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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원한 비극 (눅 16: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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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비극(눅 16:19-31)

우리는 이 주간에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가를 온 몸으로 느꼈습니다. 불경에서는 가장 중요한 원리를 네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로 세상이 고생스럽다는 것을 아는 것, 고제(苦諦)입니다. 두 번째로는 그 고통의 근거가 집착에서 온다는 집제(集諦),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없앨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멸제(滅諦), 모든 것을 없앤 다음에 열반에 이른다고 해서 도제(道諦)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해서 고집멸도(苦集滅道)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 고통 가운데도 가장 큰 고통을 애별리고(愛別離苦),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고통이라고 합니다. 우리들은 이번 8.15 이산가족 상봉을 보면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뉘어 살고 이별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가를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습니다. 50년만에 만난 아들보고 기절한 어머니, 자기 이름을 부르면서 '내가 왔어요' 큰절을 해도 모르는 아버지, 몇 차례 거듭 봐도 정말 가슴 아픈 일 중에 가슴 아픈 장면들이었습니다. 이 고통이 이 민족에게서 언제나 떠날지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가, 또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가를 보면서 또 한가지 잊지 말아야 될 것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 짧은 순간 만났다가 헤어지는 고통도 있지만 영원한 만남과 영원한 이별의 인생도 우리 앞에 열려있다는 사실입니다.

부자와 나사로
여기 성경에 부자와 가난한 나사로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색 옷을 입었습니다. 이 자색은 로마 황실에서 전용으로 입는 색깔입니다. 자색의 빛깔은 깊은 시내의 고동 끝에서 조금씩 나오는 자연 색소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 옷 한 벌을 자색으로 온전히 물들이려면 엄청난 비용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황실은 자기의 권위를, 부자들은 자기의 부요를 드러내기 위해서 자색 옷을 입었었습니다. 거기다가 고운 베옷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운 베옷은 이집트에서 직조를 했습니다. 마에서 가장 가는 섬유로 천을 만들었기 때문에 한없이 부드럽고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그 값을 칠 때에는 옷 무게와 금을 똑같이 달아서 금 값을 지불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당시에 얼마나 많은 돈을 지불하고 그 고운 베옷을 입었는지 모릅니다. 오늘날 앙드레 김의 것과 상대가 안될 정도의 고급 옷을 입은 사람입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그는 날마다 호화롭게 연회를 베풀었습니다. 구두쇠가 아니었습니다. 친구들을 불러모아놓고 자기 좋은 것을 원 없이 나누고 같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쯤 되면 팔자 중에도 상팔자고 아마 온 인류가 이런 삶을 한번 살아봤으면 하고 흠모할 만큼 성공한 삶의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이 사람이 돈을 모을 때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모았다는 기록도 없고 또 악했다든지, 무자비했던 것 같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집 대문에는 거지가 살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어느 동네를 그렇게 말해야 될지 모르겟습니다만은 옛날에는 부자 동네 성북동에서 거지가 굶어죽는다고 말했습니다. 성북동의 높은 대문, 성처럼 높은 담들 밖에서 굶어죽었습니다. 부자들의 무자비함이 있습니다. 거지가 어디에서 사는가? 가난한 사람 동네에 삽니다. 그런데 이 부자는 한국의 성북동 부자보다 좀 낫습니다. 자기 대문에서 가난한 사람이 얻어먹는 것을 용인했습니다.

그 거지의 이름이 나사로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연회에서 남겨진 음식 부스러기를 얻어서 배를 채웠습니다. 그 문가에서 같이 음식을 나누던 개가 그 &54743;은 데를 핥아 주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 나사로가 몸이 약해져서 거지가 되었는지, 가난했기 때문에 병들었는지는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이 사람은 몹시 불행했고 고통받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아마 이런 인생은 세계 어디가도 살기 싫은 사람의 대표적인 유형일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공평하십니다. 공평하신 하나님은 두 사람에게 공평하게 주시는 것 있습니다. 죽음을 그들에게 공통적으로 주셨습니다.

