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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적음 믿음 (눅 08: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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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음 믿음(눅 8:22-25)

이스라엘을 여행하는 사람들, 성지순례하는 사람들이 실망을 참 많이 합니다. 왜냐하면 곳곳마다 상혼(商魂)들이 깃들어서 우리 주님께서 성전에서 장사치 몰아내던 그런 마음이 울컥 솟는 데가 한 두 곳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의 성지 중 하나라도 장사꾼의 상술로 단장 안된 곳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데가 있습니다. 800m 아래, 여리고라는 저지대를 지나 엔게디 광야에 가면 사해가 눈앞에 펼쳐집니다. 수영복을 입고 사해에 들어가면 빠져 죽고 싶어도 물에 빠지지 않는 이상한 현상을 경험합니다. 사람들이 너나할 것 없이 모두 벗고 사해의 신기한 현상을 몸으로 경험합니다. 잠수를 했다 올라올 때 조심해야될 것은 그 짠물이 눈에 들어가면 눈에서 불이 납니다. 실명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조금만 들어간 기색이 있어도 눈이 어떻게 따가운지 혼이 납니다. 그것 하나만 조심해 수영하면 저쪽 건너편의 요르단까지도 별 무리가 없이 누구든지 헤엄쳐 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해의 비극은 모든 물이 해저 400m가 되는 낮은 지역으로 몰려들고는 다른 곳으로 그 물이 빠져나가지 않는데 있습니다. 계속 뜨거운 햇빛에 증발되어 가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래서 그 사해는 어떤 생물도 살지 못하는 문자 그대로 죽음의 바다입니다. 신기해도 죽음입니다.

그런데 북쪽으로 요단강을 따라서 올라가면 요단강 발원지에 아름다운 호수가 하나 있습니다. 길이가 13 마일, 그러니까 한 50리 정도 됩니다. 눈으로 보면 어디든지 그 끝이 쉽게 보입니다. 폭이 7.5 마일, 계란형인 호수입니다. 지중해 보다 약 204m가 낮습니다. 그러니까 요단강으로 물이 흘러가기는 가는데 거기는 해저 204m 이고, 사해는 해저 400m입니다. 갈릴리는 요단강을 통해서 헐몬산에서 흘러드는 물을 전부 모아놓았다가 이스라엘 전역에 물을 공급합니다. 갈릴리는 생명의 원천입니다. 무수한 물고기들이 살고 거기서 흘러나간 물이 전 이스라엘의 초목을 소생시켜 줍니다. 생명의 장소입니다. 참 아름답습니다. 지금도 사람의 손때가 많이 묻어있지 않기 때문에 옛날 우리 주님께서 그곳에 계셨던 그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바다 사해에서는 한번도 일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주님은 태어나기는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태어났지만 대체의 사역지, 그리고 어렸을 때 성장했던 성장 배경지는 갈릴리입니다. 나사렛이 갈릴리에 있었고 처음 기적을 행했던 가나가 갈릴리의 조금 높은 지점에 있고, 가장 많은 사역을 했던 가버나움은 갈릴리 주변의 가장 큰 호수 도시입니다. 지금도 곳곳에 주님 사셨을 당시의 역사적인 장소들이 남아서 우리를 반겨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대부분 이곳에서 사역을 하셨습니다. 거기서 산상수훈을 말씀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세운 지혜로운 사람 같으니... ' 주옥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을 뿐 아니라 거기서 제자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선정하시고 양육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어느 날 그 갈릴리에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고 계셨습니다. 피곤하신 주님께서 배 고물에 머리를 기대고 깊이 잠들었습니다. 그 때 바람이 불기 시작합니다. 헐몬산은 해발 3000m 가 되는 높은 산입니다. 우리의 백두산과 높이가 거의 비슷한데, 백두산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백두산은 계속되는 장백산맥의 줄기로 점진적으로 높이 올라가서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자동차로도 올라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헐몬산은 바로 지중해에서 급경사로 올라갔기 때문에 더 높게 보입니다. 그리고 어떤 조건에 의해서 이 갈릴리 호수 주변이 뜨거운 공기로 가득찰 때 3000m가 되는 높은 산의 찬바람과 대류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더운 공기는 위로 빠지고 위에 있는 찬바람은 아래로 내려오는데 그 기세가 엄청납니다. 그것을 당해본 어떤 분이 경험담을 이야기하는데, 벽돌이 날아가더래요. 얼마 전에 제주도 한림이라는 곳에서도 태풍이 불 때 마을이 다 뽑히고 자동차들이 뒤집혔지요? 미국에서도 토네이도가 한번 불면 이런 일이 어디든지 있습니다. 몇십 호된 마을이 터만 남고 한꺼번에 다 없어진 것을 많이 봤습니다. 8기통 짜리 차가 위로 붕 떴다가 떨어집니다. 조명철탑이 무 뽑혀진 것처럼 10m, 20m 밖으로 뽑혀서 나뒹굴어져있는 것을 참 많이 봅니다. 아마 제자들 대부분이 어부인지라 이런 바람에, 흉맹한 태풍을 경험했던 것 같습니다. 거센 바람이 계속 뱃전에 물을 퍼부어 주었고 그 배가 잠기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다급히 외칩니다. '예수님, 우리가 죽게 된 것을 안 돌아봅니까?' 우리 주님을 깨웁니다. 우리 주께서 일어나셨습니다. '왜 두려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꾸중하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바다를 보고 '잔잔하라. 평안하라.' 그러자 물이 잔잔해졌습니다. 평안해졌습니다. 제자들은 그 사건을 보고 '저 분이 뉘시기에 바람과 바다가 잔잔하는가?' 의아해했습니다.

