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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를 따르라 (요 21: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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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명과 사명이 무엇인지 알필요가 있습니다.
소명은 부름받는 것이고 부르받은 사람이 명령을 받고 나가는 것을 사명이라고 합니다.
소명받은자가 부르는 찬송이 이찬송입니다.
부름받아 나선이몸 어디든지 가오리라

소명에 의해 나아온 사람은 반드시 사명자로 쓰십니다.
사명이란 말은 라틴말로 미씨오(Missio)란 말인데 이 말은 ‘보낸다’란 말입니다. 여기서 영어의 미션(Mission)이란 선교란 말이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선교적인 사명을 받은 선교사(missionary)입니다.
일국의 원수가 외국에 사절단을 보낼 때는 특수한 목적을 가지고 보냅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고 왔습니다.
사도바울은 “그런즉 너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린도전서 10:31)고 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제일가는 목적입니다.
만약 당신이 인생의 목적을 상실했다면 존재의 가치를 잃어버린것이요 사명을 잃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명을 발견하고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명자를 쓰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쓰지 않고 그 사람 속에 있는 사명을 쓰십니다.
사명자의 고백은 이와 같아야 합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사도행전 20:24)고 했습니다.

모든 인생의 불행은 사명의 망각과 하나님을 떠남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로마서 1:21)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갑시다. 당신에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주여 나를 보내소서! 해놓고 나중에 가라하면 주여 제를 보내소서! 그럽니다.

소명자는 명령이 임할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합니까?
십자가를 지는 일이라도 지체없이 따라나서야 합니다.
누가 해야 합니까? 내가 해야합니다. 남이 해야 합니까?
우리는 정답을 너무 잘압니다.
그런데, 내가 해야 한다고 하면서 않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하고 살면 일생동안 아쉬움과 후회가 따라다닙니다. 마음
한 구석에 늘 부담이 있습니다. 일생을 이것이 좇아 다닙니다.

마19:16-22에 보시면 이런 예가 나옵니다.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계명들을 지키라',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 하리이까?'예수님이 다시 말씀하십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좆으라''그리고 와서 나를 좆으라'고 분명하게 지명하여 부르셨습니다.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이 청년은 매우 가능성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종교적으로도 훈련된 청년입니다.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왔습니다. 영생에 대해 질문할 만큼 성숙한 사람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성실한 청년입니다. 청년인데 얼마나 성실했는지 재산을 모았습니다. 이미 부자가 되었습니다.주님이 부르실 만한 가능성을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부르시니까 응답하지 못하고 고민하며 떠나갔습니다.이 청년의 나머지 삶에 대해 성경을 침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여운을 남겨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못하는 그의 마음에는 근심이 자리잡게 되었습니다.그는 어디에 살든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아쉬움 속에 인생을 살았을 것입니다.지금도 가끔 이런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 때 하나님의 부름심에 응답했어야 하는데...지금은 너무 늦었어'여러분은 이렇게 되지 않기 바랍니다.

부르심과 응답은 개인적입니다. 하나님은 개인적으로 부르시고 응답도 내 개인이 해야합니다. 남이 듣고 대신 해주는 것은 정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내 이름 부르는데 남이 대답해주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면 자신이 직접 응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부르실 때 옆 사람을 돌아보거나 주위를 돌아보는 사람은 응답하지 못하고 주저하게 됩니다.
이때 옆 사람을 바라보거나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부르심의 소리가 잘 들리지 않습니다. 응답하지 못하게 됩니다.하나님은 개인적으로 부르시고 그 부름 받은 사람은 개인적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이 제일 잘하는 거짓말이 순종하겠다고 하면서 불순종을 제일로 잘한다는 것입니다.
직업별 거짓말이 있는것처럼 말입니다.
중국집에 전화 하면 이제출발했습니다.
옷가계 주인은 어머 이옷 언니에게 딱이다.
연애인들은 우리는 그냥 친구사이입니다.
엄마 대학가면 살빠지니까 지금은 많이 먹어라 그럽니다.
이런게 다 직업별 거짓말입니다. 속지 마세요.

