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빈 배 (눅 05:1-11)

첨부 1



빈 배 (눅 5:1-11)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할 때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로 따라 다녔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없어서 복음을 증거하지 못하는 그러한 일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사람들의 고통을 들어주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절망에 처한 사람에게 소망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갈릴리 호수에 절망에 빠진 한 사람의 어부가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베드로입니다. 그는 밤새도록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으려고 했으나 그물에 풀만 가득히 걸려오고 찢어질 뿐 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장모님은 아파서 집에 누워 있는데 치료비만 해도 감당하기 어려운 형편이었습니다. 게다가 처자들이 자기의 어깨에 다 얹혀 있습니다. 이러므로 장모님 치료비 대고 처자식 생활비 대는 일에 비용이 엄청 들어갑니다. 그런데 고기가 잘 잡히지 않습니다.

그는 잔뼈가 굵어질 때까지 갈릴리 호수에서 그물만 던지고 살았기 때문에 다른 일은 할 줄 모릅니다. 그런 현실에 베드로의 입에서는 탄식만 나왔습니다. 배를 강가에 놓고 하염없이 한숨을 쉬면서 배에서 그물 곳곳에 걸린 풀을 뜯어내고 있었습니다. 또 뚫어진 그물을 깁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많은 군중이 그 해변가로 몰려옵니다. 고개를 들어보니 예수님이 그 앞에서 군중에게 밀려서 오다가 그만 베드로 배에 올라 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배를 육지에서 좀 떨어뜨려 주시오”라고 부탁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육지에서 배를 조금 떼니까 예수님께서는 그 배에 앉아서 사람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있지 않아 베드로도 예수님의 가르침에 심취했습니다. 그만 그는 빈배도 잊어버리고 고기 못 잡은 것도 잊어버리고 생활의 어려움과 고통도 다 잊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흠뻑 젖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다 끝마치고 베드로를 내다보시더니 “배를 빌려 줘서 고맙다. 자 이제 깊은 곳에 가서 함께 고기를 잡자”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정신을 차린 베드로는 ‘이분이 도대체 어떠한 분인가 나는 갈릴리에서 잔뼈가 굵도록 자라서 갈릴리 바다를 잘 아는데 해가 뜨면 고기가 전부 깊은 바다 속으로 들어가서 아무리 그물을 던져도 깊은 바다에서는 고기를 못 잡는데 어떻게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하는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개를 슬슬 흔들었으나 예수님의 눈빛에 밀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하기를 “밤을 맞도록 그물을 던졌으나 잡은 것이 없으되 명령에 의해서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지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배를 저어 깊은 곳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명하신 대로 깊은 곳에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그물 안은 물고기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채운 것이 많아서 그물이 찢어졌습니다. 그 고기를 자기 배에 가득 채웠습니다. 예수님도 고기를 잡는데 도와 주셨습니다. 그리고 동료들의 배를 불러서 그곳에도 가득히 채웠습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상상을 초월한 것입니다. 그때 불현듯 베드로에게 깨달음이 왔습니다. ‘이분은 보통 분이 아니다. 이분은 하나님이 같이 계신 분이다. 하나님이 같이 계신 분과 함께 있다’ 이렇게 생각하니 그 마음속에 느낀 것이 죄입니다. 거울 앞에 서면 자기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서면 자기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그런 죄책감으로 견딜 수 없어서 꿇어 엎드려 말하기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고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지금부터 너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많은 교훈이 있습니다.

1. 빈배의 슬픔
인생을 배에다가 비유한다면 삶 속에 행복과 기쁨이 없는 빈배를 가진 사람이 많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행복도 없고 기쁨도 없는 빈 배. 빈 배 인생을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사업에 실패하고 빈배를 저어가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배속에서 한없이 탄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꿈을 잃어버린 빈배도 있고 사랑을 잃어버리고 고통과 슬픔 가운데 있는 빈배도 있습니다. 성공이 없는 빈배도 있습니다. 건강을 다 잃어버리고 이제는 살아갈 힘조차 없는 빈배도 있습니다.