오늘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들이 정확하게 붙잡아야될 진리가 있습니다. 첫 번째입니다. 그 분이 누구인가 입니다. 당신에게 예수는 누구입니까? 세상에 많은 지식은 지식 자체로 끝납니다. 그런데 예수에 대한 지식은 내 생명과 죽음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칩니다. 내 생애에 가장 큰 지식입니다. 그 분은 누구입니까? 바람이 그 앞에 순종했습니다. 아니 그것뿐입니까? 그 분은 말씀 한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빛이 있으라 명령하시매 빛이 생겼던 것입니다. 그 분이 문둥병자를 만지시면 깨끗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요 며칠 전에도 왕의 신하의 아들이 가보지도 않고 말씀 한 마디로 건강해졌습니다. '주여 내게 오심을 내가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내 밑에 있는 사람들이 내가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옵니다. 주께서 말씀만 하시옵소서.'라고 말해 칭찬 받았던 백부장은 주께서 '네 믿음대로 되리라.'는 말씀으로 그 아들이 질병에서 구함을 받습니다. 또 야이로의 죽었던 딸에게 '달리다굼 어린 양아 일어나라' 명령하니까 시체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신, 완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우리는 여기서 성육신의 신비를 봐야 됩니다. 그 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무소부재 하십니다. 그런 그 분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오셔서 완전한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그 분은 피곤한 육신을 가지고 노한 풍랑이 배를 흔드는 지도 모르는 채 깊이 잠이 들었습니다. 제가 목사로서 고통스러울 때가 언제인가 하면 특별한 기간 한 5일 정도 금식기도 들어가서 씨름을 하는데, 나중에는 졸음이 쏟아집니다. 며칠도 안 되었는데 졸음이 와서 살을 꼬집어 피멍이 들어도 졸려요. 그래서 기도 반, 취침 반 하다 올 때가 있습니다. 참 부끄럽습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 보니까 여기 예수님도 풍랑 속에서 주무셨어요. 안심했습니다. 성육신의 비밀은 빛이 있으라 명령함으로 천지창조하신 그 거대한 힘이 엄마의 젖꼭지를 빨고 있는 오물거리는 입으로 변해있고 젖꼭지를 물려주지 않으면 굶어죽을 인생으로 오셨다는데 있습니다. 강보에 쌓아주지 않으면 얼어죽을 인생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개념으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이론으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신학으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주께서는 어린 아가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주께서는 우리 인생이 당하는 모든 고통을 다 당하셨습니다. 주님도 외로웠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공중 나는 새도 깃들일 둥지가 있고 여우도 굴이 있다. 그러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어떤 때 사면초가 되어서 아무리 해도 안되는 때가 있지 않습니까? 너무 외로워서 눈물로 밤을 지새우는 때가 있지 않습니까? 또 가난이 싫지 않습니까? 그 분은 태어날 때부터 가난하셨습니다. 날 때가 없어서 구유통에 나셨습니다. 이렇게 가난하게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요? 그 분은 완전한 인생으로 오셨기 때문에 목마르셨습니다. 수가성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성과 없을 때 화가 나지요? 자식을 열심히 키우려고 노력했는데 잘 안 따라주면 화가 납니다. 목사가 말씀을 열심히 가르쳤는데 성도들의 삶이 변화되지 않으면 화가 나요. 예수님도 그러셨을 것입니다. 기껏 제자들에게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라고 겸손을 가르쳤는데 제자들은 끝까지 '누가 크냐?'를 문제삼았습니다. 그런데 그 문제는 오늘 우리 교회도 있고 내 삶에도 있는 문제입니다. '누가 높으냐?' 우리 인생이 그렇습니다. 도무지 내 본질이 안바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제자들을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내가 얼마 있다가 사람들에게 끌려가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데 이 죽음은 인류의 모든 죄를 대속한 죽음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는다고 하니까 '주여, 그리 마소서.' 말립니다. 아무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의미를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단지 한 여자, 마리아만이 옥합을 깨뜨려서 주님의 죽으심을 예비했습니다. '배반자의 가슴은 세상의 어떤 삭풍 보다 더 차고 예리하다'고 맥베드가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인간관계에서 배반의 아픔을 경험합니다. 그런데 주께서도 배반을 당하셨습니다. 