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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요 17: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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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 소원이 하나 있다면, 하루라도 빨리 감옥에서 벗어나는 것일 겁니다. 말이 쉬워서 그렇지, 쇠창살 안에서 몇 달 혹은 몇 년씩 갇히어 살아야 한다는 것은 생각만 하여도 끔직한 일입니다. 하물며 죄를 짓지도 않고서 억울하게 옥살이하는 사람의 경우라면, 감옥살이의 고통과 석방에 대한 염원이 누구보다도 더 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억울하게 옥에 갇혔다고 가정을 해 보십시다. 여러분이 결백하면 할수록 한시라도 더 빨리 석방되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여러분이 수감되어 있는 그 감방의 철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말하자면 밤낮으로 고대하고 열망하던 출감의 시간이 된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들 가운데 기쁨으로 그 감옥의 문을 나서지 않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그 열린 감옥 문을 보고서도, '왜 저 문이 지금 열렸을까' 의아해 하며 감방 속에 그대로 눌러 앉아 있을 어리석은 바보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정말 그처럼 바보 같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2차 선교여행 도중 빌립보에 갔을 때, 어떤 남자가 귀신들린 소녀를 이용하여 점을 치면서 많은 돈을 벌고 있는 것을 목격합니다. 처음 바울은 그냥 지나쳤지만, 여러날 동안 그 길목을 왕래하면서 귀신들린 어린 소녀가 불쌍하여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소녀에게서 귀신을 쫓아 버렸습니다. 그 결과 소녀의 정신은 바로 돌아 왔지만, 그 대신 소녀를 이용해 치부하던 점쟁이는 졸지에 좋은 돈벌이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화가 난 점쟁이는 사도 바울을 민심과 풍속을 해치는 사범으로 모함, 고발해 버렸고, 관원들은 일방적인 점쟁이의 말만 듣고서 정식재판 절차도 거치지 아니한 채 바울의 옷을 찢어 벗기고 매질을 한 뒤, 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그날 밤 객지의 감방에 처량하게 갇혀 있는 사도 바울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는 법을 범한 적이 없었습니다. 했다면 단지 선한 일을 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죄수가 되어 매를 맞고 두 발에 착고까지 채인 채 감옥에 갇혔다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억울한 만큼 감옥에서 더 빨리 벗어나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그 날밤, 바울이 함께 갇힌 실라와 더불어 하나님께 기도 드리고 찬양을 부를 때였습니다. 갑자기 땅이 흔들리며 옥문이 열리더니, 두 발에 채워져 있던 착고까지 저절로 풀려 졌습니다. 순식간에 바울은 자유의 몸이 되었고, 그 앞에는 자유의 길이 열려진 것입니다. 그때 바울이 어떻게 하였습니까? '아! 하나님께서 드디어 나의 억울함을 아시고 모함과 감옥으로부터 나를 풀어 주시는구나!' 이렇게 감격하면서 유유히 그 감옥을 나섰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자유의 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감방 안에 앉아 있었습니다. 단지 그런 식으로 감옥에서 벗어 나는 것 자체가 목적이라면, 하나님께서 애시당초 시간을 낭비하시면서까지 자기를 감옥 속에 들어오게 하실 리가 없음을 바울은 알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극히 사랑하시는 바울이 선을 행하고서도 억울하게 매를 맞고, 도리어 모함을 받아 투옥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막지 않으시고 허락하셨다면, 그것은 바로 그 감옥 안에서 무엇인가 행하시기 원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으리라 바울은 확신했던 것입니다. 그 믿음 때문에 바울은 옥문이 열려 자유의 길이 그 앞에 펼쳐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감방 안에 앉아 있었습니다. 이처럼 매사를 자기 유익, 자기 중심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 중심, 하나님 시각으로 살피는 삶속에 바로 사도 바울의 위대함이 있었습니다.