밤이 맞도록 수고해도 잡은 것 없이 빈배에 앉아 있을 때의 그 비참한 심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원래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는 우리의 인생을 빈배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인생의 배에는 하나님의 믿음, 소망, 사랑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들은 축복과 은혜로 가득한 인생의 배를 가지고 출발했지만 하나님을 등지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에덴동산에서 떠난 이후로 그들의 인생은 빈배를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수고하고 애쓰고 노력해도 배를 채울 수가 없었습니다. 언제나 배는 비어 있었습니다.

예레미야 17장 13절에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미가 6장 13절로 15절에 “그러므로 나도 너를 쳐서 중히 상하게 하였으며 네 죄를 인하여 너를 적막하게 하였나니 네가 먹으나 배부르지 못하고 속이 항상 빌 것이며 네가 감추나 보존되지 못하겠고 보존된 것은 내가 칼에 붙일 것이며 네가 씨를 뿌리나 추수하지 못할 것이며 감람을 밟으나 기름을 네 몸에 바르지 못할 것이며 포도를 밟으나 술을 마시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죄를 물먹듯이 먹고 마시며 사는 인생은 언제나 그 배가 비어 있습니다. 언제나 텅 빈 그 마음의 배, 생활의 배에 앉아서 탄식하는 것이 우리 인생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빈 배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2. 빈 배 안에 예수님을 영접하라
우리가 빈배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빈 배 안에 예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베드로의 빈배에 예수님이 들어오셔서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신 것처럼 우리 인생의 빈 배 속에 예수님을 모셔야 합니다. 행복과 기쁨이 없는 빈 배 속에 예수님을 모셔야 됩니다. 사업에 실패한 빈 배 속에 예수님을 모셔야 합니다. 꿈을 잃어버린 빈배에 예수님을 모셔야 되고 사랑을 잃어버린 빈배에 예수님을 모셔야 하고 성공이 없는 빈배에 예수님을 모셔야 합니다. 건강이 없는 빈배에도 예수님을 모셔야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천지에 창조주가 되시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 16절에 보면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배 안에 들어오시면 배에는 없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무엇이든 창조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몸 찢고 피를 흘려서 값 주고 사신 우리에게 놀라운 하늘나라 축복으로 채우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용서와 의로 채우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천국과 성령으로 채우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기쁨과 치료로 채우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형통과 축복으로 채우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영생 복락과 부활과 천국으로 채우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요한삼서 1장 2절에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채우기를 원하시는 주님이신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3, 24절에도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은혜와 의로서 우리의 빈배를 채우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의 배 안에 영접하면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베드로가 그물 깁는 것도 집어치워 버리고 그물에 걸린 풀 뜯는 것도 그만 두고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심취한 것처럼 우리의 생애 속에 예수님을 모셨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만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 2절에서 3절에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물을 다스릴 권세를 가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어떻게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까? 오늘날 우리들은 성경 말씀을 읽음으로 예수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을 때 예수님의 영, 성령님이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려 주시고 마음에 깨닫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주일 예배에 와서 주의 종의 예배를 통해서 주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시시때때로 묵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되새기고 그 말씀을 생각하고 감사하는 묵상을 하고, 그 다음 우리 주님께 간절히 기도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늘 주님께 감사하고 찬송하고 기도드리며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주를 섬겨야 됩니다. 선지자 사무엘은 어릴 때 성전에서 주를 섬기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말라기 3장 16절에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늘 보고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명령을 기다려야 됩니다. 베드로는 자기 마음대로 배를 저어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 빈배에 예수님을 모시고 난 다음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예수님을 우리의 빈 배에 모시고 말씀을 읽고 말씀을 듣고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며 주님을 섬기고 주의 명령을 기다려야 합니다. 