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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지막 기회 (눅 1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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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여행을 해보면 이런 현상을 봅니다. 자원이 많은 자연부국 사람들이 게을러서 몹시 어렵게 사는 것을 봅니다. 이렇게 풍성한 자본 가지고도 못사는 것이 기적이다 싶은 나라들을 더러 봅니다. 그런가하면 자원이 없기 때문에 열심히 일해서 잘 사는 나라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나라가 일본이고, 싱가폴이고, 대만입니다. 정말 자원이 없기 때문에 이를 악물고 열심히 일해서 풍요를 누리고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에게도 부족한 것이 있을 때에 그것이 추진력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렸을 때 몹시 가난했기 때문에 이를 악물고 자수성가한 사람들, 사회적으로 늘 열등감 갖는 환경이었기 때문에 이를 악물고 고시에 패스해서 상류사회에 진입한 사람들의 숫자가 부지기수로 많습니다. 그 중에 자기의 잘못 없이 노력해도 평생 고쳐지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면 신장의 문제입니다. 키가 작은 것은 교정 불능입니다. 그런데 보면 키가 작은 약점 때문에 인생을 크게 사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역사상 키 작은 분들이 큰 역사를 만드는 경우를 허다히 봅니다. 나폴레옹, 박정희 대통령, 그리고 제가 참 존경하는 김용기 장로님... 다 키가 작은 분들이십니다. 또 한국의 성자 손양원 목사님을 보면 세 번 놀란다고 합니다. 너무 작아서 놀라고, 두 번째는 목소리가 얼마나 우렁차든지 놀라고 세 번째로는 심령을 울리는 그 설교에 감동해서 놀란다고 합니다. 키 작은 열등감, 이것이 삶의 추진력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또 반대로 말하면 그래서 키 큰 사람은 싱겁습니다. 또 열등감 문제를 따지면 괴테가 한 말인데, '역사상 큰 일 한 사람 쳐놓고 장자는 예수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장자는 부모 사랑 많이 받습니다. 그런데 둘째만 되어도 사실 서럽습니다. 제가 장자니까 자신있게 폄하해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도 별 볼일 없는 인생입니다. 둘째들은 형에게 빼앗긴 그 사랑을 되찾기 위해서 더 열심히 삽니다. 그 열등감이 추진력이 되어서 인생을 건강하고 복되게 사는 경우를 참 많이 봅니다. 그런고로 열등감은 어떤 의미로 보면 삶에 있어 놀라운 축복의 통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여기 성경에 키 작은 한 사람, 삭개오를 여러분에게 소개하겠습니다. 그는 작은 키와 또 사회적인 신분 낮은 것을 돈으로 보상하기로 작정했습니다. 자기 키 보다 더 높이 돈을 쌓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당시의 사람들이 매국노라고 멸시하는 세리가 되었습니다. 당시의 세리는 오늘날의 세무 공무원과는 다른 모습입니다. 원래 거대한 제국을 통치했던 로마는 각 총독 관할청마다 일정 세금을 부과시켰습니다. 그러면 그 총독은 자기가 할당받은 것에다 30% 이상을 더 붙여서 세금을 부과합니다. 그러면 할당받은 세리장들은 거기다가 50%를 더 붙여서 부하직원 세리들에게 할당량을 주었습니다. 그러면 세리들은 거기다가 30%를 더 붙여서 백성들에게 세금을 징수했기 때문에 식민지의 고통에 가중된 세금 늑탈은 로마 전역의 고통이 되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민족심이 강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세리를 몹시 싫어했습니다. 탈무드에도 미워해도 괜찮을 사람들을 제일 처음에는 살인자, 둘째로는 강도라고 하면서 그것 보다 더 미워해도 괜찮은 대상을 세리라고 기록했습니다. 뱀하고 세리하고 만나면 누구를 먼저 죽여야 되는가 하는 이야기도 있는데, 세리라고 탈무드에 써놓았습니다. 이렇게 옛날의 기록을 보면 누구든지 그 자리에 간다는 것은 사회적인 존경심을 받지 못할 것을 각오할 뿐 아니라 자기 평생에 멸시가 뒤따른다는 것을 각오하고 그 직책을 수행한 것입니다.

