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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목마른 영혼 (요 04: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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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마른 영혼(요 4:13-15)

저는 연해주를 올 4월에 처음 갔었습니다. 교회 장로님들은 여러 차례 가셔서 둘러보고 도와주고 오셨습니다만 저는 시간이 여의치 못해서 올 4월에 처음 갔습니다. 현지 선교사님들을 만나 이야기하는데 중앙아시아에 흩어져있던 고려인들이 연해주로 이주해와서 작년 한 해 강우량이 적어 농사가 안되어 얼마나 어려웠는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심었던 모든 곡식들이 다 말라 비틀어집니다. 연해주의 농사와 우리의 경작이 다른 것은 우리는 논밭은 만들 때 둑을 만듭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땅이 워낙 넓으니까 아무 데나 뿌려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감자를 캘 때도 위에서 죽 잡아당겨서 몇 개 달린 것만 수확하지, 열려있는 모든 감자를 다 수확하지 않습니다. 땅이 넓은 나라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작년에 비가 오지 않아서 얼마나 어려웠는지 모른답니다. 그래서 올해는 물이 많은 곳, 물이 흐르는 곳으로 경작지를 옮겨서 심었는데 일년에 강우량이 한 60㎜밖에 안 되는 연해주에 올해는 한번 쏟아질 때마다 600㎜-800㎜의 비가 와서 그렇게 한 다섯, 여섯 차례 쏟아지니까 연해주 거의 전체가 호수가 되어 버렸습니다. 올해는 작년과 정반대로 농작물이 물에 잠겨서 먹지 못하게 되었다고 걱정하는 현장을 가보고, '올 겨울 우리 연해주 동포들을 어떻게 먹여 살려야 되나?' 하는 염려를 갖고 돌아왔습니다.

비가 오지 않아 고통받았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제가 몸 전체로 느꼈던 경험이 생각납니다. 1966년, 1967년, 1968년 세 해 동안에 무서운 한발(旱魃)이 온 국토를 덮쳤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인구의 8할이 농사를 지어 농사가 망하면 전체의 산업이 무너지는 그런 때였습니다. 신문에 아침마다 몇 사람이 굶어죽었다는 보도가 연일 나왔습니다. 제가 민족 복음화 운동 본부 총무로 일했던 당시였기 때문에 전국 각지를 돌아다녔습니다. 부산에서 출발해서 진주, 하동, 또 구례, 여수, 광주, 목포까지 갔다가 서해안을 따라서 올라온 경험이 있습니다. 그 때 온 들녘이 불타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거북이 등 껍질 같이 논마다 갈라져 있습니다. 한 농부는 너무 화가 나서 자기 논에다 성냥 한 개피를 대니까 말라버린 벼들이 타들어가는데 금새 몇 마지기를 한꺼번에 태웠다는 신문기사가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농사꾼들은 자기 땅이 갈라지는 것을 피부가 갈라지는 것 보다 더 아파합니다. 온 땅이 가뭄으로 고통받던 그 해, 미담도 있었습니다. 대구의 어떤 분이 목포에 있는 대학동창에게 매일 5갤런의 물을 기차로 실어보냈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물 부족의 고통을, 타는 목마름을 잘 표현한 글 중의 하나가 <어린왕자>로 유명한 쌩 떽쥐베리의 <야간비행>이라는 소설입니다. 그 소설에 보면 공군 소령인 쌩 떽쥐베리가 1차 대전에 참전합니다. 아프리카 전투 비행을 나갔다가 사하라사막에 불시착을 합니다. 저녁에 추우니까 비행기 잔해로 방풍벽을 쌓아놓고 그 안에서 밤을 지냅니다. 그런데 문제는 50-60℃ 기온이 올라가는 낮입니다. 그 뜨거운 낮을 견디는 것이 그렇게 힘이 듭니다. 목이 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할 수 없어서 소변으로 연명을 합니다. 물 부족을 해결하려고 한 가지 방법을 만들었는데, 방풍벽으로 쌓아놓은 비행기 기체 알루미늄판에 새벽이면 찬바람 때문에 적은 물방울이 이슬로 맺혀있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수건을 가져다가 그것을 열심히 적셔서 짜냈더니 반 컵의 물이 나옵니다. 그것을 마십니다. 문제는 거기 기름이 섞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 기름 섞인 물을 마시고 나서 배탈까지 나 탈수현상으로 거의 죽을 지경에 이릅니다. 조금 배가 나은 다음 먹을 것이나 물이 없나 싶어 이곳 저곳을 뒤적이며 다닙니다. 낮에는 돌아다닐 엄두도 못 내고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돌아다니는데 고목 나무 하나가 쓰러져 있습니다. 그 고목을 뒤집었더니 뒤에서 무수한 벌레들이 기어 나옵니다. 그것은 아침에 고목이 맺힌 이슬을 먹기 위해서 수많은 벌레가 있었던 것입니다. 열심히 그 이슬을 마시는 그 장면을 보고 주인공은 외칩니다. '보라, 너는 생명의 근원이 아니라 생명 자체다.' 그렇습니다. 물이 부족하면 물이 전부인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이 타는 목마름이 사람이 견디기 힘든 가장 큰 고통 중의 하나입니다.