주님의 명령은 우리에게 직접 임하시기도 하고, 꿈으로 말씀하시기도 하고, 환상으로 보여주시기도 하고 혹은 성령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우리 마음 속에 깨달음을 주시기도 합니다. 또한 사람을 통해서 말씀하시기도 하고, 환경을 통해 길을 열어주시기도 하십니다. 여러 가지 부분과 여러 가지 모양으로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한대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하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항상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성령님께서는 기다리는 자에게 말씀하여 주십니다. 우리 교회는 여러 곳에 기도처가 있습니다. 왜 기도처를 만듭니까? 그것은 집 가까이에 기도처가 있으면 그곳에 가서 회개하고 통회하고 자복하고 말씀 읽고 말씀 듣고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기다리려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방적으로 주님께 아뢰는데 주님은 우리에게 성령으로 말씀하기를 원하십니다. 주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우리는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우리는 귀를 기울이며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가나의 혼인 찬지가 열렸을 때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예수님의 어머니에게 와서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가서 ‘이 집에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하고 종들에게는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우리는 그대로 하면 되는 것입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은 결례통에 물을 채우게 하고 그 물을 따라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성적으로 보았을 때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명령입니다. 물을 부어서 떠다주면 어떻게 됩니까? 포도주가 없는데 소용없는 일 아닙니까? 그러나 성경에서 종들은 그 말씀에 순종했고 물을 떠서 갔을 때 그 물이 포도주로 변화된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주를 기다리면 주님께서 반드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고 우리의 짐을 짊어져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시편 123편 1절로 2절에 “하늘에 계신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종의 눈이 그 상전의 손을, 여종의 눈이 그 주모의 손을 바람같이 우리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며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를 기다리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향해서 기다리면 오늘날 주님께서는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반드시 말씀해 주시고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3.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
우리가 할 일은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지라는 그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진다는 것은 베드로에게 새로운 일터를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언제나 얕은 물에서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주님께서 주와 함께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얕은 지식이나 수단과 방법으로 일해서 가지고 있는 것이 없다면 예수님을 내 안에 모셔야 합니다. 그때로부터 예수님은 여러분과 나를 데리고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삶의 새로운 터전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얕은 곳을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얕은 인간의 이성의 세계가 아닌 하나님의 세계, 신령한 세계, 깊은 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로마서 11장 33절에 보면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깊은 길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36편 6절에도 “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주의 판단은 큰 바다와 일반이라 여호와여 주는 사람과 짐승을 보호하시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시편 139편 6절에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간의 좁은 마음으로는 깨달을 수 없는 깊은 세계를 주님께서 이끌어 가는데 그 깊은 세계가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말씀이 깊은 세계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오 하나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말씀을 우리들이 읽고 듣고 묵상하면 깊은 곳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성령과 함께 들어가는 것이요, 예수님과 함께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 속에 들어가야 깊은 곳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또 믿음의 세계가 깊은 곳입니다. 믿음은 감각적인 환경을 뛰어 넘어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을 읽고 성령의 가르침대로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만이 깊은 세계로 들어가는 통로인 것입니다.
