권력자 대통령이었던 박정희씨가 자기 심복 중의 심복인 김재규를 못 다스렸습니다. 진정으로 다스리는 사람은 클린턴도 김대중 대통령도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만이 역사의 주인되십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만이 심판하십니다. 세상의 무수한 재판이 있습니다. 그 재판에 얼마나 많은 오심이 있는지 모릅니다. 정직한 법관들은 정말 사람이 사람을 재판할 능력이 있는가 하는 것을 늘 회의한다고 합니다. 하나님만이 최후의 재판장이십니다. 그 재판장 하나님이 세상 모든 사람을 만나줄 때가 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재판장이신 하나님을 만나리니...'(히 9:27) 이 말은 '심판이 있으리니'라는 말입니다. 모든 인생은 재판장이신 하나님을 만나야 됩니다. 그래서 내가 살았던 모든 삶을 내 입술로 고해야 됩니다.

그런데 재판장 되시는 우리 하나님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나에게 어떤 존재되십니까?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 분은 용서밖에 못하십니다. 어떻게 용서하십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할 때 우리 하나님은 용서해주십니다. 성경을 보겠습니다. 이사야 44장 22절입니다.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 도망간 아들에게, 회피한 아들에게 '내가 너를 구속했다. 다 용서했다. 돌아만 오라'고 강청하시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습니다. 시편 103편입니다.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시 103:11-13)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우리의 죄과를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멀리 옮기셨다고 했습니다. 언제 그렇게 해주신다고 약속하십니까? 요한일서 1장 9절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죄 용서의 특권을 가집니다. 그 곳에 머물기만 하면 그 불행의 원천인 죄에서 나를 구해주십니다. 자세히 내 삶을 살펴보십시오. 무엇이 나를 괴롭히고 있는가? 정말 가난인가? 제가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하루에 한끼만 먹으면서도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부족들도 만났습니다. 그런데 음식이 적기 때문에 불행하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어떤 부족은 옷을 하나도 걸치지 않고 삽니다. 우리가 볼 때, '야, 안됐다. 어떻게 저렇게 벌거벗고 사나?' 하는데 그 분들은 '아니, 이 복잡한 세상, 더운데 뭘 그렇게 많이 걸치고 사나?' 하더라구요. 제게 '당신 정말 답답하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나를 괴롭히는 진정한 문제는 죄입니다. 그런데 그 죄를 십자가 위에서 해결해주셨을 뿐 아니라 내가 지금도 짓고 있는 죄를 자백하면 용서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자식 때릴 때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의 입에서 이 말만 나오면 때리는 것을 중단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잘못했어요' 아니, 어떤 부모는 정답까지 가르쳐주며 때립니다. '야, 이놈아, 잘못했다고 좀 해라.' 죄 용서받는 이 놀라운 특권을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심판주입니다.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하나님의 자녀인 나에게는 아버지입니다. 내가 잘못했다고 구하면 언제나 용서해주시는 아버지입니다.

하나님 자녀의 특권-평화
두 번째로는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인 평화를 누립니다. 평화의 진짜 뜻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평화라는 단어의 뜻은 '올바른 관계' 입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가 아니라 바른 관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른 관계가 안되면 참 불편합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였습니다. 우리 반에 강심장인 친구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선생님이 숙제 내주면 절대로 숙제를 안 하는 친구입니다. 그래서 숙제 걷는다고 하면 종아리를 걷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친구가 제 짝이 되었습니다. 멀리서 볼 때는 이 친구가 선생님께 꾸지람 듣고 매맞는 것이 문제가 안되는 것 같아 보여 제가 대단하게 생각했던 친구입니다. 그런데 제 짝이 되어 가까이 보니까 '숙제'라는 말만 나오면 얼굴이 파르르 떨립니다. 선생님과 올바른 관계가 안되어 있습니다. 매맞는 것도 옆에서 보면 이 아이가 담대하게 아무 것도 아닌 듯이 매맞으면 제가 존경했을 텐데, 이 녀석이 맞을 때마다 파르르 떠니까 참 안됐고, 제 마음도 아팠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이 친구를 꼬셔서 저희 집에 데려갔습니다. '내 숙제 좀 도와달라'고 청해놓고 새 노트에 숙제를 하도록 했습니다. 다 끝난 후에 '내일 이것 가지고 가라.'고 주었습니다. 처음으로 같이 숙제를 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옆에 앉아서 얼마나 콧노래를 부르는지요? 그런데 문제는 수업이 끝날 때까지 선생님이 점검을 안했어요. 그 친구가 나중에는 울더라구요. 그것이 6.25 전 이야기이고 제가 그 다음에 고향을 떠났으니까 그 이후에 그 친구를 한번도 못 봤는데 에 나간다면 그 친구를 꼭 한번 만나고 싶습니다. 하여튼 올바른 관계가 아니니까 인생은 떱니다.