이처럼 목마른 한 여인이 2천년 전에 사마리아 수가성에 살았습니다. 이 여인은 타락한 여자라는 멸시 때문에 사람들에게 외면을 당했습니다.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습니다. 가는 곳곳마다 자기를 멸시하는 눈 때문에 고통을 받았습니다. 사막 같은 사마리아 한 복판에서 가장 큰 문제는 물을 구하는 것입니다. 1.8㎞ 나가면 야곱의 우물이라고 지칭된 우물이 있습니다. 세월 좋은 아침과 저녁에는 동네 아낙네들이 물을 길러 옵니다. 이 여인은 사람들의 자기를 멸시하는 그 눈이 너무 따가와서 뜨겁게 작열하는 태양이 내리쬐는 12시, 한낮에 물을 길러 나왔습니다. 마음속에 끊어지지 않는 저주 의식을 갖고, 이 동네 사람들과 상관없는 소외된 인생이라고 절규하면서 그는 물을 길러 갔었습니다. 그런데 그 샘에 한 유대인 남자가 있었습니다. 원래 유대인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이 혼혈이라고 해서 멸시했습니다. 거기다가 느헤미야나 에스라 시대 민족 중흥의 한 시기가 있었는데 제 2성전을 지을 때, 이방인들과 결탁해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고 수축하는 일을 방해했던 사람들이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미움이 더 증폭되어 있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자기 앞에 오면 그들은 외면했습니다. 어떤 때는 그들에게 수치감을 더 크게 해주기 위해서 반대편에 침을 세 번 뱉으면서 지나갔습니다. 사마리아 여인도 자기를 사람 취급하지 않을 이 남자,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물을 긷고 있었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뜻밖의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 유대인이 물을 좀 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깜짝 놀랐습니다. 유대인이 굶어죽어도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부탁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하물며 한 낮에 온 자기를 향해서 질문하는 것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 여자가 말합니다. '어떻게 유대인인 당신이 사마리아 사람인 내게 물을 달라고 하는가?' 빈정거리면서 물었습니다. '당신도 내게 도움 받을 때가 있군요' 하는 이야기입니다. '당신들 아무리 잘난척해도 결국 물 없으니까 내게 이렇게 구걸하는군요' 이런 뜻도 됩니다. 예수께서 말씀합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을 달라하는 사람이 누군지 알았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고 그는 네게 생수를 주었으리라.'(요 4:10) 지금 자기에게 물을 달라고 하는 사람이 이상한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너에게 물 달라고 한 것 때문에 놀랐느냐? 네가 내게 참으로 구하면 네게 생수를 주겠다.'고 말합니다. 이 여인이 깜짝 놀라서 '아니, 선생님, 여기는 샘이 깊습니다. 그리고 물 길을 도구도 당신에게는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물을 당신이 내게 준다는 말입니까?' 그 때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진지한 말씀 앞에 이 여인은 '주여, 내게 이런 물을 주시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이렇게 수고스럽게 물 길러 여기 오지 않도록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은 화제를 돌립니다. '네 남편을 불러오라.' 