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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최선의 선택 (눅 10:3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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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의 선택(눅10:38-42)

제 친구 가운데 바우 목사 라는 베트남 사람이 있습니다. 이 분과 제가 만났던 것은 1972년 말에 서 1973년도 초 쯤 됩니다. 이 분이 총회신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다시 베트남으로 돌아가서 월남장로교회 를 개척해서 세우고 또 월남신학교 를 만들어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 다. 그리고 제가 당시 건국대학교 교목일을 보면서 문화촌 동성교회에 서 설교로 돕고 있을 때 그 분이 특 별 강사로 오셨습니다. 자기가 어떻 게 예수 믿게 되었는지, 한국에 와 서 어떻게 공부를 했는지를 설명했 습니다. 그러면서 그 분이 제 마음 에 큰 도전을 주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 빨리 재림하시라고 기도하지 마세요. 여러분 나라야 예수 믿는 사람 많고 복음이 들려질 만큼 들려 졌지만 지금 주님 오시면 우리 베트 남 사람들은 모두 다 지옥가야 됩니 다. 예수님 재림을 위해서 기도하지 말아주세요'
라는 간절한 이야기가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아픔을 주었 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월남에서 어 떻게 사역하고 있는가를 이야기하면 서
'여러분이 지금 월남에 많은 것 을 투자했습니다. 군대도 보냈고 교 육자도 보냈고 의사도 보냈고 상사 원도 보냈고 여러 부분에 많은 사람 을 보냈는데 왜 선교사는 보내주지 않습니까? 그리고 월남을 위해서 많 은 돈을 지원하면서도 사람을 가르 치는 일에는 지원하지 않습니까?'하 는 것이었습니다. 저녁에 와서 그 설교가 생각나 잠을 잘 수가 없었습 니다. 어떻게 돕기는 도와야겠는데... 그 때 전셋집 5만원 짜리, 월세가 아닌 전세 5만원 짜리 집에서 살고 있는 주제에 정말 줄 것이 없어서 참 마음에 고통이 왔습니다. 머리만 닿으면 수직으로도 자는 제가 잠을 못 자는 것을 제 아내가 알고는 무 슨 일 있었느냐고 묻습니다. 일이 없었다고 해도 자꾸 묻다가 벌떡 앉 더니,
'당신은 어렵고 힘든 일은 내 게 늘 말하지 않는데, 이야기 좀 해 달라'고 해서 할 수 없이 저도 일어 나 앉았습니다. 그래서 낮에 바우 목사 설교를 듣고 나서 어떻게 도와 야겠는데, 도울 것이 너무 없어서 도무지 안정이 안 된다고 했더니 제 아내가

'알았어요'
그러더라구요. 다음 날 아침입니다. 저희가 결혼할 때, 성경 찬송가만 예물로 주고받고 는 예물을 모두 거절했습니다. 공식 적으로는 그렇게 거절했지만 양가 어른들이 어떻게 그런 법이 있느냐 고 제 아내한테 따로 준 것이 있었 나봐요. 그것들과 심지어 어린 아이 돌 반지까지 모두 바우 목사 갖다주 라고 제게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 서 제가 우리 집에 있는 모든 패물 들을 한꺼번에 바우 목사에게 갖다 주고 지난 밤에 있었던 사연을 이야 기해주었습니다. 그 때부터 그 친구 하고 친해졌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다시 돌아가서 월남 신학교에서 가 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1975 년 4월 30일 월남이 패망해서 사이 공이 함락되었습니다. 저는 1975년 7월 4일날 남서울교회를 개척했습니 다. 교회를 시작하면서 날마다 새벽 기도에 나아가 월남에 있는 바우 형 제를 보호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의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월남의 보트 피플 중에 사이 공에서 바우 목사를 아는 사람이 나 와서 이야기하는데, 마지막 사이공 함락되기 전에 미군들이
'바우 목사 너도 가야한다. 목사인데 여기 있으 면 죽는다. 가자.'
그러니까

