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의 사랑 (눅 23:33-38)

첨부 1


선교사들이 선교훈련을 모두 마치고 마지막 서약에 앞서 행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유언장을 작성하는 것입니다. 유언장을 작성할 때 가장 고심한다고 합니다. 특별히 처음에 무슨 말을 써야될 것인지를 망설입니다. 생애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 가장 귀하게 생각되는 것을 제일 먼저 쓰려고 생각하니까 만감이 교차한다고 합니다. 가령 '내가 사용하던 물건을 놔두고 가는데 이 세상 떠나면 이것은 누가 가져라.'라고 부탁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오래된 선교부에 가보면 가족들이 모두 순교했기 때문에 그 짐을 줄 사람이 없어서 50년, 70년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선교부 창고에 주인 없는 짐만 덩그러니 남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을 볼 때는 가슴이 매입니다. 또 '우리 부부가 만약 죽는다면 이 아이는 큰 집에 맡겨라. 내 작은 누이에게 맡겨라' 할 때 반드시 그 양육자들과 협의한 다음에 유언장에다 기재합니다. 어쨌거나 선교사가 제일 첫 문장을 무엇으로 써야될 것인가를 깊이 고민을 한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현장으로 가봅니다. 주님의 일곱 마디 유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그 첫마디 유언장을 우리가 개봉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살을 파고드는 고통입니다. 우리가 조금만 데이거나 예리한 것으로 손끝만 찔려도 아픈데, 큰 대못으로 손목과 발목이 박힙니다. 그것도 오징어 말리듯이 몸을 쫙 펴서 힘을 균등하게 줄 수 있게 못을 친 것이 아니라 느슨하게 못을 쳐서 손에다 힘을 주면 발에 힘을 줄 수 없고 발에 힘을 주면 손에 힘을 줄 수 없어서 의식이 있을 때까지 계속 비틀거리다가 마지막 고통 가운데 절명하는 순간까지 십자가의 아픔이 그를 파고 들었습니다. 그를 향해서 사람들은 침을 뱉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신포도주를 먹이면서 뺨을 때립니다. 한 사람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그 머리에다 왕관 대신 가시관을 깊숙이 찔러 넣습니다. 예리한 가시가 그 머리에 박히고 그 박힌 자국마다 피가 흐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위에 조롱의 말,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패를 붙여 놓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외쳐대기 시작합니다. '이 사람을 십자가에 죽이라, 십자가에 죽이라.' 또 어떤 사람은 외쳐댑니다. '네가 정말 네 말대로 하나님의 아들이면 거기서 뛰어내려라. 다른 사람 많이 살렸잖아. 한번 뛰어내려라.' 마술사가 마술 원하는 마음으로 그를 조롱하고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주께서 첫 번째 유언의 말씀을 하십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서.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우리 주님의 첫 번째 말씀은 죄 용서의 기도였습니다. 죄, 그것이 인간을 불행케 합니다. 죄는 중독성이 있습니다. 중독성이 있다는 말은 물질이나 행위가 나를 지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중독은 내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하게 만듭니다. 아편하는 사람들이 모두들 처음에는 아편이 참 재미있고 신기해서 다른 사람이 다 하는 것을 나도 한번 경험하겠다 싶어 시작한다고 합니다. 한번 해보면 한번으로는 조금 아쉽습니다. 두 번, 세 번 그러다가 나중에는 아편을 몸에 꽂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생애로 바뀌어버립니다. 내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아편의 생애를 삽니다. 죄가 그렇게 중독성이 있습니다. 처음에 지었던 조그마한 죄들이 모이고 모아져서 나로 하여금 죄를 살아버리게 만듭니다. 내 인생을 살지 못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영광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게 만드는 원흉이 됩니다. 죄가 있는 곳마다 한숨이 있고 슬픔이 있고 곤고가 있고 그 죄가 있는 곳마다 고통이 있습니다.

그런데 중독성이 있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내 이웃까지도 고통을 주는 것이 죄입니다. 죄의 영향력은 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살고있는 이 사회를 아프게 합니다. 죄가 들어오니까 그처럼 사랑했던 부부관계가 깨져버립니다. 죄가 들어오니까 그 즐거웠던 사회가 즐거움을 잃어버립니다.