그의 급소를 지적하셨습니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돌아보게 하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말합니다.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그래, 네가 남편 없다는 말이 옳다. 원래 다섯 남편이 있었지만 지금 있는 사람도 네 남편 아닌 것을 내가 안다.' 깜짝 놀랐습니다. '내가 보니 당신은 선지자로다.' 이 여인의 마음속에는 자기가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범죄의 길을 걸으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 하나님을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 하는 간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하나님께 예배했습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저 예루살렘에서 예배해야 된다고 하더이다. 어느 것이 옳습니까? 선지자니까 당신은 알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참으로 만나고 싶다는 갈망이 이 여인에게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온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네가 지금 어느 장소로 가야 하나님을 만나는 줄 아느냐? 네가 어떤 예식을 갖춰야 하나님을 만나는 줄 아느냐? 아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런고로 그 앞에 나가는 자는 누구든지 신령과 진정을 가지면 된다.' 이 여인은 예수께 말합니다. '선생님, 맞습니다. 메시야, 곧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면 그런 때가 온다는 것을 우리가 압니다.' 그 때 예수께서 자기 얼굴의 베일을 거두시면서 '내가 바로 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이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달려갔습니다. 그 갈한 영혼 속에 갑자기 충일하는 능력을 경험했습니다. 그처럼 허기진 인생, 그처럼 배고픈 인생, 그처럼 타는 목마름으로 살았던 인생이 갑자기 속에서 생수를 경험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이고 온 물 항아리를 던져두고 뛰쳐나갑니다. 자기를 향해서 그처럼 비웃었던 모든 사람을 향해서 좇아나갑니다. 그리고 그는 외쳐댑니다. '내가 오늘 메시야를 만났다.'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무엇을 배워야 됩니까? 우리를 먼저 찾으시는 예수님을 봅시다. 여기 4장 3절을 읽어봅니다.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라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의지가 있습니다. 'I will' 입니다. 사마리아로 꼭 가야되겠다고 했습니다. 유대에서 사마리아로 가는 길은 또 다른 길이 있었습니다. 배를 타고 가는 길이 있었고, 요단강을 건너서 동편으로 지금의 요르단 지역으로 올라서 갈릴리로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사마리아로 가여야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거기 가야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사마리아의 한 여인이 죄에 허우적거리며 살면서 하나님을 향해서 깊은 갈망을 갖고 있는 것이 우리 주님 눈에 보였습니다. 그 마음의 소원을 우리 주님께서는 아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아시는 분입니다. 우리 마음에 품은 생각을 아는 분입니다.