그처럼 깊이 애정으로 키운 제자가 자신을 기어코 은 삼십에 팔아 넘겼습니다. 이런 배반을 당해보셨습니까? 주님은 당하셨습니다. 여러분, 고민해보셨습니까? 얼마나 고민해보셨습니까? 예수님은 고민해서 엎드려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다가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는데 땀방울로 끝나지 않습니다. 땀방울이 변해서 핏방울로 바뀝니다. '내가 고민하여 심히 죽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고민했던 그 고민 보다 더 깊은 고민의 자리에 계셨습니다. 여러분, 절망해보셨습니까? 예수께서 절망하고 계신 현장을 가봅시다.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 절망의 장소에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해보셨습니까? 우리 예수님은 십자가에 대롱대롱 매달린 고통 속에서도 찌르는 칼처럼 예리하게 파고 드는 아픔으로 울고 있는 사랑하는 어머니 마리아가 눈에 들어옵니다. 그러자 옆에 있는 요한에게 부탁합니다. '요한아, 네 어머니다. 네가 나를 좀 대신해달라.' 여러분, 우리 주님의 모든 생애에 내 인생이 당했던 모든 고통, 내 인생의 모든 풍랑이 다 녹아있습니다. 완전한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입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이 완전한 사람으로 오셔서 이 땅에서 내가 당한 모든 고통을 다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4장 1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큰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우리와 똑같은 시험을 다 당했다고 말합니다. 단지 그 분은 그 시험에서 범죄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완전하게 이 땅에 오신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라봅시다. 그 때에 우리들은 믿음의 대상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만나게 됩니다.

두 번째 진리입니다. 그 분과 함께 하는 이 배에 풍랑이 불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한 후, 임마누엘의 주님이 있는데도 우리 인생에 풍랑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인생 누구에게나 영적인 침체, 질병의 고통, 인간관계의 아픔이 있습니다. 잘못 가르치는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마술적인 신앙을 가르칩니다. 예수 믿으면 만사 형통하고 무병하고 무엇이든 다 잘 된다고... 제가 단언합니다. 그것은 사기입니다. 그런 일이 없습니다. 그것은 진통제입니다. 사실 아닙니다. 예수 믿어도 풍랑은 계속 됩니다. 모든 것이 귀신 때문이라고 자기는 책임을 안지는 사람들이 있어요. 사실이 아닙니다. 인생의 풍랑은 계속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훈련시키시는데 우리를 얕은 물가에 땅 짚고 헤엄치도록만 부르시지 않고 깊은 물에서도 수영할 수 있는 인생으로 부르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수영장에서만 수영하도록 훈련시키시지 않고 낙산사에 가서 거친 파도 앞에서도, 저 연해주를 향해서도, 저 일본을 향해서도 수영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길 원하십니다. 얼마 전에 신문에 보니까 조오련 선수가 현해탄을 수영해서 건너가더라구요. 얼마나 멋집니까? 그러다가 빠져 죽으면 어떻게 할까 걱정도 되지만 하여튼 통쾌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연약한 인생으로 끝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 1:29) 또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거든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하리라...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선언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도리어 크게 기뻐함은 너희 믿음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같이 귀하여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 칭찬과 영광과 존귀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 1:6-7) 그 고통을 통해서 존귀함을 얻게 해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환난을 계속 당합니다. 환난이 없어질 것이라고 기대하지 마세요. 대학교만 졸업하면 인생 될 것 같더니 직장에 가니까 또 은퇴가 있습니다. 가만히 보니까 낙이라는 것은 주님 앞에 가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아요. 요즘 가만히 묵상하고 기도해보니까 우리가 쓸데없는 데에 너무 바쁘고 분요한 것 같습니다. 저번에는 제게 당뇨가 한번 지나가더니 이번에는 허리 디스크가 또 와서 내가 가야될 곳을 더 잘 바라봐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런 환난은 '네 집이 여기 아니다. 네가 가야될, 내가 마련한 집이 따로 있다.'는 경고 같습니다.