거지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그 시신이 가마니에 싸여져서 어느 골짜기에 버려졌는지 잘 알 수 없습니다. 장사지냈다는 말이 전혀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다음에 그가 죽자 천사들에게 받들려서 아브라함 품속으로 갔다고 합니다. 부자는 안 죽기 위해서 발버둥을 쳤을 것입니다. 매일 골프를 치러 나갔는지도 모릅니다. 건강을 위해서 체지방을 어떻게 줄이는가 의사를 동원해서 매일 건강 밸런스를 체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인생도 죽었습니다. 죽은 다음에 이 사람의 장례식은 굉장했습니다. 죽어서도 저렇게 돈을 많이 써야 되는가 할 정도로 성대한 장례식을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저가 음부에서' 라고 말합니다. '하데스'라는 말은 '지하, 감옥'이라는 뜻입니다. 신약 성경은 지옥을 두 단어로 표현합니다. 하나는 '델라'라는 단어로 표현하는데 이것은 유대의 전통적인 개념으로 '불타고 있는 골짜기, 불이 꺼지지 않는 골짜기'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하데스'라는 것은 그리스에서 지하 세계를 하데스라고 그랬는데, 성경은 그것을 지옥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조금 다른 개념인데, 그 때 사람들이 죽으면 가는 곳을 '하데스'라고 했기 때문에 성경은 그 의미를 그대로 원용해서 사용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가 고통 중에서 눈을 들어 아브라함 품 속에 있는 나사로를 봅니다. 성경 본문은 '아브라함 품속에 아이처럼 누워있는 나사로'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장 편안한 자세, 위로가 있고, 깊은 자비가 있고 관심이 있는 아브라함의 품속에 누워있는 나사로의 모습, 그 이상 더 만족스러운 것이 없는 그런 모습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지옥에 있는 부자를 봅니다. 부자가 그 지옥 속에서 외치는 외침을 들어봅시다. 그는 첫 번째로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저 나사로의 손끝에 물 한 방울을 찍어서 내 혀를 적셔 주시옵소서.' 그는 이미 지옥에 가서 분위기를 파악했습니다. 머리가 보통 좋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 지옥은 한번 빠지면 이미 결판이 났고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달라고 아무리 졸라도 안되는 곳임을 눈치챘습니다. 그래서 그는 최소한의 것을 요구합니다. 나사로의 손끝에 물 한 방울을 찍어서 내 혀에 대달라고... 아브라함이 말합니다. '얘야, 너는 살았을 때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그것뿐만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있어서 뛰어넘을 수 없는 간격이, 단절이 생겼다. 그래서 갈 수가 없다.' 이 사람은 생각이 깊은 사람입니다. 두 번째 강청합니다. '아브라함이여, 나는 망했다고 칩시다. 그러나 내 아버지 집에 형제 다섯이 있는데 그 다섯 형제만은 이곳에 오지 않도록 해주시옵소서.' 그는 주위도 생각할 줄 알았던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이 말합니다. '아니라. 모세와 선지자의 말을 듣고 구원을 받아야 된다.' 부자는 말합니다. '아브라함이여, 아닙니다.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서 형님 전갈이라고 말하면 들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말합니다. '아니, 모세가 다시 살아나서 가도 안 믿을 사람은 안 믿는다.'

지옥은 고통의 장소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은 지옥의 중요한 요소들을 생각해 봅니다. 지옥이 없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그런데 지옥을 말하시는 분은 이사야도 아니고 예레미야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호세아도 아니고 아모스도 아닙니다. 세례 요한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지옥을 말합니다. 성경 전체를 보십시오. 지옥에 대해서 가장 심각하게 경고하시는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분은 창조를 아십니다. 시작을 아십니다. 끝을 압니다. 인생의 높이를 압니다. 저 깊은 낮음도 아십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그 분이 지옥의 실체에 대해서 확실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지옥을 부정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예수께서는 이 지옥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기 몸을 희생하셨습니다. 그 분이 지옥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를 위해서 죽어주신 그 분이 말하고 있습니다.

2차 대전 때입니다. 늘 상습적으로 안개가 짙게 끼어있는 장소 앞에 미군들이 서서 stop!이라는 사인을 붙여놨습니다. 사람들이 가지 말라는 그 팻말을 보고도 앞의 차가 쌩쌩 달리니까 뒤따라오던 차들도 따라 갑니다. 그런데 미군들이 가지 말라고 하는 그 손짓에 한 사람이 '말이 안 통하지만 저 사람들이 가지 말라고 저처럼 강청하니까 가지 말자'하고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다음날 아침 신문을 보니까 거기서 한 2km 뒤에 큰 교량이 폭파되어서 안개길로 몰고 가던 차 15대가 무참하게 그 밑에 떨어져서 박살이 난 것이었습니다.