한 여인이 예수를 만나고자 했습니다. 예수 주변에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 갑니다. 이 여인은 자기에게 있는 혈루병을 고치기 위해서 마음의 소원을 갖습니다. '내가 감히 우리 주님께 치유를 구할 만큼도 못되는 인생이다. 나같이 천한 여자는 그냥 모르게 예수님 뒤에 가서 옷가를 만지기만 해도 주님의 그 놀라운 능력이 임할 것이다.'는 믿음을 갖고 예수 앞에 전면에 나설 수 없기 때문에 뒤에 가서 가만히 옷가를 만지리라 생각했습니다. 그 여자는 사람들의 밀리고 밀리는 곳을 뚫고 예수 앞으로 나갔습니다. 그 옷가를 만졌습니다.(마 9:20) 그 때,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옷가를 만졌느냐?' 이 때 예수의 제자가 말합니다. '선생님, 지금 우리 주변에는 엄청난 사람이 모여 있습니다. 이리 밀리고 저리 치이는데 언제 누가 당신을 만졌다고 하십니까?'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 무수한 부딪침 속에서도 믿음의 손을 내미는 그 여인의 손을 아셨습니다.

주님은 여러분을 아십니다. 여러분의 깊은 곤고함을 아십니다. 여러분의 허기진 인생을 아십니다. 남몰래 흐르는 그 눈물을 우리 주님은 아십니다. 여기 예배하러 온 하나님의 자녀들을 다 아십니다. 이 가운데에도 '정말 주님 없이 내가 살 수 없습니다.'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을 주님은 아십니다. 오늘 무수한 사람이 예배 드립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이 그냥 예배의 한 형식으로 지나갑니다. 예배의 순서로 차곡차곡 의미 없이 지나갑니다만 어떤 사람에게는 주님, 내가 참 주님을 만나야 됩니다. 주님의 구원이 내게 필요합니다. 주님의 도우심이 내게 필요합니다. 간절한 마음의 소원을 가지고 나온 분도 있습니다. 주님은 아십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영광의 주님 앞에 떨리는 가슴으로 나온 사람을 우리 주님은 아십니다. 주님은 그 영혼을 만나기를 기뻐하십니다. '내가 오늘 남서울은혜교회에서 영광을 받아야 하겠는지라. 그 곳에서 내가 은혜를 베풀어야 하겠는지라. 내가 내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버지의 사랑을 전달하여야겠는지라.' 결심하셨습니다. 주님은 아십니다. 주님 앞에 전심을 쏟으십시오. 여호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를 찾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신다고 말씀했습니다.(대하 16:9)

그런가하면 주님은 내 샘 곁에 앉아 계시는 분입니다. 어떤 사람은 재물이라는 샘 곁에서 물을 기르면서 '내가 이것만 더 벌면 만족하리라.' 열심히 기르고 있습니다. '내가 이 지위까지만 올라가면 내 인생 만족하리라.' 그러면서 열심히 물을 긷습니다. '내 인생에게 이 정도로 명성을 쌓으면 내가 만족할 수 있으리라.' 물을 길어봅니다. 그런데 한번도 만족하지 못한 채 계속 물만 긷고 있는 내 인생 옆에 우리 주님이 앉아 계십니다. 그 물가 옆에 앉으신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시기 위해서 말씀하십니다. 거지가 되어서 먼저 구걸하십니다. 이 여인에게 말했던 것처럼 주께서 내게도 참으로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서 구걸하십니다. 참으로 놀라는 것은 구원의 역사는 구걸의 역사처럼 보여집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주께서 문밖에 서서 문을 두드립니다. 이 말은 거지가 남의 음식을 먹기 위해서 기웃거릴 때 쓰는 단어입니다. 문 밖에 기웃거리며 문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그 분이 거지가 되어서 애걸복걸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제 생애에서도 사실이었습니다. 저는 예수 안 믿으려고 애를 많이 써본 사람입니다. 그런데 제 친구가 예수를 믿더니 저를 보고 '너 예수 믿으면 산다.'고 설득시키는 거예요. 저는 뱃속에서부터 교회를 다녔고 그 친구는 예수 믿는 가정도 아니었는데 그렇게 애걸복걸하더라구요. 지금 미국에서 살고 있는 바로 제 아랫 동생은 제가 술을 거나하게 마시면 실수할까봐 멀리 떨어져서 제 주변을 배회하다가 제가 집에 들어가서 술 취해 곯아 떨어져 누워 있으면 이 녀석이 제 머리에 손을 얹고 눈물 흘리면서 형님을 구원해 달라고 기도하곤 했습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우리 부모님은 제 방황의 아픔과 영혼의 목마름을 제 자신 보다 더 크게 느끼시면서 저를 위해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기도하셨습니다. 그 분들이 거지시더라구요. 예수 안 믿으면 누가 손해인데, 예수 안 믿으면 누가 불리한데 마치 자기가 손해인 것처럼 애걸복걸 거지처럼 사정하면서 저를 향해 마음 문을 두드렸던 그 수많은 손길을 기억합니다. 예수 믿은 분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거지가 되어서 마음 문을 두드렸습니까? 얼마나 많이 애걸복걸했습니까? 남자 목장들을 찾아가 같이 예배를 드리고 여자 목자들과 함께 기도회를 갖고 기도제목을 나누다보면 가장 중요한 기도가 '우리 남편, 예수 믿게 해주세요. 우리 아이들이 믿음으로 바로 자라게 해주세요.' 인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많은 기도제목이었고, 가장 간절한 소원이었습니다.