과연 바울의 믿음과 판단은 정확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바울을 감옥에서 끄집어내어 주시기 위해 바울을 감옥 속에 들어가게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펼치시는 구원의 도구로 쓰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한밤중 곤히 잠들었던 간수가 갑자기 땅이 요동침을 느끼면서 눈을 떴을 때, 그는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옥문이 죄다 열려 있는 것이었습니다. 죄수들의 탈옥이 아니고서는 벌어질 수 없는 광경이었습니다. 간수는 지체없이 자기 칼을 빼어 두 손으로 자기를 찌르려 했습니다. 죄수의 탈옥을 막지 못한 간수는 어김없이 사형이었기에, 불명예스러운 사형보다는 그래도 명예스러운 자결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갑자기 큰 소리가 간수의 귓전을 때렸습니다.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그대로 있노라' 간수의 자결을 제지하려는 사도 바울의 외침이었습니다. 그 소리는 간수를 더더욱 놀라게 했습니다. 옥문이 활짝 열려 있는데도 죄수가 도망하지 않고 그대로 감옥 속에 앉아 있다는 것은 상상치 못할 일이었던 것입니다. 간수는 급히 등불을 들고 감방 속으로 뛰어 들어 갔습니다. 방금 들린 소리가 귀신 소리인지 정말 사람소리인지 확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감방 속에는 놀랍게도 바울과 실라가 정말 도망가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습니다. 간수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바울 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옥문이 열리고 자유의 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감방 안에 앉아 있다면 보통 사람이 아니었음이 분명했고, 또 바울과 실라가 도망가지 않았음으로 인해 자신은 사형을 면할 수 있었던 까닭입니다. 말하자면 그 상황 하에서 바울은 그의 생명의 은인이었던 것입니다. 간수가 감격에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바울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간수는 그 즉석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는 그에게 속한 모든 권속들과 더불어 세례를 받고, 새 생명 얻었음으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친히 펼치신 한 편의 드라마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 날밤, 그 감옥 속에서 사도 바울이 경험했을 하나님의 영광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 날 낮에 바울이 귀신들린 소녀를 고쳐 주지 않았더라면, 그 소녀를 고용했던 점쟁이가 엉뚱하게도 바울을 모함하여 고발치 않았더라면, 관원들이 불문곡직 바울을 때리고 감옥 속에 집어 넣지 않았더라면, 그 날밤 땅이 흔들리면서 옥문이 열리지 않았더라면, 단 하나의 사건이라도 어긋났다면 결코 있을 수 없는 구원의 대역사였습니다. 바울 자신을 통하여 한치의 오차도 없이 역사 하신 하나님을 생각할 때, 바울은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용솟음 치는 감동을 주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 자기 앞에서 구원의 감격에 겨워하는 간수와 그 권속들을 보면서 자기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크나큰 영광을 목도하고 확인했을 것입니다.

크리스찬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보고 체험하는 것보다 더 큰 사건은 없습니다. 크리스찬의 참된 힘과 능력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것으로 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많은 크리스찬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원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그 날밤 빌립보 감옥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본 것은 결코 우연의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만약 사도 바울이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는 자였다면, 그래서 옥문이 열렸을 때 무고하게 투옥된 자기의 억울함만을 생각하면서 얼씨구나 하고 감방을 뛰쳐나왔다면, 그는 빌립보 감옥에서 자기를 통해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치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만약 바울이 사람에 대한 배려나 사랑이 전혀 없는 인간이었더라도, 이를테면 길거리에서 귀신들린 불쌍한 소녀를 보고서도 그 아이를 전혀 불쌍하게 여기지 않았다면, 감방 속에서 자살하려는 간수를 보고서 '너도 나를 억울하게 투옥시킨 관원들과 다 한 통속이지' 하며 그대로 방치했더라도, 그 날밤 그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영광을 결코 체험치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 날밤, 세상이 모두 잠든 가운데 바울이 지구 한 구석에서 그처럼 놀랍도록 체험했던 하나님의 영광은, 바울의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결과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대단히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즉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자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오늘 본문 9절-10절을 통해 이 사실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내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여기에서 저희란 하나님께서 주님을 믿으시고 맡기신 사람들, 곧 일차적으로 제자들을 일컬음이요, 주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목전에 두신 최후의 순간에 바로 그 제자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 드리고 계심을 우리는 6주전부터 살펴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오늘 본문을 통해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하고 기도 드리고 계십니다. 풀이하면 주님께서는 제자들로 인해 이미 영광을 받으셨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이 정말 사실 그대로 입니까?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은 주님의 말씀과는 정반대입니다. 제자들은 아직까지도 주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다고 여러 차례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 마지막 순간까지 그 말씀을 믿는 제자는 아직까지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이제 주님께서 곧 로마군을 물리치고 정권을 잡으리라 확신하고, 누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할까 다투고 있는 형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상태입니다. 더욱이 주님께서는 조금 전에 요한복음 16장 32절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이제 곧 주님께서 잡혀가시면 그때까지 망상에 젖어 있던 제자들이 놀라, 모두 주님을 배신하고 흩어져 도망 갈 것을 주님께서는 다 알고 계셨습니다. 