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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씀과 믿음 (요 04:4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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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믿음(요4:46-54)

사람들은 세상을 살면서 근심, 걱정과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많은 재물을 옆에 두기 원합니다. 그 돈으로 근심, 걱정거리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높은 지위를 향해 계속 생애를 걸고 전진해 나갑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높은 지위에 있으면 전화 한 통화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돈 있고 사회적인 신분이 높고 영향력이 크면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그 모든 것들은 불확실한 위안거리에 불과합니다. 저녁에 잠이 오지 않을 때 잠자리 불편한 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돈으로 좋은 침대는 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깊은 잠, 자고 나면 온 몸이 개운해지는, 진정한 휴식과 안식이 있는 그런 잠은 돈으로나 약으로는 살 수 없습니다. 또 우리가 배가 고플 때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서 맛있는 음식을 사올 수는 있습니다만 말기 암으로 고통받는 사람의 눈앞에 음식을 놓고 먹지 못하는 그 고통을 대신 해결해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위안거리는 위안거리지만 불확실한 위안거리입니다. 그런가하면 확실한 걱정거리인 것은 사실입니다. 지위가 높은 사람 쳐놓고 근심, 걱정이 크지 않은 사람을 아직 못 봤습니다. 큰 나무 바람 잘 날 없다고 돈 많은 가정, 문제는 계속 야기되고 가져본 사람의 한결같은 고백은 돈으로 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오늘 사회적인 신분이 높은 한 사람, 그리고 재물도 많이 가졌던 한 사람의 이야기를 같이 나누고자 합니다. 성경은 이 사람은 '왕의 신하'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영어 성경은 '귀인'이라는 말로 번역했습니다. 니고데모는 관원이고 또 영생을 사모했던 청년도 관원이라고 했는데 '관원'이라는 말은 '관리'라는 말이고 이 '왕의 신하'는 왕자이든지, 왕의 경호를 맡아 지근거리에 있는 사람이든지, 왕을 육신처럼 돌보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사용된 단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은 당시의 분봉왕이었던 헤롯 주변에 있던 사람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8장 3절을 보면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가 예수님을 자기 재물로 돕더라'고 해서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이 구사가 아닐지 추측합니다. 또 사도행전 13장에 보면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행 13:1) 라고 안디옥 교회에서 함께 금식하며 기도하는 교회 지도자 중에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이 있었습니다. 이 마나엔이 아닐까 하고 많은 학자들이 추측합니다. 당시의 예수님을 좇았던 무리들은 사회적인 신분이 높지 않은 사람이 대부분이었고, 보통 때는 그 얼굴을 나타내지 않고 밤중에 몰래 와서 예수께 인생의 중요한 질문을 했던 니고데모와 나중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을 때, 자기 새로 판 무덤에 장례를 시켜 준 아리마대 요셉 정도가 예수님 주변의 높은 신분의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주변의 가난한 사람에게, 시각 장애인에게, 문둥병 환자에게, 청각 장애자에게, 세상에서 천하고 힘없는 사람에게 먼저 복음을 전했었습니다. 예수 주변에서 사회적인 신분이 높은 사람은 지극히 적은 수에 불과했기 때문에 도대체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많은 학자들이 궁금해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구사의 또 다른 이름이 마나엔이 아닌가?' 생각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이 사람에 대해 여러 가지 설로 설명합니다. 그 중 하나는 왕의 신하가 다르고 누가복음 8장에 나온 헤롯의 청지기 구사가 다르고, 그리고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이 다르다는 설입니다. 아니, 한 사람인데, 이름이 다르게 두 번 나타난 동명이인이라는 학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누구여도 상관없습니다. 하여튼 그 사람은 왕궁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왕의 권위를 마음대로 함께 누렸던 사람, 왕궁의 모든 보화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 사람에게도 비극이 찾아왔습니다. 돈으로도 사회적인 신분으로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 병들어 죽게 된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질병에는 등급이 없습니다. 부자집에도 질병은 들어가고 가난한 사람에게도 질병은 들어갑니다. 요즘 한국의 재벌가에 암이 돌아다니면서 세상 떠나는 분들을 보면 돈으로 이 암이라는 질병을 막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가하면 사회적인 신분으로도 그 병을 낫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 그가 의사를 초대해서 치료할 수만 있었다면 세상 끝이라도 가서 자기 아들을 치료할 의사를 데려왔을 것입니다. 