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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한 가지 부족한 것 (막 10: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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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계기는 만남에 의해서 결정이 됩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부모님과 만남으로 오늘의 내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만남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선택하는 것도 아니고 자식이 부모를 선택하는 것도 아닙니다. 저희 집 둘째가 '정말 내가 엄마 아들 맞느냐?'고 물으니까 제 아내가 하는 말이 '내가 선택할 수 있으면 너 같이 못나고 속썩이는 놈을 선택했겠느냐? 어릴 때 Baby Contest를 통해서 잘 생기고 똑똑할 것 같은 놈을 데려다가 맘놓고 키우지' 제가 그 말을 듣고 웃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이것은 주어진 만남입니다.

또한 우리들은 우리 생애에 두 번째 중요한 만남을 갖습니다. 그것은 부부의 만남입니다. 한국 사람들이 부부의 만남의 소중성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남자에게 많은 복이 있지만 처복보다 더 좋은 복이 없다.' 사실입니다. 좋은 아내를 만나는 것은 남자에게 있어서 한평생 행복의 중요한 기초입니다. 그런가하면 '여자 팔자 두레박 팔자다.'는 옛말도 있습니다. 어느 두레박줄에 매였느냐에 따라서 인생이 결정된다는 말로 좋은 남편 만나는 것의 특권을 강조한 이야기입니다. 인생 살아가면서 부부의 만남이 얼마나 풍요롭고 소중한 만남인가를 강조한 말입니다.

또 하나의 만남이 있습니다. 영원한 만남입니다. 이생과 내생의 가장 확실한 만남, 어떤 때도 무너지지 않는 만남, 그 만남은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하나님을 갈망했던 한 청년이 지금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 속에 나타났습니다. 그는 관원이었다고 합니다.(눅 18:18) 대개 중동 지방에서는 고급 관리가 되는 것이 나이가 30이 넘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나타난 몇몇 관원들은 나이가 많은 사람들입니다. 니고데모나 아리마대 요셉과 같은 사람들은 나이가 많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기는 '청년, 젊은 사람' 이라는 단어가 붙어 있습니다. 30대 초반 정도가 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우리 예수님과 동등한 나이입니다. 이 청년은 젊을 뿐만 아니라 관원이었다고 말하니까 오늘날 같으면 고시에 패스해서 서기관 이상의 고위직을 가진 사람입니다. 머리가 뛰어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그는 부자였습니다. 자세히 살피면 부자 된 사람은 부자 될 이유가 있습니다. 부자가 아무나 되는 것 아닌 것 같습니다. 나름대로 노력하고 애쓰고 자기 생애를 지혜롭게 잘 관리하는 능력 없이 부자가 될 수 없습니다. 또 이렇게 말할 수 있지요. '부모로부터 유산을 많이 물려받았기 때문에 부자다.' 하지만 재산을 물려받고 지킨다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 어렸을 때 승승장구했던 한국 재벌들, 그 자식 대에 얼마나 많이 무너졌습니까? 3대가 갈 집안이 몇 집이나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옛날 우리말에 '부자 중에 3대(代) 부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 젊은 청년의 경우는 자기가 노력해서 얻었던 부였든지 그렇지 않으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었든지는 잘 알 수 없지만 부자였습니다. 그런 대로 자기 것을 잘 챙길 줄 아는 근면함이 있고 낭비가 없고 또 자기의 재산을 잘 지키는데도 나름대로 열정을 기울였던 세상 사람 보기에 몹시 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성공하고 젊고 돈이 많았습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는 겸손했습니다. '예수 앞에 나올 때에 꿇어앉아'(막 10:17) 예수는 야인입니다. 사회적인 타이틀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고위직에 있는 누구든지 칭찬하고 존경할만한 사람이 오히려 별 볼일 없는 사람에게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세상에 참 어려운 것이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누구든지 겸손한 것은 좋아하고 교만한 것은 싫어합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만은 교만하고 싶은 것이 인생입니다. 정말 겸손하기 힘듭니다. 이 젊은 청년은 겸손한 태도를 가졌습니다.