세 번째입니다. 그 환난 때 주께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이 말씀은 필요할 때 믿을 수 없다면 그 믿음의 유익이 무엇이냐는 질문입니다. 실제로 활용할 수 없는 믿음이라면 진정한 가치가 어디 있겠느냐고 말하고 있습니다. 청명한 날에 예수를 믿습니다. 그런데 바람 부는 날에 믿지 못하면 그 믿음이 무슨 의미가 있느냔 말이예요. 성공할 때 예수 믿다가 실패할 때 예수 안믿으면 그 믿음이 도대체 어디 있느냔 말이예요. 형통의 날에 예수 믿다가 고통의 날에 믿음이 사라진다면 네 믿음은 어디 있느냐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난 금요일 철야기도회 때 설교 말씀을 듣던 중에 제 마음에 참 감동을 준 사연이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 나오시는 분이어서 제가 이렇게 소개하는 것이 실례가 될 것 같은 마음이 있어 죄송한데, 그래도 한번 용기를 내서 말해보겠습니다. 저희 교회에 폐가 뼈처럼 단단하게 굳어지는 석화 되어가는 희귀 질병을 앓고 있는 분이 계십니다. 제가 누구인지는 잘 모릅니다. 그런데 그 분이 믿음 생활하면서 이것이 많이 호전되었습니다. 이 분이 생업으로 노점상을 하십니다. 식료품을 떼어다가 노점에서 팝니다. 그런데 이 분은 식료품을 팔면서도 그냥 값싸고 확인 안된 식료품은 절대로 손대지 않고 내 식구에게 음식을 먹인다는 마음으로 정성껏 좋은 것을 골라 최소한의 이익을 붙여서 팔았습니다. 많은 이익은 못 얻지만 정직하게 노점상을 하며 생활을 열심히 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두 달 전에 그 앞에 큰 빌딩이 들어서니까 단골 손님들도 오지 않고 장사가 되지 않아 할 수 없이 두 달 동안 영업을 못한 채 집에서 쉬고 있답니다. 그런데 그 분 마음속에 불평과 원망이 없습니다. 그 분은 수화교실에서 수화를 지금 열심히 배우고 계십니다. 청각 장애우들을 도우려고 그렇게 준비하고, 또 매일 저녁이면 온 가족을 모아놓고 아름답게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린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성공했다고 세상 사람이 놀라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대통령 되어도 아무도 안놀랍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재벌 되었다고 아무도 안놀랍니다. 고통 중에 있는 성도가 그 고통에 무너지지 않는 인생을 믿음으로 살 때 사람들에게 충격이 됩니다. 똑같이 슬픔을 가져야 될 사람이 슬픔을 딛고 일어서서 주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볼 때 사람들에게 충격이 됩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가 한국에 우뚝우뚝 선다고 세계는 놀라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제 때 그 고통의 옥중에서도 영광의 하나님을 향해서 찬송하고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을 향해서 사랑을 보여준 것이 충격입니다. 자기 아들을 죽인 사람을 향해 그 고통 중에서도 양자 삼으신 손양원 목사님은 문자 그대로 사랑의 원자탄으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감동을 주지 않습니까? 이 글은 뉴욕의 재활병원에 써진 글을 한국의 실로암 안과병원에 붙여놓은 글입니다. 한 환자의 신앙고백입니다.