그는 열심히 일해서 여리고의 세리장이 되었습니다. 여리고는 지리적으로 보면 남쪽의 이집트, 이디오피아, 수단 등지에서 거대한 문물들이 올라와 한없는 사막인 가자 지방을 통과해서 네게브 사막을 지나서 시내와 강이 흐르고 마실 물을 처음 만나는 장소가 요단강 하단, 사해 남쪽에 있는 여리고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리고를 큰 오아시스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북쪽에서 시리아, 페르시아, 유럽이나 인도와 중국에서 많은 문물들이 아프리카로 내려오다가 그 물건들이 헐몬산을 지나서 헤브론 광야를 건너 이집트로 가는 길목에 있는 그 오아시스를 만났습니다. 거기서 어떤 사람은 서로 물물교환하고 흩어졌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가고자 하는 곳까지 가서 장사 한 다음에 다시 그곳을 들렸습니다. 그렇게 돈이 도는 곳이었기 때문에 여리고는 전 이스라엘에서 가장 중요한 통로로, 재산 증식에 있어서 가장 번성한 지역으로 손꼽혔습니다. 전 이스라엘에서 가장 돈 목을 잘 만지는 여리고의 세리장이 되었으니까 그가 얼마나 열심히 일했고, 얼마나 악랄했겠어요. 그는 남이 어떻게 생각하건 상관없이 '내 키 작은 것을 반드시 보상하리라. 너희들이 나를 멸시해? 너희들 내가 놀라게 해주겠다. 너희들에게 억지로라도 존경을 받아내겠다. 내가 돈으로 너희를 무릎 꿇리겠다.'하고 열심히 노력해서 세리장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의 마음 한구석에 가지면 가질수록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가져보면 별 것 아닌 것이 참 많지 않습니까?

남서울교회 개척했을 당시 제가 6 개월마다 한번씩 전셋집을 옮겨 다녔습니다. 그 때는 부동산들이 복비를 받기 위해서 6개월마다 돌렸어요. 어떤 때는 집을 나가야 되는데, 들어갈 집이 없으니까 한달 반 동안 짐을 친구 집에 맡겨놓고 우리 네 가족이 이 집 저 집 돌아다닐 때도 있었습니다. 집만 있으면 살 것 같더라구요. 그랬는데 아파트 22평 짜리 하나를 사가지고 들어가니까 첫날에는 무척 기분이 좋더라구요. 사흘 지나니까 화장실 한 개만 더 있으면 좋겠다 싶어요. 또 '내 평생에 자동차를 몰아볼 수 있을까? 자가용이라는 것을 가져볼 수 있을까?' 생각하며 자랐습니다. 사실 제가 부자집 아들입니다. 그렇지만 제가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자동차를 제 이름으로 등기해서 타니까 한번 기분 좋고 끝입니다. 그 다음에는 이 차 보다는 BMW 같은 차가 좋지 않겠나 생각이 들어요. 갖기 전에는 목마름이 심하지만 가져보면 별 것 아닌 경우가 참 많습니다.

이 사람은 그 호기, 열등감을 추진력으로 해서 갖고 싶은 것을 가졌습니다. 그렇지만 그 마음속에 뻥 뚫린, 채워질 수 없는 목마름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당시 가장 큰 이야기거리였던 예수라는 사람의 소리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 분이 행했던 기적들, 병자들을 찾아갔던 깊은 보살핌, 사람들이 하찮게 여기는 현장마다 찾아가셔서 친수로 어루만지며 치료해주신 많은 사건들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그 분의 입에서 펼쳐지는 메시지는 마음을 감동시켰을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 하여튼 자기가 가져보니까 그것만 있으면 될 것 같았는데, 천국이 아니더란 말이예요. 그런데 자기가 그처럼 노력하고 애썼어도 못 얻었는데 그 분의 말씀에서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합니다. 아니, 자기는 호령하고 눈을 부리고 살아도 인생을 못산다고 생각했는데, '너 우는 자여 복이 있다'고 합니다. 도무지 말이 안되는 것 같지만 자기가 가져보니까 별 것 아닌 것을 알고 그 말씀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집니다. 그랬는데 어느 날 예수가 여리고를 지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만나기 위해서 좇아갔습니다. '그렇게 말하시는 분은 어떤 분이실까? 그런 행동하시는 분은 어떤 분이실까?' 늘 사람에게 멸시를 당해봤기 때문에 멸시의 아픔이 얼마나 큰 줄 아는 이 삭개오는 멸시받는 현장, 현장마다 그처럼 사랑으로 찾아가신 그 분이 어떤 분이실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나가는 예수의 행렬을 좇아갔지만 예수 주변에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사람의 물결이 가로막습니다. 키가 작은 자기로서는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앞으로 좇아갑니다. 예수가 가고 있는 그 길 방향 앞에 큰 뽕나무 하나가 서있는 것을 보고 그는 그 뽕나무를 붙잡고 올라갑니다. 그는 호기심의 사람이었습니다. 그 호기심이 예수에게 관심을 갖게 했고 그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그는 결단했습니다. 그는 계속 노력합니다. 집념의 사람입니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은 꼭 보고야 말리라. 누가 말하든지 상관없이, 누가 조롱하든지 상관없이...' 여러분, 돈 많은 그 사람은 많은 미움을 받았을 것입니다. 아니, 돈을 벌어도 보통 돈 버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는 세리장으로 돈 벌었기 때문에 얼마나 멸시가 많았겠습니까? 또 그 사람의 최대 약점은 키 작음입니다. 그 키 작은 것이 적나라하게 만인 앞에 드러날텐데 그 나무에 올라가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고 다른 사람이 뭐라고 말하든지 상관하지 않고 집념을 가지고 나무에 올라갔습니다.