그런가하면 그는 자기가 가진 현실적인 성공과 부요를 넘어서 영원한 것을 사모할 줄 아는 갈망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가지면 현실주의자가 됩니다. 갖지 못할 때는 이상주의자가 됩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공식입니다. 그런데 가졌고 누렸습니다. 그러면서도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현실을 넘어서서 참으로 귀한 가치에 대해서 마음이 열려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이 젊은 청년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켰다고 말하고있습니다. 예수께서 '네가 계명을 지키라'고 할 때 '내가 그것을 어렸을 때부터 다 잘 지켰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엄청난 소리입니다. 어릴 때부터 결점 없이 자란 사람들을 어쩌다가 한 명씩 보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릴 때는 깽판도 치고 갈지(之)자 걸음도 걸어보고 흔들흔들 하다가 인생에 철이 들면 곧바로 걷는데 어쩌다가 보면 어렸을 때부터 사회의 모범생으로 규범을 잘 지키며 자라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바로 그런 사람 중의 하나였습니다. 참 부러운 일입니다. 제가 참 부러워하는 사람 중의 하나가 제 바로 아래 동생입니다. 제 동생이 예수 믿는 집안에서 태어나서 지금까지 신앙이 흔들리는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태어나서부터 한번도 신앙의 회의가 없이 지금 60을 바라보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걸음을 걷는 제 동생을 보면 참 마음으로 부럽습니다. 그런 인생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다. 이렇게 모범적인 삶을 사는 자식을 가진 부모라면 '내가 얼마나 든든한 자산을 가졌는가?'하고 어깨를 폈을 것입니다. 동네방네 돌아다니면서 자랑하고 싶은 자식이요, 그런 남의 자식을 본 부모들은 '어떻게 하면 저런 사위를 얻을 수 있을까?' 탐냅니다. 그런가하면 젊은 처녀들은 '어떻게 저런 멋있는 남자를 만나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를 열망합니다. 교회에서는 '다음 안수집사 선거에 이 사람은 무투표 당선된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 반드시 장로가 될 것이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리더쉽을 가질 것이다.'라고 사람들에게 칭찬 받는 이런 부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참으로 모든 것을 많이 갖춘 사람입니다.

그 젊은 청년이 예수님과 멋진 만남을 가집니다. 그냥 예수 앞에 나간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가진 것이 그렇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 만족치 않고 영원한 가치에 목말라 '선한 선생님이여,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하는 질문을 던지는 멋진 만남이었습니다. 귀한 만남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왔지만 무수한 사람이 예수님을 지나갔습니다.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약속대로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사람들은 조그마한 자기 것에 열중해서 쉽게 쉽게 예수를 지나갔지만 이 젊은 청년은 자기 앞에 주어진 그 길에서 예수라는 인격을 이리 보고 저리 보면서 그 분이 어떤 분인가 마음속으로 확정한 다음 예수 앞에 나와서 가장 멋진 만남의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대화도 멋집니다. '선한 선생님이시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는 예수를 선하다고 말합니다. 당시에 예수는 성공한 사람의 증오의 대상이었습니다. 예수는 부자들을 꾸중했습니다. 예수는 높은 사람들을 저주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그래서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멸시했을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데 모든 마음이 합해져 있을 당시였습니다. 예수를 만나기는 만나고 싶지만 차마 만나는 것이 껄끄러워서 니고데모는 예수 안에 영생이 있는 것을 알고도 밤중에 가서 몰래 만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아리마대 요셉은 그가 예수님과 어떤 교류를 했는지 전혀 모르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니까 자기의 새로 판 무덤을 내놓고 장례를 치러주었습니다. 장례 때나 그의 얼굴이 잠깐 나옵니다. 그런데 이 젊은 청년은 대낮에 길가에서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예수를 '선한 선생이여' 부르면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곰곰이 짚어봤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그 행동들을 그냥 그냥 지나가지 않고 그 분이 무슨 행동했는가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고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결론을 내리기를 '이 분만은 선하신 분이요, 분명한 분, 잘못이 없으신 분'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외칩니다. '선하신 선생이시여,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17:3에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합니다. 이 사람은 영생의 깊이를 몰랐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추구한 영생은 불로장수(不老長壽)의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아직 그는 젊었습니다. 진시황처럼 자기 늙음을 바라보면서 온갖 보약으로 오래 사는 것을 꿈꾸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 선한 선생님을 통해서 참다운 가치를 얻기 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이 말은 '네가 선이라고 생각하는 삶, 네가 선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진정한 선은 하나님 한 분이다. 내가 지금 나를 사람으로 보고 선하다고 하는 것이지? 사람 자체에는 선이 있지 않다. 사물에도 진정으로 선한 것은 없다. 하나님 한 분만 온전한 선이시다. 네가 그것을 알아야 된다.'고 첫 번째로 가르쳐주십니다.