'내 사 랑하는 성도들을 죽을 땅에 놔두고 나 혼자 가는 것은 목자 도리 아니 라고 생각한다.'
그리고는 이 분이 탈출하지 않고 같이 있었다고 합니 다. 그 소식만 들으니까 더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1979년도에 바우 목사가 탈출해서 인도네시아에 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래서 수소문해서 인도네시아 난민촌 에서 스위스로 옮겨주었습니다. 81 년도인가 그 분을 남서울교회에서 초청해서 설교를 들었는데, 그 분이 탈출한 경로를 이렇게 이야기합니 다. 자기가 안나가려고 하는데, 월남 장로교회 몇 사람이 배를 특별히 마 련해주더니
'당신이 나가서 월남의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고통 당하는 것을 알려주시오.'라고 부탁하더랍 니다.
'어떻게 나 혼자 나가겠느 냐?'고 하니까 부인이
'당신이 가족 의 사사로운 정 때문에 나가지 않으 면 하나님의 사람 아니라'고 어떻게 호통을 치던지 보트를 타고는 표류 해서 사선을 넘어 인도네시아까지 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무엇 을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니 까
'내가 월남인들에게 복음을 전하 고 싶은데, 유럽에는 월남 사람 숫 자가 적어 월남 사람이 가장 많이 사는 미국의 오렌지 카운티로 보내 주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수속을 시켜서 오렌지 카운티로 옮겨주고 미국 영주권을 받게 해주었습니다. 얼마 있으니까 적십자사를 통해서 돈만 주면 월남에 있는 가족을 데려 올 수 있다고 해서 상당히 큰 액수 였는데, 여러 사람들이 함께 돈을 모금해 장모님과 사모님, 네 아이를 모두 미국으로 보내주었습니다. 제 가 처음부터 끝까지 이 일에 직, 간 접적으로 다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바우 목사가 개인적으로 저를 얼마 나 고맙게 생각했겠어요. 가족들이 나온 뒤 한 두 달 후에 제가 미국에 갔습니다. 로스엔젤리스의 어떤 모 텔에 자리를 펴고는 전화를 했습니 다. 그랬더니 이 친구가 그대로 오 렌지 카운티에서 로스엔젤리스까지 한 40분간을 쉬지 않고 달려서 올라 왔어요. 와서는 제게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우리 집 가자.'
제가 오늘 투숙했다고 하룻 밤 자고 내일 가자 고 해도 막무가내로 짐싸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네가 애써서 여기까 지 불러온 내 마누라는 좀 봐야 안 되겠냐?'하여 할 수 없이 그 집에 붙잡혀 갔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 하면 사모님이 제가 얼마나 고맙겠 어요. 가자마자 사모님이 저녁상을 차려주었습니다. 지금 미국에 월남 국수가 참 유행합니다. 값도 싸고 맛있다고 좋아합니다. 그 월남국수 에다가 돼지 삼겹살, 거기다가 이상 한 냄새가 나는 풀, 이렇게 상을 내 왔습니다. 한 입을 베어먹으니까 헛 구역질이 나는데 견딜 수가 없습니 다. 기름진 삼겹살과 이상한 냄새가 나는 야채가 어우러져 역겨워서 견 딜 수 없는 냄새가 납니다. 그래도 사모님의 그 진지하게 하나 하나 준 비한 간절한 정성을 제가 압니다. 그런데 못 먹겠어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순교적인 각오로 먹기 시작했 습니다. 제 평생 음식을 그렇게 힘 들여 먹었던 적이 아직 없습니다. 저녁에 사모님과 바우 형제와 가족 끼리 새벽 3시, 4시까지 별별 이야 기를 다 하다 잠이 들었습니다. 아 침이 되니까 또 상을 차려나옵니다. 이 친구가 하는 말이
'월남 풀은 외 국 사람들이 잘 못 먹는데 어제 맛 있게 먹는 것 보니까 또 내어놓았 다'고 해요. 그 때는 순교를 못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제 네 아내 가 정성 다한 그 손길을 보고 먹긴 먹었는데, 오늘은 도저히 못 먹겠다. 용서해달라.'
그러니까

'그러면 어 제 이야기를 해야지'하는 것입니다. 그 분은 내게 최선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제게는 전혀 아니었단 말입 니다.