그런가하면 사람들은 죄의 중독성도 모르고 죄의 영향력도 모를 뿐 아니라 죄가 주는 결과도 모릅니다. 죄는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저주를 받게 합니다. 만약 사람들이 그것을 알았다면 사람들은 죄를 안 지었을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사람들에게 만약 지옥을 단 1분만 보여준다면 세상에 죄 지을 사람은 없다.' 영원을 향한 멸망, 영원을 향한 저주, 영생을 향한 치욕과 고통을 죄가 안겨주고 맙니다. 죄는 이처럼 잔인한 것입니다. 가공할만한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나를 만나주신 첫 번째 장소가 죄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입니다. 천사가 예수님 이름을 가르쳐 줍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임이니라.' 첫 번째로 이름을 죄에서 구원할 구세주로 가르쳐주십니다. 주께서 나를 처음 만나주신 장소가 죄입니다. 사람들은 좋은 것 좋아합니다. 아름다운 것 좋아합니다. 귀한 것 좋아합니다. 영광스러운 것 좋아합니다. 그리고 가까이 가서 사귀기를 좋아합니다. 가지기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나를 찾아오신 장소는 낮은 자리, 죄의 자리였습니다. 그래서 그 찾아오심을 세상의 다른 용어로는 표현할 길이 없어서 '은혜다!' 그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주께서 나를 제일 처음 만나주신 장소가 죄라는 사실을 알면 우리는 누구든지 교만할 수가 없습니다. 교만해질 수가 없습니다. 또 주께서 나를 만나주신 장소가 죄라면 누구도 절망해서는 안됩니다. 아무도 찾아주지 않고, 누구도 외면해도 그 분은 오십니다. 오셔서 의로운 오른 손으로 나를 붙잡아 일으켜 세워주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십자가를 지시면서 유언하셨던 말씀이 있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함입니다. 죄를 알았더라면 사람들은 죄 안 지었을 것입니다. 몰랐습니다.' 라는 기도였습니다.

이 기도는 실천의 기도입니다. 누가복음 6장 27절, 28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마태복음 5장 45, 46절입니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이 말씀은 힌두교도인 마하트마 간디가 자기들의 경전인 리그베다를 읽기 전에 먼저 암송하고 그리고나서 자기들의 힌두경을 읽었다고 합니다. 그는 하루에 세 번 이상 이 말씀을 묵상하지 않고 지낸 날이 없었다고 합니다. 좋은 말씀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 저주한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주님이 실제로 십자가의 그 고통과 저주 속에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착각하는 것 참 많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내가 참 착하고 좋은 사람이라는 착각입니다. 천만에요. 착하고 좋은 생각만 할뿐입니다. 실제로는 악한 놈들이에요. 우리 속에 악이 얼마나 흐르고 있습니까? 우리가 사랑에 대한 소망은 있지만 실제로 사랑을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감옥에 있는 흉악무도한 죄인들을 개인적으로 만나봐도 참 선한 생각이 있습니다. 자신에게 속지 마십시오. 실천할 때까지는 나는 좋은 사람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서 자기가 하신 말씀 그대로, 실제로 십자가 위에서 그 고통 속에 기도하고 있지 않습니까? 나를 향해서 조그마한 험담만 해도 저녁에 잠을 못 자는 인생인데 주님은 그 고통, 그 아픔, 그 떨림 속에서도 저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실천의 기도입니다.

그런가하면 여기 우리 주님의 기도는 사랑의 기도입니다. 함무라비 법전에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그렇게 말했습니다. 구약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의 정신은 사람이 한 번을 찌르면 열 번 찌르고 싶은 보복심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 찌르면 하나 이상 안 된다는 의미가 포함된 말씀입니다. 그런데 함무라비 법전은 반드시 보복하라는 것입니다. 그 점에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남이 하나 때리면 몇 배로 보복하고 싶은 인생입니다.