그러면서 두 번째로 '네가 계명을 지켰느냐?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마태복음에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는 이 계명까지 지키라'(마 9:19)고 말씀합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은 결국 이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이웃을 어떻게 사랑합니까? 이웃을 사랑하는 최대치는 어떤 경우에도 그의 생명을 존중해주는 것입니다. 이웃의 가정을 존중해주고 사랑해주는 것은 그 가정을 더 아름답게 연합되도록 뒷받침해주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이웃을 사랑하면 그들의 소중한 재산을 빼앗아서도 안되고 거짓말로 속여서도 안 된다. 그리고 네 부모를 사랑하라.'고 인간에 관해서 행할 도리를 다 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그 때 이 청년은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말합니다. 아름다운 만남이었습니다. 멋진 대화입니다. 얼마나 귀한 광경입니까? 예수께서 이 젊은 청년이 하나님 말씀에 전심으로 순종하려고 노력할 뿐 아니라 영원을 사모하는 그 마음을 보고 저를 사랑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 사랑하는 젊은 청년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을 가르쳤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먼저 가라고 말합니다. 가서 해야될 일이 있다고 말합니다. '있는 모든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어라. 그것이 하늘에 보화를 쌓는 것이다. 너 정말 영생을 사모하느냐?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축복된 삶을 누리길 원하느냐? 그렇다면 너희 보화는 하늘로 옮겨져야 된다.' 예수님께서는 이 젊은이의 마음속에 있는 재물 사랑하는 깊은 욕심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모든 재산을 내놓으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부자였습니다. 다윗은 역사상 최대의 부자였습니다. 아직까지 다윗을 능가하는 부자는 세상에 없습니다. 어떤 왕궁에도 어떤 사업가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다윗아, 네 모든 재물을 내게 가져오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욥도 부자였습니다. 이삭도 부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 자체에 대해서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재물을 내놓으라고 하면 아마 당장 내놓았을 거예요. 그렇데 아브라함이 내놓을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었어요. 이삭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모습 밖에 모릅니다. 하나님은 그 깊은 마음을 보셨습니다. 다음 주일날 우리가 삭개오를 묵상할텐데 삭개오에게 재산 다 내놓으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100살에 낳은 아들을 좋아서 어쩔 줄 몰라 모든 시선이 이삭을 향해 머물러있는 아브라함을 보시고 '아브라함아, 내가 지시한 땅으로 데리고 가서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내게 바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이 부자 청년에게 지금은 '네 재산, 네 소중한 것, 그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 주라. 이것이 하늘의 보화를 쌓는 길이다. 네가 영생을 참으로 추구한다면 네가 그것을 갖기를 원한다면 너는 네 마음속에 있는 그 집착을 먼저 내려놓고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중요하고 귀한 것이 그에게 그렇게 많았는데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보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젊은 청년을 진실하게 사랑하셨습니다. 젊은 청년의 마음속에 있는 그 선한 의지도 잘 아셨습니다. 그렇지만 그 마음속에 하나님을 대신해서 웅크리고 있는 욕심, '다른 것은 다 내놓아도 하나님, 이것은 안되겠습니다. 다른 것 다 주님께 드리지요. 그렇지만 이것은 내 것입니다'고 하는 그것을 우리 주님께서 바로 지적하셨습니다.

주님과 나 사이에 장애 될 것이 여러분에게 무엇이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여기 말한 대로 재물일 수 있습니다. 재물이 많고 적음을 떠나서 1억 짜리 가난한 사람이 있고, 1원 짜리 부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1억을 가진 사람이 이 돈은 정말로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라고 마음으로 주님께 드리고 사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1원을 갖고 이것 없으면 죽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1원 짜리 부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마음을 뚫어보는 깊은 통찰력을 가지셨습니다. 어떤 사람의 경우에는 습관이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습니다. 많은 것이 좋습니다. 귀합니다. 그런데 그 주님과 자기 사이에 끊어지지 않는, 하나님 앞에 얼굴 들면 부끄러운 습관이 있습니다. 그 한가지! 그것만 내 마음속에 있으면 아무 것도 생각나 버리지 않는, 그래서 어떤 경우에 하나님마저도 통제하고 싶은 이런 것들이 우리 속에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단 말입니다. 여러분에게 한가지 부족한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께서는 그것을 내어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한 가지 부족한 것 있습니다.' 그렇게 말했더니 이 청년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갔다고 했습니다.(막 10:22) 멋진 만남이었습니다. 그 성공한 젊은 청년이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를 가졌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직접 만날 수 있었고 영생의 본체이신 그 분이 통과하는 것을 묵과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 보는 앞에 뛰어나가서 무릎을 꿇고 그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달라고 손을 내밀었던 아름다운 광경, 헌신하기로 결정한 결의, 참 지혜로운 예수님의 질문, 예수님 앞에 가장 소중한 것을 요구할 줄 아는 젊은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나 결론은 재물이 많은 고로 그 말씀을 인하여 근심하며 슬픈 기색을 띠고 예수님을 떠나가는 비참한 광경입니다. 우리가 늘 자신에 대해 착각하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착한 생각한다고 착한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선한 생각을 많이 하니까 선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는 선을 생각하지만 실제로 나쁜 사람이 참 많습니다.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은 것을 생각하지만 나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 젊은 청년도 좋은 의지가 있었습니다. 좋은 생각이 있었습니다. 기회도 붙잡을 줄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가장 좋은 것을 누리지 못한 채 슬퍼하며 우리 주님을 떠났습니다. 영생이 그 손에 안겨질 찰나에 자기 손에 꽉 쥐고있는 다른 것 때문에 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그것의 소중성을 알았기 때문에 근심하고 슬픈 기색을 띄면서 걸어가고 있습니다. 와쯔라는 화가가 이 사람의 떠나가는 모습을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얼굴은 1/3이 잠깐 보일 정도로 축 쳐지고, 푹 수그려진 고개에, 얼굴은 비참 그 자체입니다. '내가 너무 소중한 것을 잃었어. 내가 참으로 갖고 싶은 것이었는데 붙잡을 수 없었어. 이것만은 놓치면 내 생애가 영원히 고통스러울텐데...' 그 모든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손이 비어 있어야 그 손으로 받지요. 이미 붙잡고 있는 것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에 주께서 주시는 선물을 받지 못한 채 비참하게 물러가는 이 젊은 청년의 모습을 봅니다.