귀한 약재가 필요했다면 이 사람은 어디든지 가서 그 약재를 구해왔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가정에 불행은 찾아들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질병은 모든 사람에게 찾아들되 젊은 사람에게도 다가섭니다. 나는 질병과 상관없다고 말씀하고 싶으신 분 계십니까? 아닙니다. 언제 내가 인간으로서는 상관할 수 없는, 해결할 수 없는 질병에 걸릴지 아무도 모릅니다. 아니, 젊은 사람 뿐만 아니라 어린아이들 경우에도 질병 문제는 그처럼 가깝게 다가섭니다. 제가 새벽마다 기도하는 세 아이의 이름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이준성, 최유운, 박서영 어린이입니다. 최유운은 하반신의 신경이 점점 소멸되어가고 있습니다. 박서영은 몸에 효소가 없어서 태어날 때부터 효소부족으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이준성은 오늘도 백혈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새벽마다 하나님 앞에 이 세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합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아이들이 이렇게 고통을 받습니다. 질병은 찾아옵니다. 우리들에게 내일 무슨 질병이 닥칠지 아무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질병 걸리기 전까지는 건강하지만 한번 질병에 걸려서 고통을 받으면 치료가 될 때까지 그 고통이 몸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이 고통을 통해 왕의 신하는 그 고통을 해결할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고통은 우리 주변에 늘 다가섭니다. 그러나 고통이 어떤 때는 고통 없이는 배울 수 없는 진리를 가르쳐줍니다. 고통을 당하지 않으면 인간의 깊은 진미를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좌절과 고통을 통해서 진정한 인생의 의미를, 진정한 인생의 풍요를 배웁니다. 그런가하면 고통 없이는 도무지 도달할 수 없는 품격이 있습니다. 역사상 위대하고 아름답고 복스러운 것 중에 고통 없이 되어진 것 있으면 가지고 나와보세요. 없습니다. 위대한 예술도 고통의 산물입니다. 사람들을 깜짝 놀랠만한 감동을 주는 곳곳에 고통이 도사리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승승장구, 풍요와 같은 것들은 우리 인생을 경망하게 만드는 지름길인 경우가 많습니다. 고통, 그 자체는 결코 좋은 것이 아니지만 그 고통을 통해서 내가 공부해서는 배울 수 없는 놀라운 진리에 도달하게 되고, 노력해서 얻을 수 없는 품격을 얻는 통로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왕의 신하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이 고통을 해결하기로 작정합니다. 그 때 그는 이 고통의 해결자이신 예수 소식을 듣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그렇습니다. 고통은 어떤 분의 말대로 우리 주님의 사랑의 초정장입니다. 고통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도무지 몰랐을 그 예수를, 고통 때문에 만난 경우가 이 세상에 참 많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시인 가운데 미즈노 겐조라는 일본인이 있습니다. 이 분은 11세 때 뇌성 소아마비로 성장이 멈추어서 그 때부터 자기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한 채 뼈에 가만히 살만 덮어놓은 것 같은 그런 하반신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성장한 것은 얼굴밖에 없는데 자신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눈동자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고통 중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내가 만일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을... 만일 모든 형제, 자매들이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이 전해지지 않았을 것을... 만일 우리 주님이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은 나타나지 아니했을 것을...' 제목은 '괴롭지 않았더라면' 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괴로움 속에 나오셨습니까? 해결 안된 문제를 가슴에 품고 왔습니까? 나만 왜 재수 없는 인생을 사는가 좌절을 가지고 나오셨습니까? 그것은 주님의 사랑의 초청장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고통을 고통으로 끝나지 않게 하시고, 의미 없게 지나가지 않게 하시고, 그 고통을 통해서 놀랍고 영광스러운 인생의 보람과 가치를 만들어 그 분 앞에 우리를 세워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그 가슴에 있는 고통을 가지고 우리 주님 앞에 나아가십시다.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들은 예배하러 나왔습니다. 무엇하러 나오셨습니까? 성가대 찬미 들으러 나오셨습니까? 홍목사 얼굴 보러 나오셨습니까? 아닙니다. 주께서는 고통이라는 초청장을 통해서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주의 풍요를 우리의 삶 속에 알려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왕의 신하는 아들이 눈앞에서 죽어가는 그 고통을 가지고 우리 주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고통 중에 계신 여러분, 그 문제의 해결자이시고 그 고통을 통해서 합력해 선을 이루시는 주님을 반드시 만나셔야 됩니다. 그 앞에 나오십시오. 그 분의 치료와 그 분의 온전한 위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예수 앞에 나아갑시다.