지옥의 무서움을 경고하시는 주님입니다. 지옥의 고통이 얼마나 지독하고 고통스럽길래 그 분이 죽으셔야만 해결되었던 것입니다. 그 지옥은 고통의 장소입니다. 부자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이렇게 바꾸어도 됩니다. '고문 받고 있는 중에' 같은 단어입니다. 그냥 당하는 고통이 아니라 형벌의 고문을 당하고 있는 고통 중에 그는 아브라함과 그 품속에 있는 나사로를 본 것입니다. 우리는 지옥에서 어떤 고통을 받는지 잘 모릅니다. 어떤 형벌이 이 지옥에서 계속되는지 모릅니다. 요나단 에드워드 같은 사람은 설교하면서 '만약 내가 여러분을 단 5초만 지옥을 보여줄 수 있다면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살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고 외쳐댔습니다. 존 웨슬레도 말하기를 '가장 효과적인 설교는 지옥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지옥에 대해서 개념이 없습니다. 지옥은 무서운 형벌의 장소, 고문의 장소라고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옥은 자비가 끊어진 장소입니다.
두 번째로 이 지옥은 단 한 방울의 물의 자비도 끊어진 장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악인과 선인에게 햇빛과 비를 골고루 주십니다. 공평하십니다. 한없이 주십니다. 그런데 그처럼 흔한 물이 지옥에서는 단 한 방울도 허락되지 않습니다. 불 자체가 지옥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지옥 불 같은 불 속에 있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라는 세 친구는 7배나 더 뜨거운 풀무불 속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주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주님의 보호가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자비와 긍휼이 있었습니다.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았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불 자체가 지옥이 아닙니다. 주님의 자비가 끊어져버린 장소, 단 한 방울의 물의 자비마저도 말라버린 장소가 지옥입니다.

지옥에는 기회가 없습니다.
그런가하면 지옥에서는 다시는 기회가 없습니다. 거기 들어갔던 이 부자는 다시 기회 없는 줄 이미 눈치챘습니다. 만약 기회가 있었으면 그 유능한 능력으로 아마 예수님이라도 로비를 해서 천국으로 올라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먼저 물 한 방울만 요구하고 있고 그리고 자기가 이미 구원받지 못하는 것을 확실히 알면서 두 번째로 자기 형제들을 걱정하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다시 기회가 없습니다. 단절의 땅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현재 삶의 결과입니다.
그런가하면 그 지옥 가는 행로에는 그 사람의 삶 전체가 연계되어 있습니다. 여기 25절 보니까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살았던 삶입니다. 여기 부자가 돈이 많아서 지옥 간 것 아닙니다. 여기 나사로가 가난했고 거지였기 때문에 천국간 것도 아닙니다. 기억해야 됩니다. 그렇지만 이런 원리는 있습니다. 돈을 갖고 사회적인 신분과 명성이 있고 성공했으면 그 성공을 보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못 보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가난할 때 그처럼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던 사람이 돈이 많아지면 하나님과 담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회사에 처음 들어가서 신입사원으로 있을 때에는 매일 Q.T하던 사람이 과장이 되고 부장이 되고 이사가 되니까 하나님을 떠납니다. 이런 일은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성공이라는 것은 무서운 것입니다. 성공이 갖는 함정, 부요가 갖는 함정, 명성이 갖는 함정이 우리 하나님을 못 보게 만든다면 그 성공은 가장 무서운 실패이고, 사람들이 축복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잘못하면 무서운 저주가 됩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 실패했기 때문에 고통 중에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 실패는 성공입니다. 가난이 고통스럽고 불편하지만 그 가난 때문에 하나님을 온전히 붙잡을 수 있다면 가난이 성공일 수 있습니다. 하여튼 이 땅에 우리가 살았던 그 삶의 결과로 천국과 지옥이 결정된다는 사실입니다.

천국행은 심령이 가난한 자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천국은 오직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 말씀 증거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임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는 이미 결판난 인생이지만 우리 집에 있는 내 동생들은 이곳에 오지 않도록 나사로를 보내시옵소서.' '아니라. 나사로 아니라 모세를 다시 보내줘도 저들은 안믿을 것이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권사님이 계셨는데, 이 분이 뇌일혈로 쓰러지셨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크게 시멘트 바닥에 부딪쳤는지 뇌진탕이 되어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시체실에 놔두었습니다. 옛날에는 냉동실이 없는 시체실이었는데 이틀만에 그 분이 깨어났어요. 그래서 그 분은 평생 얼굴 반쪽이 새파란 멍 같은 것을 지니고 사셨습니다. 그 남편이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릅니다. 동네 방네 돌아다니면서 그 예수라는 사람 대단한 사람이라고, 예수가 자기 아내를 살려주었다고 하면서 외치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주일날 자기 자녀들이 교회에 안나가면 부지깽이 가지고 두들겨 패면서 깨워서 가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는 교회 안갑니다. 나중에 아내가 기도생활하고 즐거워하니까 자기 아내 위해서 좋은 장소에 기도원을 잘 지어줬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안믿습니다.