저도 이런 잘못을 범해보 았습니다. 제가 중국을 12년 째 다 닙니다. 100 번 이상 다닌 것 같아 요. 중국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처음 에 중국의 귀한 분들을 모시고 서울 에서 최고의 대접을 하기로 해서 고 급 일식집에 가서 맛있는 광어 회를 시켜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때는 중 국 사람들이 날 것을 못 먹는 것을 몰랐어요. 한번 베물더니 다시는 손 을 안댑니다. 저는 최선이었습니다. 돈도 많이 들였습니다. 제가 갈 때 마다 그 집은 음식 잘한다고 생각했 던 집이었어요. 내 최선이었습니다. 그런데 상대방에게는 최선이 아니었 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다른 모습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신 앙 생활할 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 단 말입니다. 그렇게 살았던 사람들 이 있었습니다. 그 이름은 바리새인 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서 우리 주님이 한 촌에 들어가셨습니다. 그 촌 이름은 베다니였습니다. 주께서 마르다라는 여자의 집에 가서 환대 를 받습니다. 손님 맞을 준비가 거 의 끝나고 마지막 마무리를 하고 있 는 분주한 마르다의 눈에 예수의 발 아래 조용히 앉아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마리아가 보였습니다. 발 아래 앉았다는 말은 당시 제자의 표 시입니다. 우리 한국말에도 '슬하에' 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릎 아래' 입 니다. 이것은 자식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에 사도 바울을 '가말리엘 문하' 라고 말합니다. 우리 단어로는 '문 하'라는 말로 썼지만 실제로 원문을 직역하면 '그의 무릎 아래서 배웠다' 입니다. 이 여인은 조용히 스승 앞 에 겸손히 무릎을 꿇고 주께서 하시 는 말씀을 경청해서 듣고 있었습니 다. 이것을 본 마르다는 주님께 이 렇게 말합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 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여기서는 두 사람을 정죄하고 있고 자기를 높이고 있습 니다. 첫째로는
'지금 열심히 일하 고 섬겨야 되는데, 저 앉아있는 마 리아의 꼬락서니 보십시오.'
두 번 째는
'주님마저도 분위기 파악 못하 고 이 앞에다 앉혀놓습니까?'
또 주 님께 명령까지 합니다.

'당신이 명 해서'예요. 아니,

'마리아야. 내가 일손이 바쁘다. 도와달라.'
이러면 좋지 않습니까? 그런데 또 티까지 냅니다. 나 혼자 일한답니다. 그 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 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 만 하든지 혹 한가지만이라도 족하 니라.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하였으 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즉, 너는 지금 나를 위해서 너의 최선으로 나 오지만 지금 내 마음에 맞고 내게 참으로 긴요한 것은 바로 마리아의 자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와 다른 점을 인정합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 늘 이 본문 통해서 우리는 세 가지 는 분명히 배워야겠습니다. 첫째로 나와 다른, 좋은 신앙이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 앞에 겸손해야겠습니 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 생활하면서 나와 다르면 정죄하기가 일쑤입니 다. 나와 다른 것이 틀린 것 아닙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다르면 틀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참 많 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특별히 다른 민족들을 존중하며 함께 하는 훈련이 가장 안 되어있는 민족입니 다. 예를 들어볼까요? 세계 어디에 가도 중국 사람들은 살아남고 China Town은 있습니다. 그런데 서울에는 China Town이 없습니다. 그 끈질긴 중국 사람이 못살고 쫓겨 나는 나라가 우리 대한민국입니다. 우리 모습 알아야 됩니다. 일본 사 람이 재일 교포 괄세한다구요? 백인 들이 동양 사람 괄세한다구요? 물론 괄세합니다. 그러나 우리만큼 아닙 니다. 우리가 우리를 조금 더 알았 으면 좋겠는데, 우리 조선 사람들이 악독한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중국 의 문화대혁명 때, 57개 부족 가운 데 숫자적으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민족이 조선족이라고 합니다. 문 화대혁명 때 서로가 서로를 고발하 라니까 그처럼 악착같이 서로 고발 해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민족이 조선민족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스 스로를 알아야합니다. 제가 읽은 책 가운데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가 있는데, 이 사람이 인도에서 태어났 다면 우리 문화유산 답사기를 어떻 게 썼을까? 그리스에서 태어났다면 어떻게 썼을까? 터키에서 태어났으 면 어떻게 썼을까를 생각해보았습니 다. 마치 그 책을 보면 세계에서 문 화민족은 유일하게 우리 민족 밖에 없는 것처럼 써놓았습니다. 그러니 까 쓸데없이 베스트셀러가 되었어 요. 하여튼 지금도 이 민족의 배타 적인 옹졸한 생각 중심으로 글을 쓰 면 베스트셀러가 됩니다. 일본 미워 하는 책을 쓰던지, <일본은 없다> 고 하면 줄을 서서 사요. 참 옹졸한 민족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할 때 에도 내가 속한 교회, 교단 이외에 는 신앙이 없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아닙니다. 우리 보다 좋은 감리교인 참 많습니다. 우리 보다 더 경건한 침례교인 참 많습니다. 오순절 교회 성도들의 기도가 잘못된 것이 아닙 니다. 존중받아야 됩니다.