아&47950;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불순종해서는 않됩니다.
나만 따르리라 하던 약속 너는 왜 잊어버렸나?
오늘 설교의 제목이 본문에 있는 그대로인데 “나를 따르라!'는 말속에는 나를 따르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고난이 따르는데 그것을 각오하고 나를 따르겠느냐는 말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뒤를 따르다가 물질적으로 손해도 볼 각오가 되어 있느냐?
예수님의 뒤를 따르다가 당하는 육체적인 고통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느냐?
예수님 때문에 핍박까지도 각오가 되어 있는가?
사명을 위해 목숨을 바칠수 있느냐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2. 소명자는 임무수행에 목숨을 걸어야지 다른사람이 어떻게 되는 것을 신경쓰지 말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21장 10절에 베드로가 주님께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러라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죽어야 된다고 하는 명령은 자기에게 주어져 있는데 아멘으로 응답하지 못하고 주위에 있는 요한을 가리키면서 “저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라고 묻습니다.
혼자 죽기 싫다는 것입니다. 고생을 하더라고 혼자 하기는 싫다는 말입니다.
그 말을 들었던 요한이 이말을 기록했는데 얼마나 기분이 나빳겠습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What is that to you?
그것이 너에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너 자신이 나를 따르는 것으로 너의 임무를 수행 할 뿐이지 다른 사람이 어떻게 되느냐에 신경쓰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쓸데없는 참견 말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도 자주 주님으로부터 너는 나를 따르라 하는 명령을 받았을 때 자기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 말씀을 받을 사람이 누구인가를 찾기 시작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말씀은 지금 자기에게 주고 계시는데 그 말씀을 비껴서 다른 사람에게 화살을 보내려는 얄팍한 모습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일에 신경쓰지 마세요. 다른 사람이 어떻게 믿는지, 행동하는지, 생각하는지 신경쓰며 자기 자신을 견주어 피곤하게 살아가지 마세요.
다른 사람의 문제는 그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스스로 해결할 문제입입니다.
요한은 그런면에서 훌륭합니다. 이사람은 어떻게 되겠냐고 질투심을 노골적으로 내 보이던 베드로와 파트너가되어서 초대교회를 섬깁니다.

3. 사명자는 포기하면 않됩니다.
‘따르라'는 말은 현재 계속해서 따르라는 말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keep on following me. 나를 계속해서 따르라, 중단하지 말라, 포기하지 말라,그런말입니다.
어떤 어려움과 문제가 있더라고 포기하지 말아라, 따르기를 계속하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시몬은 원래의 베드로의 이름이었습니다. 인간적인 이름이 나타날때는 시몬이었습니다.
시몬 베드로를 동시에 쓸때는 시몬에서 베드로로 넘어가는 과정입니다.
베드로라고 할때는 변화된 모습이 있을 때 적었던 이름입니다.

누가복음 5장에서 그배는 시몬의배라 그럽니다. 에수님을 만나기전 시몬의배였습니다. 베드로의 배가 아니었습니다.
마태복음 16장에 유명한 고백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했을 때 두이름이 겹쳐서 나옵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했다. 시몬에서 베드로로 넘어가는 변화의 과정을 말할 때 두이름을 같이 쓴것입니다.
다시 모른다고 했습니다. 다시 바닷가로 고기잡으로 갑니다.
요한복음 21절에 다시 시몬이라고 기록합니다.
시몬이라고 불렀을 때 베드로는 가슴이 철렁했을 것입니다.
인간적인 모습들 불확실한 모습들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여전히 우리는 시몬과 같은 모습을 드러내고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불확실한 것을 덮어두고이길로 좆아 오라!하시며 새길을열어주십니다.

소록도에서 일하시는 목사님은 건강하신 분이시고, 그곳에서 일하는 전도사님은 한센씨병 환자라고 합니다.
그 전도사님이 방문자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인간 마지막 섬에 오셨습니다.
한때는 6000명이 넘는 환자가 있었는데 지금은 750여 명의 환자가 있습니다.
이름만 예쁩니다. 소록도는 '아기 사슴섬'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섬에 들어오면 죽는 것입니다. 여기가 마지막입니다.
여러분, 그러나 우리가 꼭 가야할 또 하나의 섬이 있습니다.
정말 마지막 섬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 그 섬에 가야 합니다.
여러분,그 섬에 가셨습니까? 가시겠습니까? 혹시 그 섬에 사십니까?
여러분, 그 섬이 어디인지 아십니까?
그 섬의 이름은 '찌라도'입니다.
저는 '찌라도'라는 섬이 있다는 것을 처음 들어 알았습니다.

그 섬은 하박국 선지자가 알려준 섬이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 찌라도' (합3:17)

그이전에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알려준 섬이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금신상에 절하지 않는다고 붙잡혀서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풀무불 속에서 건져내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단3:18)

여러분은 그 섬 '찌라도'에 가셨습니까?
그 섬에 살고 계십니까?

저는 그 말을 전해 듣고
가슴에 '제가 그리하지 못했던 것을 회개하였습니다. .
지금도 제 마음에 담겨 있는 이 감동을 여러분도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너무 쉽고 편안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조금만 안되면 투덜대고 불평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찌라도'라는 단어를 보기는 보았지만
가슴에 담고 그렇게 살지는 못했습니다.

이번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신년집회가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가 되어야 할 것이고, 우리 자신을 회복하는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살기가 힘든 줄 압니다. 어려운 줄 압니다.
그러나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소가 없을찌라도… , 식물이 없을찌라도…범사에 감사하며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생활하고 있습니까?