남서울교회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남서울교회 개척한 지 두 달쯤 되던 때입니다. 한 30명 모였을 때입니다. 한 성도의 가정에서 외국에 공부하러 갔던 딸이 심한 우울증을 갖고 와서 며칠 있다가 음독자살을 했습니다. 교인 30명밖에 안 되는데 한 가정이 그런 불행한 일을 만나니까 당시 온 교회 성도의 2/3가 한양대학 병원에 가서 병상을 지켰습니다. 나중에 한양대학병원 부원장이었던 그 아이의 작은 아버지가 형님에게 '형님, 끝났습니다. 산소 호흡기 뗍니다.' 말합니다. 산소호흡기를 떼었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님은 양보할 수 없다고, 숨이 넘어가도 오늘 밤만이라도 곁에 있게 해달라고 졸랐습니다. 저희들은 밤이 늦어 나와서 교회로 모두 모였습니다. 안나왔던 성도들에게까지 나오라고 전화해서 모두 밤새 철야기도를 했습니다. 새벽 4시쯤 이 아이가 살아났습니다. 지금은 미국에서 잘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집, 아버지는 안 믿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복음제시를 몇 차례 했는데, '홍목사님, 그 예수 믿는 것, 참 좋은 것입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새벽기도가면 건강에 얼마나 좋은지 나도 압니다.' 그런데 그 시간에 일어나서 교회는 안나오고 운동하시더라구요.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말해도 안 믿을 사람은 안 믿습니다. 신기한 방법이 예수 믿게 하는 것 아닙니다. 겸손한 마음이,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우리들은 중요한 결단을 해야됩니다. 슈바이처라는 젊은 철학도가 박사학위 공부하면서 음악을 좋아했기 때문에 늘 오르간을 연주했습니다. 그래서 교수하면서 오르간 연주자로 평생을 살까 하다가 이 성경 구절을 읽고 의과대학 들어갔습니다. 의과대학 마친 다음 그는 아프리카에 들어가서 평생을 흑인들을 살피면서 살았습니다. 이 구절 때문입니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될 것인가 결정하셔야 됩니다. 지금의 내 삶은 영원을 준비하는 영광스러운 시간입니다. 내 영원한 삶이 현재의 삶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시간에 구원받아서 천국의 소망이 확실한 사람들은 주변에 영원히 이별할 사람이 없는가를 돌아봐야 됩니다. 이런 사람도 있습니다. '남편 전도하지 않습니까?' 물으니까 '내가 이 날 이 때까지 그 남자 만나서 고생 고생했는데 영원까지 같이 살면 지겨워서 안되겠어요.' 이런 분도 있더라구요. 그렇게 확신하는 사람은 모르겠습니다. 운동화 바꿔 신으러 갔다가 사랑하는 사람과 50년간 다시 만나지 못한 사연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내 주변 사람들 중에 영원히 이별할 사람이 없는가를 살피시면서 하나님께서 은혜주실 때, 하나님께서 아직 결정적인 문을 닫고 있지 않을 그 시간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저들에게 증거해야 됩니다. 이것이 먼저 믿은 사람의 책임입니다. 오늘 이 시간 영원히 만나지 못할 자녀들은 없습니까? 배우자는 없습니까? 부모님은 없습니까? 이별의 아픔을 보면서 다시 만날 기회의 빛나는 약속을 붙잡아야겠습니다. 저희 어머님은 아버님 돌아가시니까 딱 가시기로 작정하시더라구요. 마지막 병원에 입원하는 날, 제가 업으니까 '나 제발 편히 보내라. 내가 다 견딜 테니까 병원에 안가고 여기서 있다가 바로 가게 하라.'그러나 그 말을 거역하고 모시고 삼성병원에 갔습니다. 임종하시는 순간, 자기 좋아하시던 그 분 만나서 그런지 활짝 웃으시더라구요. 재회의 땅이 우리를 위해 준비되어 있습니다. 영광스러운 땅입니다. 우리가 만나지 못해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보고 싶은 분들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 땅에 계십니다. 우리 주님의 품속에 있습니다. 우리는 다시 만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확신입니다. 영광의 재회가 우리를 위해 기다리고 있습니다. 천국에는 없는 것이 있습니다. 다시 이별이 없다고 말합니다.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습니다. 그 영광의 땅이 우리를 위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인생에게는 이 사이와 저 사이에 아무도 건널 수 없는 구렁 때문에 다시는 영원히 만나지 못할 영원한 이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께서 주신 구원을 감사하시면서 날마다 주께서 주시는 그 구원의 땅을 믿음으로 바라봅시다. 그리고 구원받지 못해서 영원히 이별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보이면 복음 전하고 위해서 기도해야 됩니다. 주께서 사모하는 심령의 그 기도를 들어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 귀한 은혜가 오늘 이 시간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영원한 비극(눅 16:19-31)