마르다는 자기가 서있는 그 곳이 전부인줄 알았습니다. 마르 다처럼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활동 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는가 하면 소 극적이고 조용하며 사색적이면서도 좋은 신앙을 가진 사람도 많습니다. 마르다는 잘못 생각했습니다. 그래 서 주님께 꾸중을 들었습니다. 내게 갇히면 남이 안보입니다. 내 주장이 강하면 내 가족들이 피해입더라구 요. 나하고 다른, 옳은 것이 참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몰랐던 마르다가 주님에게 꾸중듣는 모습을 봅니다. 이 여자, 예수 잘 믿는 사람 입니다. 회계도 잘 하는 사람입니다. 또 주님 사랑했던 사람입니다.

마음의 분주함을 조심하십시오.
두 번째로 신앙생활에 있 어서 조심해야될 것이 있는데 그것 은 마음의 분주함입니다. 마르다는 주님 오시는 일에 너무 마음을 많이 써서 마음이 분주하다고 했습니다. 지금 오시는 주님도 안중에 없습니 다. 그의 관심은 무엇인가 하면 자 기 마음의 설레임이고 자기 마음의 분주함입니다. 잘 하겠다는 생각으 로 꽉 차서 상대편도 보지 못한 채 그 마음이 염려와 근심으로 꽉 찼습 니다. 신앙의 가장 소중한 부분이 있다면 마음을 다스리고 지키는 것 입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 중에 마 음을 지키라고, 생명의 근원이 이에 서 난다(잠 4:23)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지켜져야 됩니다. 마음이 흔들리면 하루가 흔 들려지지 않습니까? 우리들이 일하 다가 언제 쉬어야 되는가? 내 마음 이 분주해서 근심, 걱정, 염려가 가 득 차면 하던 일을 모두 중단하십시 오. 일을 많이 한다는 것과 마음이 분주하다는 것은 다릅니다. 아침부 터 저녁까지 열심히 일을 합니다. 몸이 피곤합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마음이 분주하지 않게 집 중해서 그 일이 된다면 괜찮습니다. 집중이 안되고 마음이 분주해서 근 심, 걱정, 염려가 차고 넘치면 중단 해야 된단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을 다스릴 줄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 우리 주님을 향해 서 온전히 안정감을 얻어야 됩니다. 분주하십니까? 근심 걱정이 산처럼 누를 때가 있습니까? 그 때, 주님께 서
'마르다야, 마르다야,'
부릅니다. 성경에서 보면 주님이 사람 이름을 두 번씩 부를 때가 있습니다.
'예루 살렘아, 예루살렘아'
(마23:37)누가 복음 22장에 '시몬아, 시몬아'(눅 22:31)다메섹 도상의 사울을 향해 서 '사울아, 사울아'(행 9:4) 두 번 부를 때를 찾아보니까 그 때마다 주 님의 안타까운 마음이 있습니다. 그 냥 꾸중이 아닙니다. 주님의 깊은 사랑이 담긴 마음입니다. 두 번이나 반복해서 말합니다.
'마르다야, 마르 다야'
마르다의 그 마음을 주님은 아셨습니다. 얼마나 사랑하고 얼마 나 주님께 잘하려고 하는가를 주님 은 아셨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온 전한 것이 못되었습니다. 안타까우 셨습니다. 주께서 안타까운 심정으 로 '마르다야, 마르다야'
부르십니 다. 오늘 이 시간에도 하나님의 축 복과 은총 속에서 하나님의 부요를 누리고 살아야할 하나님의 자녀가 이 부요와 축복을 누리지 못하면 주 께서 내 이름을 두 번이나 부르면서 안타깝게 찾아오십니다.