이 사람은 믿음으로 나갔습니다. 그렇지만 그 믿음은 몹시 불완전한 믿음이었습니다. 병 낫기를 바라는 믿음이었고 예수님의 능력을 신뢰하지 않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셔서 병을 고쳐주소서.' 이 사람은 회당장 야이로의 믿음과 같습니다. 회당장 야이로라는 사람이 자기 딸이 죽게 되었으니까 예수님께 좇아 나갑니다. '당신이 우리 집에 오셔서 저 문둥병자를 손으로 만져 치료해주었던 것처럼 내 아이를 만져서 낫게 해주시옵소서.' 또 혈루병 앓았던 여자는 '내가 예수님의 옷가를 만지기만 해도 내 병이 나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냥 예수님께 물리적으로 부딪쳐야만 기적이 일어나는 줄로 생각했던 연약한 믿음을 이 여인이 가졌습니다. 그의 믿음은 예수님의 인격을 바라본 믿음이 아니라 자기 앞에 있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만 급급한 원초적인 믿음에 불과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믿음을 꾸중하십니다.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너희들이 바라는 것은 기적 자체이지, 나를 믿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너희들은 너희의 문제만 해결되기 원하지 너의 영원한 문제의 해결자인 나와 생명의 관계를 갖는 것을 원치 않는다.' 주님의 꾸중입니다. 한없이 주실 주님 앞에 지극히 적은 것 하나만 요구하는 내 인생을 향해서 주님은 꾸중하고 계십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연약한 믿음을 꾸중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물러서지 않고 또 아룁니다.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간청합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배워야될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아갈 때, 우리들은 이런 마음을 갖습니다. '내가 그래도 과거 보다 조금 나아진 다음에, 이 부족한 것을 해결한 다음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겠다. 그래야 주님께서 기쁨으로 맞이해 줄 것 아닌가?' 아닙니다. 지금 문제가 있으면 지금 나가십시오. 지금 죄가 생각나거든 지금 나가십시오. 반복된 죄여서 얼굴 들 수 없다구요? 아닙니다. 지금 나가십시오. 자기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고 나갈 인생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사람이 나오기 전에 이미 그의 연약한 믿음을 아셨습니다.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한다.' 주님은 아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아십니다. 나를 아십니다. 나무에 올라가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한 성인, 그 사람이 삭개오인줄 주님은 아셨습니다. '삭개오야 내려오라.' 젊은 부자 관원이 예수님 앞에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말할 때에 주님은 이미 아셨습니다. 그 마음 속에 물질을 향한 깊은 욕심이 있는 것을 아시고 잘한 것은 칭찬하신 다음에 '너의 재산을 모두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고 나를 좇으라. 네가 참 영생을 소유하기를 원하느냐? 그렇다면 이렇게 해라.' 이미 그 청년을 만났을 때 그 청년의 마음 상태가 어떤지 숨겨진 마음 속 깊은 곳에 약점이 무엇인지를 주님은 아셨습니다. 그런가하면 우리 주님은 무화과 나무 아래서 기도하는 청결한 마음 가진 나다나엘을 아셨습니다. 폼 잡지 맙시다. 나를 다 아십니다. 내가 고쳐서 나가겠다구요? 아닙니다. '너 수고하고 무거운 짐 내려 놓은 다음에 내게 나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지었기 때문에 내게로 나오라. 내가 너를 편히 쉬게 하리라.' 있는 것 그대로 가지고 나오십시오. 고집 피우지 말고 나오십시오. 내 연약한 상태를 그대로 가지고 나오십시오. 사람들이 남의 짐은 다 싫어합니다. 주님만이 남의 짐을 맡겠다고 초청하는 유일한 분입니다. 