우리는 이 주간에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가를 온 몸으로 느꼈습니다. 불경에서는 가장 중요한 원리를 네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로 세상이 고생스럽다는 것을 아는 것, 고제(苦諦)입니다. 두 번째로는 그 고통의 근거가 집착에서 온다는 집제(集諦),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없앨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멸제(滅諦), 모든 것을 없앤 다음에 열반에 이른다고 해서 도제(道諦)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해서 고집멸도(苦集滅道)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 고통 가운데도 가장 큰 고통을 애별리고(愛別離苦),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고통이라고 합니다. 우리들은 이번 8.15 이산가족 상봉을 보면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뉘어 살고 이별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가를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습니다. 50년만에 만난 아들보고 기절한 어머니, 자기 이름을 부르면서 '내가 왔어요' 큰절을 해도 모르는 아버지, 몇 차례 거듭 봐도 정말 가슴 아픈 일 중에 가슴 아픈 장면들이었습니다. 이 고통이 이 민족에게서 언제나 떠날지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가, 또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가를 보면서 또 한가지 잊지 말아야 될 것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 짧은 순간 만났다가 헤어지는 고통도 있지만 영원한 만남과 영원한 이별의 인생도 우리 앞에 열려있다는 사실입니다.

부자와 나사로
여기 성경에 부자와 가난한 나사로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색 옷을 입었습니다. 이 자색은 로마 황실에서 전용으로 입는 색깔입니다. 자색의 빛깔은 깊은 시내의 고동 끝에서 조금씩 나오는 자연 색소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 옷 한 벌을 자색으로 온전히 물들이려면 엄청난 비용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황실은 자기의 권위를, 부자들은 자기의 부요를 드러내기 위해서 자색 옷을 입었었습니다. 거기다가 고운 베옷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운 베옷은 이집트에서 직조를 했습니다. 마에서 가장 가는 섬유로 천을 만들었기 때문에 한없이 부드럽고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그 값을 칠 때에는 옷 무게와 금을 똑같이 달아서 금 값을 지불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당시에 얼마나 많은 돈을 지불하고 그 고운 베옷을 입었는지 모릅니다. 오늘날 앙드레 김의 것과 상대가 안될 정도의 고급 옷을 입은 사람입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그는 날마다 호화롭게 연회를 베풀었습니다. 구두쇠가 아니었습니다. 친구들을 불러모아놓고 자기 좋은 것을 원 없이 나누고 같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쯤 되면 팔자 중에도 상팔자고 아마 온 인류가 이런 삶을 한번 살아봤으면 하고 흠모할 만큼 성공한 삶의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이 사람이 돈을 모을 때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모았다는 기록도 없고 또 악했다든지, 무자비했던 것 같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집 대문에는 거지가 살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어느 동네를 그렇게 말해야 될지 모르겟습니다만은 옛날에는 부자 동네 성북동에서 거지가 굶어죽는다고 말했습니다. 성북동의 높은 대문, 성처럼 높은 담들 밖에서 굶어죽었습니다. 부자들의 무자비함이 있습니다. 거지가 어디에서 사는가? 가난한 사람 동네에 삽니다. 그런데 이 부자는 한국의 성북동 부자보다 좀 낫습니다. 자기 대문에서 가난한 사람이 얻어먹는 것을 용인했습니다.

그 거지의 이름이 나사로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연회에서 남겨진 음식 부스러기를 얻어서 배를 채웠습니다. 그 문가에서 같이 음식을 나누던 개가 그 &54743;은 데를 핥아 주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 나사로가 몸이 약해져서 거지가 되었는지, 가난했기 때문에 병들었는지는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이 사람은 몹시 불행했고 고통받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아마 이런 인생은 세계 어디가도 살기 싫은 사람의 대표적인 유형일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공평하십니다. 공평하신 하나님은 두 사람에게 공평하게 주시는 것 있습니다. 죽음을 그들에게 공통적으로 주셨습니다.