“큰 일을 이루기 위해 힘을 주십사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겸손을 배우라고 연약함을 주셨습니다. 많은 일을 하려고 건강을 구했더니 보다 가치 있는 일을 하라고 병을 주셨습니다. 행복해지고 싶어 부유함을 구했더니 지혜로워지라고 가난을 주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자 성공을 구했더니 뽐내지 말라고 실패를 주셨습니다.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달라고 기도했더니 모든 것 누릴 수 있는 삶, 그 자체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구한 것 하나도 주어지지 않은 줄 알았는데 내 소원 모두 들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못한 삶이었지만 미처 표현 못한 기도까지 모두 들어주셨습니다. 나는 가장 많은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여러분의 실패 때, 여러분의 고통 때, 여러분의 좌절 때, 여러분이 억울할 때, 여러분의 믿음은 어디 있습니까?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혀 있었습니다. 뒤에는 애굽의 대군이 몰려들었습니다. 사람들의 눈앞에 보이는 것은 죽음 자체였습니다. 절망이었습니다.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그 때 믿음을 가진 모세가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출 14:13)고 외칩니다. 그 깊은 고통이 있었기에 모세의 믿음은 영광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사자 굴이 없는 다니엘의 영광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고통의 때, 여러분의 믿음이 어디 있습니까? 주께서 묻고 계십니다.

참으로 고맙고 감격스럽고 참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는 것은 내 적은 믿음을 주께서는 물리치시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모세처럼 그 어려움 속에 의연하게 하나님 영광을 보여주는 믿음을 못가졌습니다. 슬프면 슬픕니다. 좌절할 때 아픕니다. 인간 관계가 잘 안될 때 고통스럽습니다. 어떤 때 '하나님 왜 나만 이 일 당해야 됩니까? 다른 사람은 편하게도 하는데 왜 나만 이 길 가야 됩니까?' 항의하고 싶은 때도 참 많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적은 믿음을 가진 제자들, 전능자이신 주님께서 그 배에 있는데도 믿음 없이 우왕좌왕하는 그 제자들을 주님이 외면하신 것이 아니라 꾸중하시지만 그들의 간구를 들어주십니다. 든든한 믿음을 가진 사람만 받아주신다면 나는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야, 너 믿음이 그것 밖에 없느냐?' 꾸중하시면서도 폭풍도 못 깨운 주님을 사랑하는 제자들의 탄원의 소리에 일어나셨습니다. 그 적은 믿음을 외면하시지 않고 주께서 드디어 말씀하셨습니다. '고요하라. 잔잔하라' 그 말씀 앞에 고요해졌습니다. 믿음이 없는 것 같다고 도망가지 마십시오. 주님 앞으로 더 가까이 가십시오. 주님께 내가 믿음이 없사오니 믿음 없는 것을 도와달라고 강청하십시오. 기도가 안될 때 있습니까? 모래 씹는 것처럼 아무리 기도하려 해도 헛 바퀴 도는 것 같이 고통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 때도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주여, 내가 기도할 수 없습니다. 기도를 주시옵소서.' 도망가지 마세요. 그 분 앞에 나오세요. 겸손하게 나오세요. 우리의 신음마저도 들어주시는 자비로우신 주님이십니다. 내 못남을 아시는 주님이십니다. 내 절망과 좌절의 깊이를 당해보신 주님입니다. 그 주님께서 오늘 말씀하십니다. '너는 네가 가진 그 고통, 아픔, 실패, 절망을 가지고 내게 나오기만 하라. 내가 네 기도에 귀를 기울이겠다. 그러면 너는 문을 열어서 내 말씀을 봐라. 내가 너에게 한 말을 들어라. 잔잔하라 평안하라 말하지 않느냐?' 연약한 것을 체휼하시는 우리 하나님은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당했기 때문에 인생이 시험을 이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줄 아십니다. 내가 넘어졌습니다만 다시 믿음으로 일어날 때 일흔 번의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시는 우리 주님 앞에 몸을 맡기고 나가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들, 네가 그것 해결하고 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대로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내가 해결하려고 듭니까? 건방진 태도입니다. 주께서 가져오라고 했으면 가져가야지요. 믿음으로 나아가십시다. 주께서 갈릴리 호수에서 베푸셨던 이 기적이 내 인생 속에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임마누엘 주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완전한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내 모든 고통과 아픔을 아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 인생이 고통 당할 때 얼마나 연약한 줄 아십니다. 그 주님 앞에 나아갑시다. 이 시간 같이 기도합시다. 내가 당하는 가장 큰 풍랑, 내 인생에 있어서 이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해결 안 되는 아픔, 고통의 심연을 주님 앞에 가지고 나옵시다. 주님께 구합시다. 주님 앞에 외칩시다. 신음하면서 외칩시다. 창피하지만 말합시다. 꾸중들어도 괜찮습니다. 꾸중하시지만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시는 주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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