나무에 올라가서 예수 오는 행렬을 바라보고 있는데 우리 주께서 길을 지나가고 계십니다. 예수는 자기를 향해서 목마른 심령으로 쳐다보고 있는 한 사람의 눈망울을 쳐다보고 멈추셨습니다. 주변에 사람들이 밀려들지만 아무도 모르게 숨어서 믿음으로 자기 옷가를 만진 그 여인을 아셨던 주님이십니다. 그 주님은 우리가 부르는 복음성가에도 있듯이 '우리의 신음마저도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나를 향해서 나 보다 더 깊은 관심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무엇보다도 목마른 심정을 향해서 깊은 사랑을 가지신 분입니다. 자기를 향해서 목마른 가슴으로 나무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멸시받은 한 사람, 그 심령을 주께서 보신 것입니다. 가시다가 주님은 멈추셨습니다. 주님이 지금 무얼하고 계십니까? 이 다음 장면에서 주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다음 겟세마네 동산에 가셨다가 며칠 후에 십자가에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한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엄청난 큰 일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빛이 있으라 명령하매 빛이 생겼던 그 일 보다 더 큰 일입니다. 온 세상에 가장 큰 일을 하러 오신 그 분께서 당신을 향해서 구원을 사모하여 열망을 가지고 나온 한 사람을 보시고 스톱하셨다는 말입니다. 큰 인물 가운데 '나는 너무 큰 일을 하니까 한 두 사람의 문제는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정도 희생은 희생이 아니라고 말하는 위인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 보다 더 큰 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 보다 더 위대하고 큰 일이 있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큰 일을 하시면서 자기를 찾는 사람을 향해서 발걸음을 멈추시는 은총의 주님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어떤 연유로 여기 나왔는지 옆사람은 모르지만 내 마음의 깊은 공허와 깊은 좌절을 채워줄 수 있는 분은 주님 밖에 없습니다. 주님 이외에는 내 문제를 해결하실 분이 없습니다. 전심으로 주님 앞에 나오는 마음을 주께서는 멸시치 아니하십니다.

주께서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너의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겠다'는 말은 이 말이 요한복음 4장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데는 여러 루트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사마리아로 가야 하겠다'고 합니다. 무엇 때문에 가셨어요? 옆에 야곱의 우물이 있어도 목마른 여인, 그 영혼의 목마름을 채워주시기 위해서 예수께서 사마리아로 가셔야 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삭개오에게도 '내가 오늘 너희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하십니다. 삭개오는 호기심으로 시작해서 집념을 가지고 예수님을 드디어 만났기에 '야, 내가 예수님 만났다.'고 말해야 됩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사실은 주께서 더 찾고 계셨습니다. '네 영혼을, 너를 만나야겠다. 내가 오늘 너에게 구원을 베풀어야겠다. 네 마음이 원하는 그 모든 공백을 내가 채워줘야겠다.' 예수님을 찾아서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 분이 나를 먼저 찾아오신 것입니다.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그는 기뻐합니다. 즐거워합니다.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합니다. 사람들은 그 죄 많은 사람, 쓸모 없는 버러지 같은 사람의 집에 간다고 수근거리고 있었습니다. 비난하고 있었습니다. 삭개오가 예수 만나기 위해서 어떤 조롱도 무시하고 기어코 만난 것처럼 사람들의 판단이나 떠드는 소리를 듣고도 예수님은 삭개오의 집에 가셨습니다. 그랬더니 삭개오가 말씀하십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겠습니다.' 예수 만났으면 할 말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 당신 저번에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 뜻이 무엇입니까? 당신이 정말 나사로를 살렸습니까?' 호기심 많은 이 사람에게 질문이 얼마나 많았겠어요? 그런데 아무 질문이 없습니다. 오히려 자기가 무얼 행할 것인가만 말하고 있어요. 이미 마음에 그 모든 질문이 해결된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믿을 때 일어나는 한 증상입니다.