내가 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때, 내가 내 인생의 그 무거운 짐에 눌려서 신음하고 있을 때, 아무도 도움 줄 수 없을 그 때, 주께서는 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연약한 믿음이지만 그 앞에 나온 그 믿음을 고쳐주시기로 작정하십니다.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선언했습니다. '내가 내려가서 고쳐주겠다'가 아닙니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입니다. 그 명령 앞에 주님께 거리의 제한이 있다고 생각했던 이 사람의 연약한 믿음이 채워졌습니다. 그리고 무언가 기적을 봐야 믿겠다는 그 마음이 치료가 되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아무 것도 안 봤습니다. 믿고 갔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믿음의 모습입니다. 주께서는 그 연약한 믿음을 치료해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믿는다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무엇을 믿습니까? 예수님의 무엇을 믿습니까? 눈을 믿습니까? 코를 믿습니까? 수염을 믿습니까? 손을 믿습니까? 무엇을 믿습니까? 우리가 믿는다고 할 때 실제로 그의 인격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격을 믿는다는 구체적인 표현이 무엇입니까? 말을 믿어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 민족적으로 중국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중국 사람은 한번 딱 친구로 삼아서 믿기 시작하면 문서 만들자고 하지 않습니다. 보증서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공증하자고 말하지 않습니다. 말했으면 끝입니다. 인격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 안 믿으니까 보증서라, 서로 협의서 작성해서 사인하자, 그것도 안되니까 변호사 사무실에 가서 공증받자고 합니다. 표적은 무엇인가 하면 공증받자는 것과 비슷합니다. 인격을 믿는 사람은 필요 없습니다. 중국 사람들이 자기를 친구로 받아들인 다음에는 말 한마디면 다 됩니다. 그 위에다 더 덧붙이지 않습니다. 그것이 믿음의 원칙입니다.

그 믿음의 본질을 우리에게 제일 처음 보여주었던 사람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요한복음 2장에 갈릴리 가나 혼인 잔치가 나옵니다. 그 혼인잔치에서 피로연에 사용해야될 술이 떨어졌습니다. 포도주가 모자랐습니다. 걱정이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걱정하고 있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던 마리아는 예수님께 좇아가서 포도주가 없다고 말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직 내가 나타날 때가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오고 오는 우리 주님을 신뢰할 모든 사람들이 따라야 될 삶의 모범을 2장 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인들에게 말하기를 '그 분이 무슨 말씀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네 감정에 맞든지 맞지 않든지, 네가 생각할 때 네 이치에 옳든지 그르든지 간에, 네 경험에 비추어서 그럴듯하든지 아니하든지 간에, 그 분이 무슨 말씀하시든지 그대로 해라.' 그 분의 인격을 신뢰하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하인들은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하시니까 항아리에 물을 채웠습니다. 아니, 술이 필요한데, 물을 채우라니요. 그래도 물을 채웠습니다. 지금 술이 필요한 그 연회석을 향해서 '갖다 주라'고 하니까 아직도 아무 변화가 없는데, 그 물을 떠다 갖다줍니다. 놀라운 사실은 마지막 순간에 그 물이 포도주로 변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술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고 기록되지 않고,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했단 말입니다.