샘 가에 앉아 내 물 길던 모습을 보시면서 '너, 내가 필요하지 않니?' 하고 말씀하신 주님이 예레미야 2장 13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렘 2:13)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서 웅덩이를 팝니다. 물을 저축하기 위해서 나름대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터진 웅덩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만든 웅덩이는 그것이 증발할까, 터져서 물 샐까를 걱정해야 됩니다. 거기서는 물이 썩을까봐 약을 쳐야 됩니다. 주께서는 내 생애가 그렇게 살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내 속에서 생수의 강이 터져 나오기를 원합니다. 진정한 만족을 누리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다른 방법이 아닙니다. 그 분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 분만이 그것을 주십니다. '물을 달라고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아 그 분에게 구했으면 그 물을 주셨을 것이다.' 내게 거지처럼 찾아와서 애걸복걸한 그 분이 내가 원하는 가장 소중한 것, 내 영혼의 깊은 소원을 만족시켜주십니다.

그 분은 이 여인 앞에 네 가지 단계로 만나주십니다. 첫 번째 단계입니다. 유대인 남자입니다. 유대인 남자가 어떻게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을 겁니까? 두 번째로는 말을 해보다가 이 분의 기품에 눌려서 '주여'라고 했는데, 여기 '주여'라는 말은 lord라는 뜻이 아니라 master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로 말하면 '선생님이여!'라는 뜻입니다. 두 번째는 선생으로 만난 것입니다. 그러다 그가 자기의 삶을 샅샅이 아는 것을 보자 '당신은 선지자입니다.'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에서는 이 여인이 스스로 안 것이 아니라 주께서 친히 베일을 걷어내시면서 '내가 바로 메시야다.'라고 주께서 자기를 계시해주십니다. 그 분을 만난 다음에 이 여인의 생애는 바뀝니다. 물동이는 더 이상 그에게 필요가 없습니다. 속에서 솟아나는 놀라운 생명력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과거에는 안 죽어서 마지못해 아침에 눈뜨니까 살았던 삶이라면 이제는 내 속에 생수의 강이 흘러서 삶의 모든 시간들, 사건들이 살아 꿈틀거리기 시작합니다. 생명의 충일함을 경험하기 시작합니다. 산다는 것이 얼마나 찬란하고 얼마나 감격인가를 누리게 됩니다. 돈으로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건강으로도 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젊음으로도 대처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줄 수 없었던 그 만족이 깊은 곳에서 생수가 되어 터져나옵니다. 예수! 그 분은 요한복음 7장에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목마른 자는 내게 와서 마셔라. 그리하면 네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리라.'(요 7:37-38) 정말 주님 앞에 나와서 그 배의 생수를 경험한 인생에게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부족함이 없도다.'는 고백이 나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남녀노소를 무론하고 여호와가 목자인 그 인생에게 부족함이 없다고 말합니다.

물긷는 현장에서 물만 긷지 마시고 내 영혼의 진정한 소욕을 만족시키시고 내 생애를 가장 귀한 것으로 가득 채우시는 그 분을 만나십시오. 그 분 앞에 나가십시오. 그 분과 얼굴을 마주치십시오. 그 분과 대화하십시오. 그리고 그 분께서 내게 주시는 것을 경험하십시오. 내가 노력해서 사는 삶이 아니라 그 분이 내 속에서 생수의 강으로 흘러 넘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놀라운 사실입니다. 그 분 갖고 싶지 않습니까? 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내가 원하는 것 보다 주께서 내게 주시기를 더 원하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이 놀라운 사랑 앞으로 나오십시오. 이번 성회가 이 놀라운 축복을 주시는 기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물동이를 버리고 그 분에게 집중합시다. 그 분이 무슨 말씀하시는가 들읍시다. 그 분이 내게 주시는 것을 두 손으로 붙잡읍시다. 이 때, 그 인생은 물동이를 버린 채 자기를 비난했던 시선 앞에 당당히 서서 '나는 오늘 메시야를 만났다' 외칠 것입니다. 이 은혜가 이번 성회의 사모하는 영혼에게 넘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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