자루라는 제자가 어느 날 스승인 공자에게 묻기를 '선생님, 원수를 선대하는 것이 가합니까?' 그랬더니 공자가 말하기를 '네가 원수를 선대하면 네 친구는 어떻게 대해줄래?' 그래서 친구는 선대하고 원수는 미워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사랑하라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원수는 외면하고 고통스러우면 그냥 상관하지 말라는 정도로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주께서는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고 위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랑이 좋은 줄 모르는 사람이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사랑하는 사람은 참 적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간단합니다. 용서하지 않기 때문에 사랑을 못합니다. 우리는 비난할 것 다 비난하고 욕할 것 다 욕하고 흉볼 것 다 흉보고 사랑하려고 듭니다. 사랑에서 용서를 빼면 재도 안 남습니다. 마지막엔 아무 것도 안돼요. 용서가 사랑입니다. 용서 없는 사랑을 하려고 드니까 우리에게 사랑이라는 단어만 있지 사랑하는 삶이 없습니다. 주님은 자기를 향해서 그처럼 고통을 주는 사람을 용서하고 있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은 나를 해칩니다. 그 악독이 나를 해칩니다. 미워하고 있으면 잠이 오지 않습니다. 미워하고 있으면 마음의 평화가 깨집니다. 용서하지 못하고 있으면 태산을 지는 것 같은 무거운 인생의 걸음을 걸을 수 밖에 없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해서 고통받던 때가 있었습니다. 평소에도 머리 아프고 고통스러우면 설악산에 가서 한 2-3일 먹고 자고 등산하고 내려오면 마음의 피곤이 풀렸습니다. 그래서 용서를 하고 원망의 마음을 씻어보려고 설악산에 올라가서 먹고 자고 일어나서 그 멋진 산을 보는데 그처럼 좋아하던 설악의 아름다움이 사라집니다. 미움은 아름다움을 빼앗아갑니다. 미움은 바른 생각을 빼앗아갑니다. 미운 사람이 멋지게 생각하니까 그 멋지게 생각한 것까지 밉습니다. 그러니까 내 판단력 자체를 미움이 앗아가 버립니다. 용서 못하는 내 마음이 얼마나 무겁게 짓누르는지 누워도 시원치 않고 일어나도 시원치 않고... 그 때 깨달았습니다. 세상에서 못할 일은 용서 못하는 마음이다. 암탉이 무서운 독알을 품고 있다가 깨뜨려 그 알에서 나온 독으로 남을 죽이고 싶었지만 실상 제일 먼저 화를 입게되는 것이 자기 자신인 것처럼 용서치 못하는 마음에 먼저 화를 입는 것이 상대방이 아니라 나더라구요.

여러분,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용서했습니다. 사랑의 기도를 했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우리가 자식을 사랑한다고 할 때, 다른 것 아닙니다. 한없는 용서 아닙니까? 그래놓고 우리들이 사랑 이야기는 참 많이 합니다. 용서 없는 사랑은 사기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주님은 진실로 사랑할 줄 아는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사랑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 기도는 응답받는 기도였습니다. 십자가의 그 고통 속에 꿈틀거리면서 하나님께 기도했던 기도, 떠드는 사람의 소리 속에 묻혔습니다. 그의 생애가 끝나자마자 모든 것이 무의미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렇지만 50일 후였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너희가 죽인 그 분이 다시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우리 메시야 되었다'고 전파하고 증거할 때,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우리가 어찌 할꼬?' 하고 나옵니다. 그 때 베드로가 '너희가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으라'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때 저들은 하루에 삼천 명이나 주님 앞에 돌아왔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그냥 의미 없는 소리 같았습니다. 멋진 문장 같았습니다. 아닙니다. 은총의 보좌 앞에 기도했던 그 기도는 하늘 보좌를 움직였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운명하셨지만, 주님은 다시 부활하셔서 승천하셨지만, 그 기도는 살아서 50일 후에 수많은 사람이 주님 앞에 나와 회개하고 새로운 생애를 살게 만들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땅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응답 받는 기도였습니다.

