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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를 고대했던 시므온 (눅 02:2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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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데일 카네기의 사무실에는 아주 중요한 자리에 커다란 거룻배의 그림 한 점이 걸려있었다고 합니다. 배는 무척이나 낡은 모습을 하고 있고 노는 모래 위에 놓여있습니다. 썰물로 물이 빠져나간 모래 언덕위에 덩그러니 걸려있는 배를 그린 그림입니다. 마치 버려진 것 같은 배 그림 하나가 철강 왕 카네기의 사무실 정면에 왜 걸려있었을까요? 처량하게 아주 쓸모없이 내버려진 것 같은 배 한 척이 그려있는 그림이지만, 그 그림 밑에는 이런 글이 적혀있었습니다.
'반드시 밀물 때가 온다.'
지금은 썰물이 돼서 물이 다 빠져나가 이 배가 이렇게 모래 언덕에 걸쳐있지만 반드시 밀물 때가 와서 이 배를 물위에 띄워 놓을 것입니다. 그리할 때에 이 낡은 배도 쓸모 있게 쓰여 질 때가 올 것입니다. 썰물이 있는가하면, 또 밀물 때가 반드시 있기 마련입니다. 때를 기다리는 이 낡은 배 한 척, 이 거루의 모습을 그 사무실에 늘 걸어놓은 카네기는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아무리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낙망하지 않았던 그의 생애가 보이지 않습니까?
지난 여름 서해안 안면도의 한 해수욕장에 갔었습니다. 해변은 밀물과 썰물로 인해 넓은 백사장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해가 안되는 것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해변을 따라 언덕이 있고 그 언덕엔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 소나무 숲의 바닥은 아주 고운모래로 이루어진 모래언덕이었습니다. 해변보다 3-4미터나 높이 이루어진 이 언덕은 그 해변보다도 고운 모래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2박3일 있으면서 그 언덕까지 물이 올라온 것을 본적이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 언덕도 물이 넘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모래가 언덕을 이룰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 정도 높이까지 물이 오를 날은 언제일까요?
안면도의 모래언덕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게 밀물의 때를 기다리듯 ,기다림의 세월을 산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메시야를 기다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모두다 메시야를 기다렸다고 생각할 수없습니다. 성경을 펼치면 메시야를 기다리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다 메시야를 대망했던 것은 아닙니다. 원래 조상들의 신앙 속에서 메시야를 기다리는 전통이 있어왔지만 자신들의 신앙에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모두 참 신앙은 멀어지고 관념적이고 습관적인 신앙행위만 남아있는 시기가 주님께서 오셨던 시기요, 또 우리가 살고있는 현대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오래동안 메시야를 기다려온 한 노인을 만날 수 있습니다. 시므온이라는 이 사람은 먼저 예루살렘에 사는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라고 소개되고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있으니”라고 되어있는데 이 “있으니”라는 동사(엔)은 계속을 나타내는 미완료 동사입니다. 이렇게 동작이 완료되지 않은 뜻을 가진 동사를 사용한 이유는 그가 일부러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다는 말을 강조합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나요?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느라고 그곳을 떠나지 않은 것입니다. 고지식하리만치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런 삶의 태도는 현대에는 그리 환영받지 못하는 미덕입니다. 쉽게 말해 구태입니다. 기다림은 사실상 현대인에게는 매력 없는 가치관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시므온은 평생을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기다렸습니다.
바로
1. 그의 간절한 기다림이 주님을 만나게 했습니다.
이런 그의 간절한 열망이 그로 하여금 성령의 감동을 받게 하고 성전에 가서 예수님을 만나고 안고 축복의 노래를 부르게 한 것입니다. 그는 성전에 갔다가 그리스도를 우연히 만난 것이 아닙니다. 그냥 지나가다가 만난 것이 아닙니다. 약속을 따라 오랜 기다림 후에 만난 만남이었습니다. 주님을 우연히 만나는 것도 엄청난 일이지만 그의 만남이 진정 가치가 있는 것은 열심히 간절히 기다린 다음의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기다림이 없어도 예수님은 오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오심은 하나님의 약속이지 사람들의 요청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다림 없이 만나는 그러한 만남은 그와는 아무 관계없는 만남입니다. 우리가 가만있어도 성탄은 옵니다. 우리가 기다리지 않아도 그리스도는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성탄은 나와는 아무런 관계없는 성탄, 의미 없는 성탄이 될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성탄이 여러분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너무 상업적이 되었다고 한탄하십니까? 세상이 너무 화려하고 방탕하게 성탄을 보낸다면서 성탄 장식 없이 캐롤 없이 성탄을 조용히 보내는 교회들도 있습니다. 아예 성탄을 세상에 내주는 것 아닙니까?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보내야합니까? 울며 보내야합니까? 아니면 숨어서 보내야합니까?