거지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그 시신이 가마니에 싸여져서 어느 골짜기에 버려졌는지 잘 알 수 없습니다. 장사지냈다는 말이 전혀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다음에 그가 죽자 천사들에게 받들려서 아브라함 품속으로 갔다고 합니다. 부자는 안 죽기 위해서 발버둥을 쳤을 것입니다. 매일 골프를 치러 나갔는지도 모릅니다. 건강을 위해서 체지방을 어떻게 줄이는가 의사를 동원해서 매일 건강 밸런스를 체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인생도 죽었습니다. 죽은 다음에 이 사람의 장례식은 굉장했습니다. 죽어서도 저렇게 돈을 많이 써야 되는가 할 정도로 성대한 장례식을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저가 음부에서' 라고 말합니다. '하데스'라는 말은 '지하, 감옥'이라는 뜻입니다. 신약 성경은 지옥을 두 단어로 표현합니다. 하나는 '델라'라는 단어로 표현하는데 이것은 유대의 전통적인 개념으로 '불타고 있는 골짜기, 불이 꺼지지 않는 골짜기'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하데스'라는 것은 그리스에서 지하 세계를 하데스라고 그랬는데, 성경은 그것을 지옥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조금 다른 개념인데, 그 때 사람들이 죽으면 가는 곳을 '하데스'라고 했기 때문에 성경은 그 의미를 그대로 원용해서 사용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가 고통 중에서 눈을 들어 아브라함 품 속에 있는 나사로를 봅니다. 성경 본문은 '아브라함 품속에 아이처럼 누워있는 나사로'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장 편안한 자세, 위로가 있고, 깊은 자비가 있고 관심이 있는 아브라함의 품속에 누워있는 나사로의 모습, 그 이상 더 만족스러운 것이 없는 그런 모습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지옥에 있는 부자를 봅니다. 부자가 그 지옥 속에서 외치는 외침을 들어봅시다. 그는 첫 번째로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저 나사로의 손끝에 물 한 방울을 찍어서 내 혀를 적셔 주시옵소서.' 그는 이미 지옥에 가서 분위기를 파악했습니다. 머리가 보통 좋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 지옥은 한번 빠지면 이미 결판이 났고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달라고 아무리 졸라도 안되는 곳임을 눈치챘습니다. 그래서 그는 최소한의 것을 요구합니다. 나사로의 손끝에 물 한 방울을 찍어서 내 혀에 대달라고... 아브라함이 말합니다. '얘야, 너는 살았을 때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그것뿐만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있어서 뛰어넘을 수 없는 간격이, 단절이 생겼다. 그래서 갈 수가 없다.' 이 사람은 생각이 깊은 사람입니다. 두 번째 강청합니다. '아브라함이여, 나는 망했다고 칩시다. 그러나 내 아버지 집에 형제 다섯이 있는데 그 다섯 형제만은 이곳에 오지 않도록 해주시옵소서.' 그는 주위도 생각할 줄 알았던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이 말합니다. '아니라. 모세와 선지자의 말을 듣고 구원을 받아야 된다.' 부자는 말합니다. '아브라함이여, 아닙니다.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서 형님 전갈이라고 말하면 들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말합니다. '아니, 모세가 다시 살아나서 가도 안 믿을 사람은 안 믿는다.'

지옥은 고통의 장소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은 지옥의 중요한 요소들을 생각해 봅니다. 지옥이 없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그런데 지옥을 말하시는 분은 이사야도 아니고 예레미야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호세아도 아니고 아모스도 아닙니다. 세례 요한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지옥을 말합니다. 성경 전체를 보십시오. 지옥에 대해서 가장 심각하게 경고하시는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분은 창조를 아십니다. 시작을 아십니다. 끝을 압니다. 인생의 높이를 압니다. 저 깊은 낮음도 아십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그 분이 지옥의 실체에 대해서 확실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지옥을 부정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예수께서는 이 지옥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기 몸을 희생하셨습니다. 그 분이 지옥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를 위해서 죽어주신 그 분이 말하고 있습니다.

2차 대전 때입니다. 늘 상습적으로 안개가 짙게 끼어있는 장소 앞에 미군들이 서서 stop!이라는 사인을 붙여놨습니다. 사람들이 가지 말라는 그 팻말을 보고도 앞의 차가 쌩쌩 달리니까 뒤따라오던 차들도 따라 갑니다. 그런데 미군들이 가지 말라고 하는 그 손짓에 한 사람이 '말이 안 통하지만 저 사람들이 가지 말라고 저처럼 강청하니까 가지 말자'하고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다음날 아침 신문을 보니까 거기서 한 2km 뒤에 큰 교량이 폭파되어서 안개길로 몰고 가던 차 15대가 무참하게 그 밑에 떨어져서 박살이 난 것이었습니다.