제가 참 고통스러웠던 것은 외할머니부터 순교하다시피 하여 소천하신 분, 아버지는 장로이고 어머니는 권사인데 예수가 안 믿어지더라구요. 예수 안 믿어지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안 믿어야될 이유들을 생각나는 대로 질문으로 만들었습니다. 제가 공부를 잘한 기억은 전혀 없는데 그래도 철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고린도전서는 헬라 플라톤 철학의 어떤 책을 복사한 것 같고, 또 전도서는 인도의 야주르베다나 리그베다하고 흡사하다는 등의 코멘트를 달면서 계속해서 글을 썼더니 노트가 2권이나 되었습니다. 그 질문을 던지면 사람들이 대답을 못하더라구요. 나중에 장난으로 만든 질문 가운데 하나가 '아담에게 배꼽이 있는가?' 입니다. 아담에게 배꼽이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저도 모르겠어요. 별 질문을 다 만들어봤습니다. 그런데 막상 1965년 7월 24일날 우리 주님 만나니까 그 만들었던 질문들이 해결된 것이 아니라 질문 자체가 원인무효가 되더라구요. 질문이 질문으로 성립이 안됩니다. 마치 햇빛이 쨍쨍 쪼여 봄눈 녹듯 다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의심이 안되고 질문이 안됩니다. 바뀌어진 것 있습니다. 어떻게 순종해야하는가? 이것이 제게 최고의 문제입니다. 마찬가지로 삭개오에게도 질문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그 사람을 만나기 전날 밤, 많은 대화를 준비합니다. 또 질문도 준비합니다. 그런데 만나면 어떻게 되나요? 아무 말 안해요. 또 제 아이들도 그럽니다. '아빠, 제가 한국가면 아빠하고 할 말이 많아요.' '이메일로 해라.' 하면 '이메일로는 지면이 한계가 있어서요.' '그러면 전화로 해라.' '전화 값 많이 드니까 가면 많이 말할께요.' 그리고 한국에 도착합니다. '할말 있냐?' 그러면 '없어요.' 그럽니다. 예수님 만나기 전에는 우리에게 많은 질문이 있습니다. 많은 의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만나면 모든 의심이 종결됩니다. 그리고 그 분 앞에서 새로운 생애가 열립니다.

그의 생애가 돌이켜졌습니다. 회개라는 말은 '돌이킨다'는 뜻을 가졌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가져서 만든 그 재산의 반은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속에 있는 깊은 공허함, 어떤 것으로 채워도 채워지지 않던 그 공허가 주님을 만나자 갑자기 채워지니까 그 마음속이 풍성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제까지 남의 것을 수탈하고 뺏고 모으고 쌓았던 인생이 예수가 그 속에 들어가자마자 다른 사람을 향해서 주는 풍요한 인생으로 바뀌었습니다. '내 모든 재산의 반은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겠습니다.' 풍요의 원천이신 주님을 만난 삶의 특징입니다. 또 '내가 토색한 것을 4배나 갚겠습니다.' 율법에 도둑질했으면 변상할 때 4배를 변상하도록 했습니다. 마찬가지의 원리였습니다. '내가 도둑질한 것은 다 갚겠습니다. 주의 말씀을 내가 순종하겠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잘못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너무 얄팍한 용서와 얄팍한 회개를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잘못해놓고 예수님께 자신의 모든 죄와 잘못을 회개합니다. 그래놓고 주께서 날 용서했다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주고 손해 끼친 것도 잊어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그것만 해도 좋은데 자기에게 돈을 빌려준 사람에게 성경까지 갖다대면서 왜 성경에 형제를 사랑하고 용서하라고 했는데, 용서하지 않느냐고 꾸중하는 사람까지 있습니다. 믿음이라는 미명하에 후안무치(厚顔無恥)한 사람들이 있어요. 아닙니다. 진정한 믿음의 삶은 내가 손해끼친 것에 대해서 사과하든지, 또 보상해야 됩니다.