주님을 향해 집중합시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우리 주님을 향해서 집중해주는 것 보다 더 좋은 선택이 없다고 말씀하십니 다.
'마리아는 이 좋은 것을 택하였 으니...'
마리아는 주님 발아래 앉아 서 그 눈은 주님의 사랑의 눈동자와 부딪치고 있고 그의 귀는 주님의 입 에서 나오는 영혼의 양식, 생명의 말씀을 향해 귀가 열려있고 그의 심 정은 우리 주님의 심정을 향해서 나 가고 있습니다. 마르다는 자기 밖에 없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입니다. 우 리가 성경공부를 참 열심히 할 수 있습니다. 좋습니다. 그렇지만 성경 공부를 할 때, 여기까지 나갔는가를 늘 체크 해보십시오. 이 공부를 통 해서 이 말씀을 주신 우리 주님의 심정을 만나고 있는가? 주님을 만나 야 됩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그 들의 경전으로 됩니다. 공자 말씀, 맹자 말씀, 석가모니 말씀, 교훈만 받으면 됩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 인들은 아닙니다. 이 말씀 속에서 나를 찾아오신 그 주님을 만나야 합 니다. 그 주님의 심정과 터치되어져 야 합니다. 이것이 바른 신앙입니다. 우리가 목장에서 성경 공부합니다. 우리의 것들을 나눕니다. 또 멋있는 프로그램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것 으로 끝나면 안됩니다. 우리의 모든 심정이 말씀하신 주님을 향해서 나 가야 됩니다.

우리가 기도할 수 있습니 다. 기도하면서도 살아있는 기도를 할 수도 있고 죽은 기도를 할 수도 있습니다. 똑같이 큰소리치고 똑같 이 악을 쓴다고 같은 기도 아닙니 다. 똑같이 주님을 사랑한다고 폼 잡았던 마르다와 마리아가 주님 보 시기에 달랐던 것처럼 기도도 다를 수 있습니다. 잘못하면 내 모든 사 정을 한꺼번에 늘어놓는 푸념이 될 수도 있고 내 심정이 주님의 심정에 닿는 기도가 될 수도 있습니다. 대 표적인 기도가 한나의 기도입니다. 한나에게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 래서 늘 마음의 근심, 걱정, 염려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해 결하기 위해서 여호와의 전에 나아 가 기도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가 전심으로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던 엘리 대제사장은 기도를 너무 열심 히 하니까 술 취한 줄 알았습니다.

'여인아, 대낮부터 성전에서 술 주 정하느냐?'
그 때, 한나는
'내가 포 도주를 마신 것이 아니라 여호와 앞 에 내 심정을 직통하였나이다'
여러 분, 우리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영 광의 우리 주님과 심정이 직통해 있 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내가 하고 싶은 소리를 다 쏟아내고는 심리적 인 만족으로 끝납니까? 우리가 알아 야될 것은 우리의 열심이나 헌신보 다, 우리의 프로그램보다, 우리의 사 업보다 우리 주님은 나를 더 좋아한 다는 사실입니다. 나를 더 좋아합니 다. 나와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나와 생명의 교제를 나누기를 원하십니 다.