십자가의 현장에서 제자들이 주님께 영광을 돌리기는커녕, 주님을 욕되게 할 것임을 벌써 예견하고 계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이미 모독을 받았고 또 받을 것이라' 하나님께 하소연함이 마땅치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어떻게 주님께서는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라는 정반대의 기도가 가능 하셨겠습니까? 주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시며, 사람을 사랑하는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중단없이 사랑하면 반드시 사람이 거듭나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남을 주님께서는 분명히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미 지난 6주동안 살펴 본 바 있거니와, 주님께서 왜 제자들 앞에서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만을 나타내셨읍니까? 왜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만을 전하셨습니까? 왜 자신의 죽음을 코 앞에 두고서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셨읍니까? 이제 곧 자신을 배반할 줄 아시면서도 왜 주님께서는 그들이 하나 되게 해달라고, 악에 빠지지 않게끔 진리로 그들을 거룩하게 보전해 주시기를, 제자들뿐만 아니라 제자들의 말씀을 듣고 주님을 믿게 될 미래의 그리스도인들까지도 위하여 왜 그토록 간절히 기도하셨읍니까? 이유는 오직 하나-하나님을 사랑하시고,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신 있게 기도 드리셨습니다.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이미 영광을 받았나이다' 직역하면 나는 제자들 안에서 영광을 유지하였다는 뜻입니다. 비록 제자들이 지금 배신의 노상에 서 있다 할지라도, 주님에게 하나님과 그들을 향한 사랑이 마르지 아니하는 한, 그들을 통하여 반드시 드러날 하나님의 영광을 주님께서는 미리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과연 주님의 믿음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마침내 세계의 역사를 뒤바꾸어 놓는 위대한 사도들이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처럼 제자들이 완전무결하게 변화되어 가는 것을 보셨을 때, 주님께서 누리셨을 하나님의 영광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 영광이야말로 주님의,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의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아침, 크리스찬을 또 어떻게 정의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기에, 어떤 경우에도 사람에 대해 절망하지 않는 자가 참된 크리스찬입니다. 내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또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한, 설령 나를 모함하고 배신하는자라 할지라도, 그를 통해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 날 것을 믿고 그 영광을 미리 보는자가 크리스찬이기 때문입니다. 신앙훈련이 무엇입니까? 신앙의 성숙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가 예배 드리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을 키우므로 하나님의 영광속에 거하기 위함입니다.

지난 10월 2일은 수요일이었습니다. 그날 수요예배를 준비하던 중, 한 성도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호주에서 살고있는 그 분은 어느 주일예배를 드리기 위해 멜브론 대학으로 갔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그날 그곳에서는 저희교회 테이프로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 예배를 통해 그분은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잠시 귀국한 김에 감사를 표하기 위해 전화를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까지는 10월 첫째주일 4부 청년예배시간에 말씀드린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고향은 부산이어서 귀국하여 부산으로 갔습니다. 본래는 저희교회를 찾아와 예배에 참여할 생각이었지만 일정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저희교회로 전화를 하려했지만 전화번호를 알 길이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호주로 되돌아가기 위해 부산에서 서울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바로 옆 자리에 앉아있는 승객과 이런 저런 얘기를 하던 중 '주님의 교회'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 승객이 주님의 교회도 알고 있고 전화번호도 알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승객은 미국 시애틀에서 온 사람으로써 러시아에서 사역하고있는 김만조 선교사님의 친구였습니다. 미국을 떠나면서 귀국길에 김 선교사님을 만날 수 있는지 연락을 했더니, 김 선교사님이 '환 태평양 선교대회'가 열리는 주님의 교회에서 만나자면서 전화번호를 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호주에서 온 성도님은 그분으로부터 전화번호를 받아 우리교회에 전화를 했던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는 이처럼 서울의 한 구석에서 예배드릴 따름인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예배를 통하여 지구 반대편 뉴질랜드에서, 역사 하실뿐만 아니라, 한 영혼을 위하여 서울에 있는 사람, 미국에 있는 사람, 러시아에 있는 사람까지 동원하시어 한치의 오차도 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며 사람을 위하여 더 기도하는 사람들이 된다면, 사람들로 인해 더 큰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은 너무나도 명약관화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우리를 절망케 하는 사건들과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결코 절망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 곧 당신을 배신할 제자들에게 절망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즐기셨던 주님의 제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선을 행하고도 억울하게 모함을 받고 투옥되는 상황 속에서도 사도 바울처럼 나보다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는 자들이 되십시다. 내게 등을 돌리고 배신하는 자를 위해서도 주님처럼, 간절히 기도하는 자들이 되십시다. 나와 관련 없는 길거리의 소녀와 감옥의 간수를 위해서도 기도하는 자들이 되십시다. 우리는 기필코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재물이 많아지면 콘크리트 담이 높아지고, 권력이 세어지면 인간 장벽이 두터워지지만,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 커지면 하나님의 영광만이 더 높아집니다. 주님 안에서 어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 하나님은, 오늘도 살아 계시고, 내일도 영원토록 살아 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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