성탄절에 바라고 기대하는 구체적인 소망이 있으십니까? 선물받기를 기대하십니까? 아니면 아이들에게 선물사주어서 오랜만에 부모노릇 만회할 기회로 기다리고 계십니까? 그런 분들 있지요? 성탄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작년부터 성탄에 대해 특별히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한해가 다 가면 성탄은 그냥 왔다가, 캐롤 몇 번 불러보지도 못하고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에게는 작년부터 성탄을 특별히 기다리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금년에는 성탄절을 전후해서 일주일동안 새벽기도 설교를 포함하여 12번의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12편의 설교를 준비하면서 저는 성탄을 기다린 사람들을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발견한 것은 첫 번째 성탄절은 주님을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주어진 축복이었으며, 기다리지 않았던 사람들에게는 저주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땅에서 평화를 입은 사람들은 모두 주님을 기다렸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천사가 찬송하지 않습니까? 하늘에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모두에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첫 번째 성탄은 이렇게 주님을 기다린 사람들에게 주신 축복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시므온이 맞이한 성탄은 무슨 의미가 있고 우리와 무엇이 다른가 깨닫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시므온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습니다.
이 말은 메시야사상을 보여주는 구약의 언어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영달이나 자신의 구원을 위해 기다린 메시야가 아니라 나라와 민족을 위한 특별한 사랑으로 기다렸던 신앙입니다. 시므온의 성탄은 즐겁거나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이 아니라 기울어진 나라, 아니 무너져버린 하나님의 나라를 일으키는 거대한 소망을 이루는 성탄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다는 말씀 속에서 저는 나약한 한 노인이 얼마나 자신의 민족과 나라를 사랑하는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나라를 위한 기도에 얼마나 게으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일 학년짜리 아들 녀석은 식사기도 하라고 해도 꼭 빼놓지 않고 “아프가니스탄의 난민들과 북한 어린이를 위해기도”하는 데 나는 밥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도밖에는 못합니다. 여러분 저는 왜 그렇죠? 참 한심합니다. 내가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라와 관련되어서 하는 일이라고는 무관심 하나밖에 없습니다. 왜 이 늙은이가 죽지 못하고 살아서 성전을 지켰겠습니까? 오직 나라를 구원하실 하나님의 손길을 기다린 것 아닙니까? 이런 노인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우리 같은 젊은 사람들은 더 할일이 많지 않겠어요?

3. 시므온의 성탄은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는 성탄이었습니다.
29절에 말씀하십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 도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성탄절에 죽어도 좋습니까? 기다림 없는 성탄, 아이들에게 인기 얻으려는 성탄이라면 죽어도 좋겠습니까? 죽으면 안되는 성탄이지요.
평생 주님을 기다린 시므온과 같은 경우는 첫 번째 성탄절에만 가능한 이야기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평생을 주님을 기다리며 사모하며 사는 시므온과 같은 어른들을 교회 곳곳에서 만납니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부끄럽지만 저도 주님을 만나면 죽어도 여한이 없는 신앙을 가진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여러분들이 이 메시지를 꼭 들어야 할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설교를 준비하다 보니 여러분들도 모두 주님을 만난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축복으로 여기고 산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 그렇지 않은 사람 있으면 손 좀 들어보세요. 오늘 주님 만난다면 여러분이 뭐 이 세상에서 더 살겠다고 고집피우겠습니까?

4. 믿음의 눈으로 구원을 보았습니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 즉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구원의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이루어진 구원의 역사를 보았습니다. 30절의 말씀입니다.“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도다”고 말씀하십니다.
더 이상 성탄의 의미가 무엇인지 고민하지 마십시오. 상업화되고 타락한 성탄절이라고 그만 개탄하십시오. 안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 덕에 기분 내는 것 무슨 심통이라도 난사람처럼 비난할 것도 없습니다. 바로 그들이 지금은 뭔지 모르고 즐거워하지만, 아직은 그리스도가 어린아기에 불과한데도 구원을 보았던 시므온의 눈으로, 아직은 성탄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는 사람이 천지이지만, 그들의 구원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시는 2001년도 성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시므온의 성탄절을 묵상하시면서 나라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이 땅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꿈을 꾸시는 성탄이 되시기 바랍니다.
/전용구 목사
 (200501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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