이 위대한 기도를 그대로 본받아서 기도했던 하나님의 사람 스데반이 돌무더기 속에서 묻혀 죽어가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시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주님처럼 기도했습니다. 그는 무참하게 죽었습니다만 그 기도는 죽지 않고 살았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히 여겼던 한 청년, 죽은 스데반의 옷을 들고 통쾌하게 생각했던 사울이라는 청년은 스데반 뿐 아니라 스데반과 같이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고 싶어서 다메섹 도상으로 가던 도중에 용서로 찾아오신 주님을 만납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그 큰 용서의 발로 찾아오신 주님 앞에 그 생애가 드려졌습니다.

토마스 선교사가 중국 통역관으로 대동강변에 왔다가 붙잡혔습니다. 망나니들이 칼을 휘두를 때 그는 집행관에게 말합니다. '잠깐 내가 기도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 조선 민족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이 조선 민족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내 생명을 받으시고 수많은 생명을 이 땅에 주시옵소서.' 기도 마친 다음,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중국어 성경을 집행관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참수형을 당해서 목이 떨어졌습니다. 그 기도는 의미 없는 것 같았습니다. 죽을 때 도무지 죽음 앞에서 초연하게 평화를 잃지 않는 이 서양인의 표정에 감동한 한 사람이 성경책을 들여다보기 시작했고, 그가 예수님을 만나서 조선 땅에 첫 번째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다음입니다. 1883년에 서상륜이라는 사람이 만주에 갔다가 죽을병이 들었을 때 선교사의 도움을 받고 거기서 복음을 받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번역해 집에 돌아와서 소래 땅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예수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가 들어오기 2년 전인 1883년에 소래교회가 탄생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의 기도는 땅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순교의 기도, 용서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던 그 기도가 1885년에 아펜젤러, 언더우드가 이 땅에 와서 복음을 전하고, 1907년에 평양 장대현 교회의 놀라운 부흥 운동, 30만 명이 한꺼번에 주님 앞에 돌아오는 오순절 다락방 이래의 최대의 부흥의 역사로 이어집니다.

여러분, 이 기도 능력 있습니다. 이 기도는 저주를 축복으로 바꿉니다. 이 기도는 악을 선으로 바꿉니다. 이 기도는 미움을 사랑으로 바꿉니다. 이 기도는 치욕을 영광으로 바꿉니다. 이 기도를 내 기도로 붙잡으십시오. 남편 때문에 고통받는 아내들이여, 이 기도 드려주십시오. 사랑하는 자녀들을 놓고 눈물로 기도하는 부모님들이여, 낙심하지 않고 이 기도 드려주십시오. 그것뿐만 아니라,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 드리십시오. 내 마음의 미움이 박살나는 것을 경험할 줄로 믿습니다. 내 마음의 저주에 꽁꽁 묶어두었던 사슬이 풀리는 것을 경험할 것입니다. 기도하십시오. 그처럼 만나기 싫던 사람이 만나지게 됩니다. 듣기 싫었던 목소리가 들려지게 됩니다. 내 마음속에 얼어붙었던 마음이 녹기 시작합니다. 형제여, 자매여, 이 기도는 역사상 가장 능력 있는 기도입니다. 이 보다 더 위대한 기도는 없습니다. 이 기도 보다 확실하게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기도가 없습니다. 이 기도보다 내 삶에 평화와 능력과 위로를 주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오늘 이 기도부터 시작하십시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기도하십시오. 주께서 은혜 베푸십니다. 기도하십시오. 주께서 능력으로 함께 하십니다. 기도하면, 이 기도가 하나님의 뜻이므로 반드시 살아서 역사합니다. 정말 미워 견딜 수 없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십시다. 사건을 놓고 기도하시고, 아픔을 놓고 기도하시고, 우리 아버지 앞에 기도하십시오. 십자가 위에서 하신 예수님의 그 짧은 기도가 은총의 보좌를 움직였습니다. 돌무더기 속의 외마디 기도가 하늘 영광을 이 땅에 누리게 하셨습니다. 내 마음속에 미움으로 맺혀있는 것을 위해서 우리 조용히 기도하십시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