얼마 전 참 아름다운 신문기사를 보았습니다. 어떤 분이 중학교 다닐 때인지, 고등학교 다닐 때인지 통학하면서 기차에 무임승차를 했습니다. 그래서 그 때 돈으로 환산해 계산해서 복리까지 쳐서 철도청에 갚았습니다. 하여튼 그 분은 자기 양심에 깨끗함을 그처럼 사모했던 사람입니다. 제가 아는 장로님 가운데 고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 재직했던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이 장로 된 다음, 하나님과 사람 앞에 바로 살아야겠다고 결심하고 자기 잘못을 계속 생각하면서 기도하다가 어렸을 때 이웃집 참외밭 서리한 것이 생각났습니다. 이 분이 그것을 해결해야겠다 싶어서 그 때의 과수원을 찾아갔더니 주인은 돌아가셨고 큰 아들과 둘째 아들이 아직 살고 있더래요. 다 한 마을에 살았기 때문에 잘 아는지라 찾아가서 그 돈을 내놓고 받으라고 그랬더니, 이 분이 화를 내면서 하는 말이 '자네가 출세했다고 나를 괄세하는가? 아니 어렸을 때 누구나 다 서리했고 나도 이웃집 복숭아밭 서리했는데... ' 호통을 치더래요. '그것 아니라 내가 예수 믿고 나서 거기서도 교회의 지도자 장로로 세움을 받았는데 내 생애의 잘못된 것을 생각하다 이것이 생각나서 가슴 아파 오늘 가져왔으니, 제발 좀 받아달라' 사정했더니 가만히 듣더니, '알았네.' 하고 받더래요. 다음 주일날 오후에 전화가 왔습니다. '자네 보내놓고 내가 일주일 동안 왜 자네가 그렇게 살았나 굉장히 궁금했네. 그래서 자네가 믿는다는 그 예수 때문에 내가 오늘 교회 갔다왔는데 들을만하더군.' 그리고 그 가정이 모두 교회 나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회개의 진정한 열매가 필요합니다. 우리 주님 앞에 바로 섰으면 우리들의 마음에 풍요는 시작됩니다. 풍요만 시작된 것이 아니라 내 과거의 잘못에서 돌이켜서 우리 주님께서 원하시는 새 인생 길을 가게 됩니다. 이 삭개오는 자신있게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삶을 돌이켰습니다. 이 모습을 보시면서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로다.' 주변에 비난했던 무수한 사람들은 자신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을 자랑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겉모습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 처럼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후예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 집에 아브라함에게 임한 큰 구원이 임했다.' 그것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자기 오신 목적을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찾으러 왔노라. 하나님의 자녀인데 잃어버린 현장에 있는 그 사람을 찾기를 원한다.'

오늘 이 시간 우리들은 이 삭개오의 이야기를 통해서 배워야 될 것 있습니다. 그는 자기의 호기심을 호기심으로 끝내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작은 시작을 집념을 가지고 '과연 그러한가?' 하고 계속 추적했습니다. 제가 요즘 그리스도인들을 보면 너무 피상적입니다. 예배도 주일날 한번 와서 드리고 갑니다. 여기까지 발걸음을 옮긴 것은 참 큰 결단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내서는 안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야 됩니다. 여기 왔으면 오늘 예배의 주인이 누구이신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셔야 됩니다. 그 분을 만날 때까지는 만족하지 말아야 됩니다. 물러서지 말아야 됩니다. 아무도 여러분이 그 분을 만나는 열심을 가진 것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난도 없는데 스스로 만족하고 피상적인 결론을 가지고 돌아갑니다. 홍목사의 연설 듣고 끝나면 안됩니다. 성가대의 아름다운 찬양 듣는 것으로 끝나면 안됩니다. 이 문제는 피상성에 있습니다.