내가 영생을 사모하는가? 오늘 우리가 예배 드리러 왔습니다. 누구를 만나러 왔습니까? 예수님 만나러 왔습니다. 여러분에게 선을 갈망함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사모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예배 끝나고 나면서 근심하며 떠나는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기도합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주님과 나 사이에 해결해야되는데...' 근심하며 이 자리를 떠나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어떤 사람은 '주께서 지금 내 마음속에 명령하신 명령 앞에 순종하겠습니다. 내가 이것을 끊겠습니다. 이 습관 버리겠습니다. 주님과 나 사이에 늘 문제가 되어서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주님 앞에 설 때마다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이것을 내가 끊고 가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이런 결의를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홍 목사, 제법 멋진 소리했소. 성경을 어떻게 그렇게도 볼 수 있지? 우리는 단순하게 생각 없이 읽었는데, 그 젊은 청년의 속마음을 그렇게 대신 말하니까 그럴싸해. 그리고 하나님과 나 사이에 중요한 것, 그것 있는데 그것 버리라는 것도 참 좋은 말이야.' 그냥 그렇게만 여기고 아무 생각 없이 집으로 가는 사람도 있어요. 어떤 모습으로 이 예배 장소를 떠나시기 원하십니까?

여러분은 어떤 모습으로 이 예배의 결과를 마음속으로 결정짓기를 원하십니까? 다시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하면서 참 좋은 것들을 많이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 그 한가지 부족한 것 때문에 전체가 부족해질 수가 있단 말이예요. 특별히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영광의 축복을 놓쳐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그것들을 주님 앞에서 내쫓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리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렇게 요구하신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이 젊은 청년은 '네 모든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 주라'고 말씀하신 얼마 후에 그 분이 십자가에 자기 몸을 찢으시고 죽으신 그 놀라운 광경을 봤을 것입니다. 자기를 아낌없이 내주신 그 주님이 '너는 모든 것을 다 내놓으라'고 요구하십니다.

먼저 나를 위해서 다 주시기로 작정하신 그 분이셨습니다. 그 분만이 나를 향해서 모든 것을 달라고 하실 수 있는 주인이십니다. 그것을 알았던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자기 자식을 붙잡고 주의 명령 따라 모리아 산정으로 올라갔습니다. 그것을 알았던 믿음의 사람 욥은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좋은 생각이 좋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닙니다. 감동이 진정한 은혜가 아닙니다. 좋은 결정이 멋있는 인생 아닙니다. 주의 요구 앞에 구체적으로 순종하며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청년은 '말씀을 인하여' 근심하며 슬픈 기색을 띠고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말씀을 인해서' 크게 기뻐했습니다. 치&51820; 도르프 같은 사람은 이 말씀을 들을 때 백작의 지위를 버리고 모라비안 청년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 생애를 헌신해서 유럽에서 새로운 복음운동을 시작했었습니다. 주님과 나 사이에 가로막힌 그 한가지 부족한 것이 무엇입니까? 주께서 오늘 이 시간에 해결하시기 원하십니다. 그리고 주께서 참으로 내게 주실 것을 예비하시고 나를 사랑하시면서 내게 진정한 것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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