이 신앙을 사도 바울은 유라굴로 광풍 속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가 로마로 지금 잡혀가고 있습니다. 가다가 무서운 돌풍인 지중해의 유라굴로 광풍을 만납니다. 깊은 흑암 속에서 며칠이고 배가 풍랑에 떠밀려갑니다. 지금 이 배의 형편은 있는 모든 물건을 다 내던지고 죽음만이 그 앞에 남아있다고 덜덜 떨고 있었습니다. 그 때 사도 바울은 선장과 자기를 호송하는 백부장과 거기 있는 모든 사람에게 큰 소리로 말합니다. '주께서 지난 밤 나와 함께 하셨다. 바울아, 네가 두려워 말라. 너는 반드시 로마에 가서 가이사 황제 앞에 서야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그는 사도행전 27장 25절을 통해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어떤 하나님을 믿느냐구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그 하나님은 말씀의 하나님이십니다. 빛이 있으라 명하니까 그 말은 그 인격을 뒷받침해서 빛이 생겼습니다. 물과 뭍이 나눠지라고 명령하니까 물과 뭍이 나눠졌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0장 17절에 믿음의 진정한 본론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 믿음이 어디서 난다구요? 들음에서 납니다. 들음은 어디서요?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교회에서 오늘부터 2학기 성경공부를 다시 시작합니다. 여러분이 찾아가서 공부하셔야 되고 또 목장에서 성경말씀을 배워야 됩니다. 왜 말씀, 말씀하고 강조하느냐면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않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 말씀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인격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통하지 않고 바른 믿음을 가진 예는 역사상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교회에서 주는 유익을 얻기 원한다면 시간을 내셔야 됩니다. 그래서 시간을 정해서 성경공부에 참석하셔야만 됩니다. 그렇지 않고는 내 믿음이 온전해지지 않습니다. 눈앞에 나타난 기적을 보고 믿는 것은 믿고 말 것 없어요. 그것은 인식만 하면 됩니다. 봤는데 뭘 믿어요? 인식만 하지. 믿음은 무엇입니까? 그 분의 인격을 믿기 때문에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았어도 그 분 말대로 될 줄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랬던 사람이 우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했습니다. 어디로 가야하는지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만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은 떠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명령한 그 땅을 향해서 나갔습니다. 그는 동으로 갈지, 서로 갈지 도무지 몰랐습니다. 어디가 좋은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는 철저하게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나아갔습니다. 그가 갈 바를 알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아는 것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인격이 어떤 분인줄 확실히 알았습니다. 나중에 그 믿음은 모리아 산정에서 사랑하는 아들을 죽여서 바치라고 할 때에도 동일했습니다. '나는 이 현상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차라리 내가 죽는 것이 낫겠다. 나는 감정적으로 이것을 감당할 수 없다. 그렇지만 내게 이제껏 좋은 것 주시고 내게 이 아들 통해서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편만케 채워주시겠다는 우리 하나님의 인격을 믿는다.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나는 하나님의 인격을 믿는다.' 그는 모리아 산정으로 사랑하는 아들의 손을 붙잡고 올라가게 된 것입니다. 나타난 현상보다 하나님의 인격을 더 믿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 이 믿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나아갔다가도 현실이 어려우면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을 현실 적응적으로 삶의 태도를 바꿉니다. 그러니까 어떤 때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어떤 때는 요령부리는 얕은 자기 꾀입니다. 믿음은 오로지 우리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생겨납니다. 그 인격을 향한 신뢰, 그것이 바로 그의 말씀을 믿는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11장, 믿음의 모든 영웅들은 하나님께서 증거로 주신 그 약속만 붙잡고 달려갔지, 그 약속의 성취를 그들의 생애에는 하나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매 저들은 모두 믿음으로 나아갔었습니다. 그리고 주께서 또 말씀하십니다. '네가 본 고로 믿느냐?' 더 큰 믿음이 있다고 말합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더 복되도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산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현상은 다음에 그런 현상이 또 나타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인격으로 믿는다면 어떤 현상이 생기든지, 어떤 문제가 나타나든지 간에 내가 알고 있는 나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이 그 문제의 해결자가 되어주십니다.