제가 올해 유학생 수련회 가서 참 마음으로 언짢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강사들의 강의 내용 중에 아무 생각 없이 툭툭 내뱉는 이야기들이 있어 마음으로 화가 났습니다. 열심히 찾아온 학생들에게 도무지 저걸 검산하고 하는 말인가 싶었습니다. 기독교철학을 가르치시는 교수인데, 기독교인 관점에서 기독교적인 세계관, 가치관을 가지고 비기독교 세계의 현상들을 진단하고 비판했습니다.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비판으로 우리 기독교를 비판하면 안걸리는가 하는 말입니다. 자신이 말하는 기독교 세계가 정말 이 땅에 이루어졌었는가? 사실 남의 것만 비난했지, 되돌아보면 그 비난한 내용이 우리 속에도 그렇게 많은데도 불구하고 거기에 대한 한마디 언급이 없었습니다. 그 중의 하나, 그 분이 프로이드를 격렬하게 비난했습니다. 프로이드라는 심리학자는 무신론자입니다. 그것 자체는 좋은 것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프로이드라는 학자가 나오기 전에는 기독교 세계에서 정신분열이나 정신질환을 가진 사람을 귀신들렸다고 불태워 죽인 예가 왕왕 있었습니다. 프로이드라는 사람이 최초로 우리 육체가 찢기면 상처가 있는 것처럼 우리의 정신도 상처 입는다는 것을 지적했습니다. 그 현상에 대해서는 인정해야 됩니다. 우리 기독교가 못 봤지만 믿지 않는 사람이라도 바로 봤으면 그것을 인정해야지요. 그런데 프로이드의 책 한 권도 안 읽어본 채 아무 생각 없이 우리 선생이 틀렸다고 말했다고 앵무새처럼 말하는 것 보고 마음으로 참 화가 났습니다. 제가 우리 나라 사람들의 피상성에 대해서 생각할 때마다 거듭 강조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입니다. 밴쿠버에서 유학생 수련회를 하는데 한국에서 유명한 기독교세계관을 가르치는 교수님 한 분이 강의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무슨 강의를 하는고 하니 '이 세상에서 한민족처럼 한이 많고 설움 많고 고통 많은 민족이 또 있는가?'라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민족의 고난사를 엮어냅니다. 강의 끝나고 식당에서 식사하면서 '교수님, 세계 어디를 가봤습니까? 무슨 민족을 봤습니까?' 물었습니다. 여러분, 세계 민족의 비극의 역사를 보면, 우리 한민족은 행복한 민족입니다. 인도네시아의 여러 부족들, 아메리아 인디언들의 비극, 그것도 청교도들에 의해 저질러진 죄악입니다. 남미의 인디오들의 역사는 천주교도들에 의해 저질러진 만행입니다. 정말 우리가 그렇지 않은가 깊이 생각해야됩니다. 정말 진리가 무엇인가에 대한 탐사가 필요합니다. 우리 한민족이 불행의 민족이고 비극의 민족이라는 것, 그것은 함석헌 선생이 뭘 모르고 하신 말씀입니다. 저도 옛날에는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읽고 저녁에 잠을 못 자고 눈물 흘렸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분이 어디를 못 가보신 분이예요. 본체를 만날 때까지는 물러서지 않는, 피상적인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 집착력이 삭개오에게 있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런가하면 삭개오는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부자 청년은 예수 앞에 가서 멋지게 말했습니다. '선한 선생님이시여. 어떻게 하여야 내가 영생을 얻으리이까?' 멋진 만남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께서 자기 인생의 깊은 문제를 지적할 때 슬퍼하며 근심하며 비틀거리고 예수를 떠나서 그 기회를 놓쳐버렸습니다. 뽕나무에 올라간 이 삭개오는 마지막 기회를 붙잡았습니다. 주님 앞에 자기 생애를 맡기기로 작정했습니다. 주님의 구세주되심을 그는 붙잡았습니다. 그 분의 주인되심 앞에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기를 '내가 율법대로 토색한 것은 4배나 갚겠습니다.' 생애를 완전히 내놓았습니다. 예수님은 다시는 여리고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 날, 우리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고 성만찬을 행하신 다음, 겟세마네에 들리셔서 피땀 흘려 기도하시고 거기서 원수들에게 붙잡히십니다. 그리고 그 분은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다시는 예수님이 그 땅에 돌아오시지 않았습니다. 삭개오는 마지막 그 결정적인 순간을 붙잡았습니다. 놓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어떤 마음으로 여기 오셨습니까? 무엇을 얻기 위해서 오셨습니까? 누구를 만나기 위해서 오셨습니까? 오늘 여러분들 차 세우기도 힘들었을 텐데 그것을 감당하고 여기까지 온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 주님 만나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 분 앞에 생애가 새로 펼쳐져야 되지 않겠습니까?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새 인생의 영광을 누리고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쉽게 물러서지 마시고 정말 그러한가 하고 본론을 붙잡을 때까지 계속 전진하십시오. 그리고 그 분을 만나십시오. 내가 그 분이 만나기 원하는 것 보다 그 분은 나를 더 만나기를 더 원하십니다. '나는 너처럼 잃어버린 자를 위해서 왔다. 내가 오늘 너와 함께 너의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사랑으로 내게 찾아오신 주님이십니다. 그 주님을 만나는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오늘 이 예배에 우리 심령 속에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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