한 아이가 늘 아버지와 사 랑의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아빠는 그 아이만 보면 모든 피로가 풀어집 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한 20일 동 안 아빠 앞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나중에 보니까 아빠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 슬리퍼를 만드느라고 20일 동안 끙끙 애를 써서 그 어린 손으 로 슬리퍼를 만들어 왔습니다. 그 아이의 마음을 알면서도 아빠는
'얘 야, 나는 말이야. 네가 만들어 준 슬 리퍼 보다 너를 더 좋아한단다.'
여 러분, 우리의 산업이, 우리에게 귀한 것이 주님께 귀하지 않습니다. 내가 최고로 귀합니다. 내 프로그램을 위 해서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지 않았 습니다. 누구를 위해서입니까? 이 못난 나를 위해서, 이 죄인을 위해 서입니다. 주님 앞에 내가 가장 귀 합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물리치시 고 나와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을 만날 때 우리들은 주님을 더 깊게 알아갑니다. 베드로 사도는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벧 3:18) 예수에 관한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말합니 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내게 가장 고상하다'(빌 3:8)고 했습니다. 신앙성장이 무엇입니 까? 우리 주님을 더 깊이 아는 것입 니다. 여러분, 해가 지나면서 우리 주님을 더 아셨습니가? 그렇지 않으 면 예수 믿으면서 내 자의식의 성만 더 공고히 쌓고 있습니까? 사도 바 울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우리 지식이 자라기를 원하면서 하 나님의 사랑의 높이와 깊이와 넓이 와 길이를 더 알기를 원한다'(엡 4:13)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 외로 운 세상 살면서 하나님의 사랑의 넓 이와 깊이와 길이를 더 풍성히 알면 끝납니다. 그 분이 사랑하시면 나는 부자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것 같 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고, 가난한 자 같으나 모든 사람을 부요케 만드 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이 축복 을 날마다 누리는 것 보다 세상에 더 기쁜 것이 없습니다. 늘 긴장해 서 등에 땀이 흐르는 아이가 있었습 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빠가 자기 를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은 다음부 터 등줄기에 흐르던 땀이 멎더래요. 아빠의 사랑을 느껴도 그러한데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의 높이와 깊이 와 넓이와 길이를 알아가는 이 축복 만 가지면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습 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한, 가 난하지 않습니다. 외롭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한, 약하지 않습니다.

첫 시간을 주님과 함께
그런고로 우리 그리스도인 들이 반드시 해야될 것 있습니다. 하루를 시작하시면서 하루의 첫 시 간을 뺏기지 마시고 그 분을 아는 것으로 시작하십시오. 그 분 말씀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으십시오. 그 분 앞에 내 모든 소원을 아뢰십시 오. 근심, 걱정, 염려를 주 앞에 드 리십시오. 주께서는 우리 주님 앞에 정직하게 나오는 심령마다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으로 지켜주실 줄로 믿습니다. 거기서 시작하셔야 됩니다. 새벽기도 나오시는 분들은 더욱 열심히 나와서 그냥 혼자만 열 심히 기도하고 찬송하지 마시고 찬 송하실 때 내 찬송을 받으시는 그 분을 만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 말씀 배후에서 나를 사 랑하시는 주님의 심정을 만나십시 오. 내가 기도할 때, 나를 받으시되 내 모든 근심, 걱정을 뒤로 돌려주 시고 모든 지각에 뛰어난 주님의 평 강으로 내 마음을 지켜주시는 그 주 님을 경험하십시오. 이렇게 살아야 됩니다. 아침에 이것이 되면 하루 종일 갑니다. 아침에 지면 저녁때까 지 흔들려요. 그러므로 아침에 30분 이상 시간을 따로 내십시오. 아침에 시간 내기 힘들다구요. 일어나기 힘 들다구요. 제가 좋은 방법을 하나 가르쳐 드릴께요. 저녁에 빨리 자면 됩니다. 이것은 박성수 장로가 한 이야기인데, 우리는 가장 쉬운 진리 를 제일 순종 못하는 것 같습니다. 드라마 '허준' 안보고 주무셔도 되쟎 아요. 하도 감동이 없는 세상이라 '허준'이라도 봐야 감동이 생기니까 그렇게 집착한다고 누가 그럽디다. 비디오로 녹화해놓으셨다가 틈 나면 보시고, 또 안보면 어떻습니까? 그 리고 주님의 무릎 아래 앉아서 내 시선이 주님의 사랑의 눈동자와 마 주치고 내 귀가 주님의 입에서 나오 는 영혼의 양식 앞에 나아가 주님의 심정과 주님의 사랑을 만나면, 그 은혜는 나로 넉넉하게 승리케 하실 것입니다. 주께서 내 모든 분요와 근심과 걱정과 분주함을 이기게 해 주실 것이고, 우리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속에서 역사할 줄로 믿습니다. 여기서부터 시작합시다. 30분을 주 님 앞에 드리십시오. 그리고 그 분 의 발 앞에 전심으로 나아가십시오. 겸손한 심령을 향해서 언제나 은혜 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놀 라운 은혜가 성도들의 심령에 역사 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 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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