지옥의 무서움을 경고하시는 주님입니다. 지옥의 고통이 얼마나 지독하고 고통스럽길래 그 분이 죽으셔야만 해결되었던 것입니다. 그 지옥은 고통의 장소입니다. 부자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이렇게 바꾸어도 됩니다. '고문 받고 있는 중에' 같은 단어입니다. 그냥 당하는 고통이 아니라 형벌의 고문을 당하고 있는 고통 중에 그는 아브라함과 그 품속에 있는 나사로를 본 것입니다. 우리는 지옥에서 어떤 고통을 받는지 잘 모릅니다. 어떤 형벌이 이 지옥에서 계속되는지 모릅니다. 요나단 에드워드 같은 사람은 설교하면서 '만약 내가 여러분을 단 5초만 지옥을 보여줄 수 있다면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살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고 외쳐댔습니다. 존 웨슬레도 말하기를 '가장 효과적인 설교는 지옥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지옥에 대해서 개념이 없습니다. 지옥은 무서운 형벌의 장소, 고문의 장소라고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옥은 자비가 끊어진 장소입니다.
두 번째로 이 지옥은 단 한 방울의 물의 자비도 끊어진 장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악인과 선인에게 햇빛과 비를 골고루 주십니다. 공평하십니다. 한없이 주십니다. 그런데 그처럼 흔한 물이 지옥에서는 단 한 방울도 허락되지 않습니다. 불 자체가 지옥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지옥 불 같은 불 속에 있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라는 세 친구는 7배나 더 뜨거운 풀무불 속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주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주님의 보호가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자비와 긍휼이 있었습니다.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았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불 자체가 지옥이 아닙니다. 주님의 자비가 끊어져버린 장소, 단 한 방울의 물의 자비마저도 말라버린 장소가 지옥입니다.

지옥에는 기회가 없습니다.
그런가하면 지옥에서는 다시는 기회가 없습니다. 거기 들어갔던 이 부자는 다시 기회 없는 줄 이미 눈치챘습니다. 만약 기회가 있었으면 그 유능한 능력으로 아마 예수님이라도 로비를 해서 천국으로 올라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먼저 물 한 방울만 요구하고 있고 그리고 자기가 이미 구원받지 못하는 것을 확실히 알면서 두 번째로 자기 형제들을 걱정하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다시 기회가 없습니다. 단절의 땅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현재 삶의 결과입니다.
그런가하면 그 지옥 가는 행로에는 그 사람의 삶 전체가 연계되어 있습니다. 여기 25절 보니까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살았던 삶입니다. 여기 부자가 돈이 많아서 지옥 간 것 아닙니다. 여기 나사로가 가난했고 거지였기 때문에 천국간 것도 아닙니다. 기억해야 됩니다. 그렇지만 이런 원리는 있습니다. 돈을 갖고 사회적인 신분과 명성이 있고 성공했으면 그 성공을 보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못 보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가난할 때 그처럼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던 사람이 돈이 많아지면 하나님과 담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회사에 처음 들어가서 신입사원으로 있을 때에는 매일 Q.T하던 사람이 과장이 되고 부장이 되고 이사가 되니까 하나님을 떠납니다. 이런 일은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성공이라는 것은 무서운 것입니다. 성공이 갖는 함정, 부요가 갖는 함정, 명성이 갖는 함정이 우리 하나님을 못 보게 만든다면 그 성공은 가장 무서운 실패이고, 사람들이 축복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잘못하면 무서운 저주가 됩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 실패했기 때문에 고통 중에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 실패는 성공입니다. 가난이 고통스럽고 불편하지만 그 가난 때문에 하나님을 온전히 붙잡을 수 있다면 가난이 성공일 수 있습니다. 하여튼 이 땅에 우리가 살았던 그 삶의 결과로 천국과 지옥이 결정된다는 사실입니다.

천국행은 심령이 가난한 자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천국은 오직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 말씀 증거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임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는 이미 결판난 인생이지만 우리 집에 있는 내 동생들은 이곳에 오지 않도록 나사로를 보내시옵소서.' '아니라. 나사로 아니라 모세를 다시 보내줘도 저들은 안믿을 것이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권사님이 계셨는데, 이 분이 뇌일혈로 쓰러지셨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크게 시멘트 바닥에 부딪쳤는지 뇌진탕이 되어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시체실에 놔두었습니다. 옛날에는 냉동실이 없는 시체실이었는데 이틀만에 그 분이 깨어났어요. 그래서 그 분은 평생 얼굴 반쪽이 새파란 멍 같은 것을 지니고 사셨습니다. 그 남편이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릅니다. 동네 방네 돌아다니면서 그 예수라는 사람 대단한 사람이라고, 예수가 자기 아내를 살려주었다고 하면서 외치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주일날 자기 자녀들이 교회에 안나가면 부지깽이 가지고 두들겨 패면서 깨워서 가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는 교회 안갑니다. 나중에 아내가 기도생활하고 즐거워하니까 자기 아내 위해서 좋은 장소에 기도원을 잘 지어줬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안믿습니다.