구약 성경의 룻기라는 책은 룻이라는 여인의 효성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룻기에는 또 다른 교훈이 있습니다.
유대땅 베들레헴에 엘리멜렉이란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먹을것 구하기가 힘이 들었습니다. 엘리멜렉은 모합 땅에는 먹을 것이 많다는 소문을 듣게 됩니다.
엘리멜렉은 잘 살아 보겠다고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합 땅으로 이주를 하였습니다. 모합 땅에서 열심히 일하여 잘 살게 되었습니다. 두 아들을 위하여 모합 여자를 며느리로 맞이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가정에 비극이 찾아 왔습니다.
그렇게 잘 살아 보겠다고 고향까지 버리고 먼 이국 땅으로 이주한 엘리멜렉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가장을 잃은 슬픔은 참으로 컸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비극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얼마 있지 않아 두 아들 모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나오미에게는 먼 이국 땅에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모합 여자인 두 며느리하고 덜렁 남게 되었습니다.

룻기는 왜 이런 비극이 찾아 왔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에 땅에 거하는 것이 합당한 것이지 조금 힘들고 어렵다고 약속을 버리고, 약속의 땅을 버리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잘 살아 보겠다고 나섰고, 잘 사는 것 같았지만 결코 잘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4. 하나님은 사명자와 늘 함께 하시고 역사하십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신앙생활이란 어디에 내 몸과 마음을 두고 있느냐 하는 점에서 구별이 되는 생활입니다.
'행동하는 신학자'라는 별명을 가진 본회퍼 목사님은 오랫동안 감옥에서 생활했고 마침내 나치에 의해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 목사님의 책 '옥중서신' 첫 머리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내가 지금부터 말하려는 하나님은 경계선에 계신 분이 아니라 한 복판에 계시는 분입니다.
비밀 장소로 피신해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사건의 한 가운데에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숨어서 구경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속의 사건과 고통, 복잡한 문제… 속에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미국에 야구잡지에 소개된 이야기입니다.
미국에는 많은 프로 야구팀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많이 우승했고 작년에도 우승했던 뉴욕 양키즈팀이 있습니다.
뉴욕 양키즈팀의 캣쳐로 [요기 베라]씨가 활약하고 있을 때 상대편 [가라기 올라]라는 선수가 뱃트를 들고 나오더니
몇 번의 연습 스윙을 하더니 땅에다가 십자가를 그리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많은 미국 선수들이 하듯이 공을 잘 치도록 기원하는 행동입니다.
요기 베라는 심판에게 타임을 얻어 '가라기 올라'에게 항의하였습니다.
 
'나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고 자네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데 하나님이 이런 형편에서 누구 편을 들 수 있겠는가?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이 경기를 구경만 하시도록 내버려 두세.' 그랬더니 가라기 올라 선수는 '우리 교회에서 들은 설교에 의하면 하나님은 구경만 하는 것을 제일 싫어하시는 분이라네. 하나님은 저 관람석에 앉아 있기를 싫어하시고 이 경기장 속에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일세.'라고 했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 생활 속에 하나님은 구경이나 하시라고 하고 여러분 마음대로 하십니까?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그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분으로, 아니면 이 서울영광교회라는 건물 속에 갇혀 계시는 분으로 믿으십니까? 아니면 생활 속에 힘들고 어려운 삶의 현장에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은 땀과 눈물과 피가 흐르는 사건의 한 복판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다윗은 그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골리앗과 싸우는 사이에 직접 개입하시는 그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2005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현장에 함께 하실 것입니다.
물론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것입니다.
한 숨 쉬고 눈물 흘리는 일들이 우리들의 삶 속에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국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을 믿고
순간 순간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5.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부르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들포도 같은 이스라엘을 부르셔서 참 포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부르심에 합당한 생활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사야서를 보면 '참포도 맺기를 바랐는데 들 포도를 맺힘은 어쩜인고?' 하는 하나님의 탄식을 볼 수 있습니다.

성도로서의 품위를 유지해야 합니다.
예전엔 들포도를 맺었지만 계속 들포도만 맺으면 어떻합니까? 이젠 참포도를 맺어야 합니다.

거지 왕자란 동화가 있습니다.
거지가 왕자가 되고, 왕자가 거지가 되었습니다.
거지가 된 왕자는 거지처럼 살면 됩니다. 그러나 왕자가 된 거지는 왕자처럼 살아야 합니다.

미운 오리 새끼란 동화가 있습니다.
오리일 때는 오리처럼 살면 됩니다.
그러나 자신이 백조인줄 알았다면 백조처럼 우아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전에는 세상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살아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부르심에 합당한 생활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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