초등학교에서 담임 선생님과 바른 관계가 아니어도 그처럼 떠는데 이 우주에서 만왕의 왕이고 만주의 주이신 창조주 우리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아닐 때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성경은 '악인에게 평화가 없다'고 말합니다. 세상에 평화가 없는 가장 큰 이유는 그 분과 바른 관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돈으로 평화를 못삽니다. 지위로 평화를 얻지 못합니다. 공부로도 평화를 못얻습니다. 하나님과 원수된 분들, 주께서 화목제물이 되어주십니다. 하나님과 나와는 전혀 만날 수 없는데 그 분이 화목제물 되셔서 모든 하나님의 진노를 내 대신 온 몸에 다 받으셔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게 해주셨습니다. 그 다음부터 갖는 첫 번째 예수 믿는 느낌은 '평화로다'입니다. 제가 예수 믿고 나서 가장 놀랐던 것은 '세상에 이런 평화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는데 이런 평화가 있을 수 있느냐?' 이 평화는 화목 제물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만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주께서 주신 평화는 어떤 평화라구요?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않은 평화입니다. 그 평화를 가진 사람들은 근심도 두려움도 내어쫓는 평화라고 말합니다. 어두운 밤 그 어둠을 해결하기 위해서 몽둥이를 아무리 휘둘러도 어둠이 도망가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어둠이 물러가나요? 성냥불 하나 켜면 어둠이 사라집니다. 늘 불안하지요? 근심이 있지요? 문제가 무엇입니까? 해결책이 무엇입니까? 평화예요. 어둠은 오직 빛만이 해결합니다. 근심, 걱정의 정답이 주의 평화입니다.

'내가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 되었는데 근심, 걱정, 염려된 문제는 왜 내게 떠나지 않는가?' 이렇게 질문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빌립보서 4장 6,7절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염려, 근심, 걱정거리가 예수 믿는다고 없어지는 것 아닙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되는가?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감격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걱정거리를 사라지게 하는 것으로 끝내시지 않습니다. 문제 하나가 해결되면 다음에 또 문제가 옵니다. 걱정거리가 지나가면 다시 걱정거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이 문제와 걱정거리를 해결해주시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으로 내 마음을 지켜주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최고의 관심은 문제가 아닙니다. 내 소유가 아닙니다. 환경이 아닙니다. '나'입니다. 나를 사랑하십니다. 내 마음 상태를 변하도록 하신 하나님은 감싸주십니다. 안아주십니다. 문제 해결되는 인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어떤 문제 속에서도 빼앗을 수 없는 평화로 채워주십니다.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않은 평화로 내 심령을 붙잡아주십니다. 우리 하나님의 최대, 최고의 관심은 내 자신이고 내 마음입니다. 환경이 아닙니다. 소유가 아닙니다. 여건이 아닙니다.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그 고통과 문제를 우리 주님 앞에 감사함으로 아뢰기 시작해보십시오. 놀라운 일입니다. 이 재미로 기도하는지 모릅니다. 자식들 문제로 몹시 고통을 받을 때가 있었습니다. 새벽 3시도 못되어 일어나서 6,7시까지 무릎을 꿇습니다. 그러면 주께서 마음에 강처럼 넘치는 평화로 채워주십니다. 그리고 그 다음, 문제를 해결해주시기 시작하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당하는 문제를 풀어주시는 하나님입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내 생애 속에 평강으로 채우시는 하나님입니다. 얕은 물가에서 땅 짚고 헤엄치는 인생을 만들지 않고 깊은 태평양 한 복판에서 유유자적 수영하게 하시는, 문제 속에서 문제없이 수영하게 만드시고 용기와 소망을 베푸시는 평화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 두 가지를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다음 주에도 계속 하나님의 자녀에게 어떤 특권이 있는가를 확인해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이 특권과 축복을 놓치고 사는 부분이 없는가를 다시 점검하십시오. 그리고 처음 믿는 여러분들이여, 이 특권이 내게 주어졌습니다. 내가 죄 때문에 고민하십니까? 주님 앞에 나가십시오. 고하십시오. 자백하시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십니다. 그리고 모든 불의에서 나를 깨끗케 해주십니다. 그것뿐만 아닙니다. 문제는 내게 산처럼 짓누르고 있습니다. 그것이 죄는 아닙니다. 근심거리고 걱정거리입니다. 그 문제를 주님 앞에 고하기 시작하자 하나님께서는 내 마음을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으로 먼저 지켜주십니다. 여기서부터 내 인생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게 만드는 축복을 주십니다. 그렇기에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이 놀라는 것은 '저 사람도 똑같이 나처럼 무너져야 되는데 어떻게 저런 평화를 가지고 사는가?'하는 것입니다. 제가 우리 송명희 시인에게 놀라는 것은 도무지 인간적으로는 그가 평화를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의 심령에서 넘치는 평화를 만납니다. 이것은 저 뿐만 아니라 우리 송명희를 만나본 모든 사람의 똑같은 감정입니다. 도무지 그럴 수 없는데 그 자매는 그것을 가지고 있단 말이예요.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강이 지배하는 삶, 하나님 자녀의 특권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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