남서울교회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남서울교회 개척한 지 두 달쯤 되던 때입니다. 한 30명 모였을 때입니다. 한 성도의 가정에서 외국에 공부하러 갔던 딸이 심한 우울증을 갖고 와서 며칠 있다가 음독자살을 했습니다. 교인 30명밖에 안 되는데 한 가정이 그런 불행한 일을 만나니까 당시 온 교회 성도의 2/3가 한양대학 병원에 가서 병상을 지켰습니다. 나중에 한양대학병원 부원장이었던 그 아이의 작은 아버지가 형님에게 '형님, 끝났습니다. 산소 호흡기 뗍니다.' 말합니다. 산소호흡기를 떼었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님은 양보할 수 없다고, 숨이 넘어가도 오늘 밤만이라도 곁에 있게 해달라고 졸랐습니다. 저희들은 밤이 늦어 나와서 교회로 모두 모였습니다. 안나왔던 성도들에게까지 나오라고 전화해서 모두 밤새 철야기도를 했습니다. 새벽 4시쯤 이 아이가 살아났습니다. 지금은 미국에서 잘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집, 아버지는 안 믿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복음제시를 몇 차례 했는데, '홍목사님, 그 예수 믿는 것, 참 좋은 것입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새벽기도가면 건강에 얼마나 좋은지 나도 압니다.' 그런데 그 시간에 일어나서 교회는 안나오고 운동하시더라구요.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말해도 안 믿을 사람은 안 믿습니다. 신기한 방법이 예수 믿게 하는 것 아닙니다. 겸손한 마음이,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우리들은 중요한 결단을 해야됩니다. 슈바이처라는 젊은 철학도가 박사학위 공부하면서 음악을 좋아했기 때문에 늘 오르간을 연주했습니다. 그래서 교수하면서 오르간 연주자로 평생을 살까 하다가 이 성경 구절을 읽고 의과대학 들어갔습니다. 의과대학 마친 다음 그는 아프리카에 들어가서 평생을 흑인들을 살피면서 살았습니다. 이 구절 때문입니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될 것인가 결정하셔야 됩니다. 지금의 내 삶은 영원을 준비하는 영광스러운 시간입니다. 내 영원한 삶이 현재의 삶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시간에 구원받아서 천국의 소망이 확실한 사람들은 주변에 영원히 이별할 사람이 없는가를 돌아봐야 됩니다. 이런 사람도 있습니다. '남편 전도하지 않습니까?' 물으니까 '내가 이 날 이 때까지 그 남자 만나서 고생 고생했는데 영원까지 같이 살면 지겨워서 안되겠어요.' 이런 분도 있더라구요. 그렇게 확신하는 사람은 모르겠습니다. 운동화 바꿔 신으러 갔다가 사랑하는 사람과 50년간 다시 만나지 못한 사연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내 주변 사람들 중에 영원히 이별할 사람이 없는가를 살피시면서 하나님께서 은혜주실 때, 하나님께서 아직 결정적인 문을 닫고 있지 않을 그 시간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저들에게 증거해야 됩니다. 이것이 먼저 믿은 사람의 책임입니다. 오늘 이 시간 영원히 만나지 못할 자녀들은 없습니까? 배우자는 없습니까? 부모님은 없습니까? 이별의 아픔을 보면서 다시 만날 기회의 빛나는 약속을 붙잡아야겠습니다. 저희 어머님은 아버님 돌아가시니까 딱 가시기로 작정하시더라구요. 마지막 병원에 입원하는 날, 제가 업으니까 '나 제발 편히 보내라. 내가 다 견딜 테니까 병원에 안가고 여기서 있다가 바로 가게 하라.'그러나 그 말을 거역하고 모시고 삼성병원에 갔습니다. 임종하시는 순간, 자기 좋아하시던 그 분 만나서 그런지 활짝 웃으시더라구요. 재회의 땅이 우리를 위해 준비되어 있습니다. 영광스러운 땅입니다. 우리가 만나지 못해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보고 싶은 분들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 땅에 계십니다. 우리 주님의 품속에 있습니다. 우리는 다시 만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확신입니다. 영광의 재회가 우리를 위해 기다리고 있습니다. 천국에는 없는 것이 있습니다. 다시 이별이 없다고 말합니다.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습니다. 그 영광의 땅이 우리를 위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인생에게는 이 사이와 저 사이에 아무도 건널 수 없는 구렁 때문에 다시는 영원히 만나지 못할 영원한 이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께서 주신 구원을 감사하시면서 날마다 주께서 주시는 그 구원의 땅을 믿음으로 바라봅시다. 그리고 구원받지 못해서 영원히 이별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보이면 복음 전하고 위해서 기도해야 됩니다. 주께서 사모하는 심령의 그 기도를 들어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 귀한 은혜가 오늘 이 시간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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