이 왕의 신하는 아들의 질병을 고치러 왔다가 마음속에 연약했던 그 믿음이 채워짐을 받고 고침 받고 집에 내려갑니다. 이 사람이 지금 걸어가는 길이 가버나움에서 가나안까지로 한 백 리 길 밖에 안됩니다. 그런고로 급하게 갔으면 그날 저녁에 도착합니다. 그런데 이 분은 주께서 치료해주신 것을 확신했습니다. 천천히 내려가다가 하룻밤을 도중에 잤습니다. 다음 날 가는데 허겁지겁 올라오는 하인들을 만납니다. 하인들이 '주인님, 아드님이 살아나셨습니다.' 그는 빙긋이 웃으면서 '몇 시더냐?' 물었습니다. 예수께서 하신 그 말씀의 시각을 재어보고 확인합니다. 제 칠 시입니다. 오후 한 시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명령하실 때 즉시 그 아들이 일어난 것을 그는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문제들이 주께서는 진정한 믿음으로 고쳐지기를 구합니다. 주님은 아들 고쳐지는 것 보다 그 마음속에 우리 주님을 향한 인격적인 신앙이 형성되기를 더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말을 믿어주는 것, 인격을 믿어주는 것이 신앙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것을 가르치셨고 그 마음속을 온전한 믿음으로 치료해주셨습니다. 이 왕의 신하는 집에 돌아가서 주께서 행하신 일을 증거했고 그 다음에 성경은 말합니다. '온 가족들이 다 예수를 믿더라.' 성경에 가장이 예수 믿어 온 가족이 믿게 된 사례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더 생각해 봐야될 것 있습니다. 내 믿음이 처음에는 불을 지피면 연기가 나는 것처럼 연기와 불이 섞인 상태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불이 연기를 떨치고 온전해지면 불꽃이 활활 타기 시작합니다. 활활 타는 불꽃은 그 불꽃으로만 끝나지 않고 이웃 장작까지 불을 붙여 줍니다. 이 사람의 처음 믿음은 불신과 섞인 믿음이었습니다. 표적과 기사를 보는 것을 믿음으로 착각하는 그 믿음과 혼재된 연약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앞에서 그의 믿음이 치료받습니다. 그 믿음은 홀로 불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그 믿음은 그 온 가족을 불태웠습니다.

여기에 나오신 형제들이여, 가정의 가장으로서 당신의 바른 믿음은 가정을 구원하는 놀라운 계기가 됩니다. 내 믿음이 활활 불타오를 때 옆의 장작으로 넘어가는 것처럼 내 믿음이 주 앞에서 온전해지고 확실해지면 우리는 온 가족이 구원 얻는 놀라운 축복을 경험할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 얻는다.' 자매님들, 여러분의 믿음이 연기 나는 믿음에서 활활 타는 믿음으로 바뀔 때 사랑하는 여러분의 자녀들이 믿음으로 바로 서는 축복을 주께서 허락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번 추석 때 많은 사랑하는 식구들이 모일 것입니다. 오랜만에 만난 식구들, 과거에는 연기가 섞여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서 '야, 믿는 놈이 왜 그래?' 이런 소리 많이 들었던 내가 주님을 인격으로 신뢰하는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가족들을 만날 때 우리 속에 임마누엘로 함께 하시는 주의 영광을 볼 것입니다. '온 가족이 다 믿으니라.' 이런 믿음으로 이번 한가위에 보름달 보다 더 환하게 떠오르는 가정의 주인, 예수 그리스도의 밝은 빛이 비춰지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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