마가복음 11장 22절로 24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를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세계는 바로 깊은 곳에 들어가는 세계인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말씀을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서 성령님이 말씀하시면 그것을 그대로 믿는 것입니다. 끝까지 믿는 것입니다. 환경에 좌우되지 말고 느낌에 흔들리지 말고 마음 중심에서 말씀을 믿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깊은 곳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불가능에 도전하는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용기로 인해 깊은 곳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겁이 많은 사람은 주님이 아무리 말씀해도 못 따라갑니다. ‘성수 주일 하시오’어떻게 상점을 닫고 성수 주일 합니까? 겁이 나서 깊은 곳으로 못 들어옵니다. ‘십일조를 드리십시오’ 내 수입이 적은데 여기에 십일조까지 떼면 나는 어떻게 살아가나 겁이 나서 깊은 곳에 못 들어갑니다. 오늘날 우리가 깊은 곳에 들어가려면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언제나 얕은 곳에서 찰싹찰싹 살다가 깊은 곳으로 들어가려니까 마음에 겁이 나서 벌벌 떨고 못 들어가는 사람이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깊은 곳으로 들어가면 주님이 함께 들어가 주신다는 것입니다. 혼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주의 손길이 우리와 같이 하셔서 깊은 곳에 함께 따라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깊은 곳에서는 하나님이 함께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기적이 일어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과 함께 깊은 곳에 들어가서 그물을 던졌을 때 고기가 많이 잡히지 않았습니까? 깊은 곳에는 하나님이 함께 역사하고 하나님이 함께 일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깊은 곳에 들어가기를 거부했습니다. 가데스 바네아에 왔을 때 하나님은 그들이 믿음으로 들어가기를 원했습니다. 말씀을 따라 믿음을 가지고 들어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높은 성벽을 보고 거기에 있는 네피림의 후손 아모리 족속의 대장부를 보고 겁이 났습니다. 가나안 접경에 들어와서 가나안 정탐을 보내고 그들의 믿음 없는 보고에 휘말려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탓한 것입니다. 그들은 깊은 데로 들어갈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거부에 하나님께서는 광야로 내어 보내시고 그곳에서 1세대들이 죽을 때까지 회진시킨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깊은 곳에 담대히 들어갈 용기를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신명기 1장 21절로 22절에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 앞에 두셨은즉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신대로 올라가서 얻으라 두려워 말라 주저하지 말라 한즉 너희가 다 내 앞으로 나아와 말하기를 우리가 사람을 우리 앞서 보내어 우리를 위하여 그 땅을 정탐하고 어느 길로 올라가야 할 것과 어느 성읍으로 들어가야 할 것을 우리에게 회보케 하자 하기에”라고 했으며 신명기 1장 32절로 33절에 “이 일에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너희 앞서 행하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의 행할 길을 지시하신 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깊은 곳에 가면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십니다. 말씀을 따라가면 하나님이 동행하십니다. 믿음을 가지고 가면 하나님이 동행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용기를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다윗이 어떻게 위대한 임금이 될 수 있었습니까?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골리앗을 향해서 용감하게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두려움을 이기고 용감하게 나가서 골리앗과 싸워 이겼기 때문에 그는 위대한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강하고 담대하게 현실을 보고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믿음으로 담대하게 깊은 곳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얕은 세계에서는 빈 배를 채울 수 없습니다. 인간의 노력으로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모시고 깊은 곳으로 가면 하나님의 기적으로 빈 배를 채울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빈배의 슬픔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일생을 살면서 애쓰고 힘을 쓰지만 채울 수가 없습니다. 그 마음 속에 기쁨도 행복도 채우지 못합니다. 성공으로도 채우지 못하고 건강으로도 채우지 못하고 축복으로도 채우지 못하고 부요로도 채우지 못합니다.
빈배를 채우려고 탄식하고 고통 당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의 빈배를 채워주실 분은 우리 주 예수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 뿐이요 인자가 오는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되 더 풍성히 얻게 하려함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빈배를 채우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빈배를 채우기 전에 먼저 주님으로 채움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들 배 안에 들어오셔야 합니다. 우리들 인생의 배 안에 예수님이 들어오셔서 우리 인생의 삶의 방향을 바꾸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예수님을 섬기는 것을 중심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예수님을 중심으로 삼고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예수님을 섬기고 그 말씀을 묵상하고 예수님을 기다리면 예수님은 우리들과 인생 동업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멀리 계신 하나님이 아닙니다. ‘세상 끝날까지 내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말은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영, 성령님께서 우리와 같이 계셔서 주를 기대하고 기다리는 자에게 언제나 말씀하십니다. 깊은 곳에 들어가자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새로운 일터를 우리들에게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기다리십시오. 주님이 반드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옛날의 일터가 아닙니다. 새로운 일터인 것입니다. 깊은 곳의 일터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준 일터, 믿음을 가지고 들어가는 일터,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서 들어가는 일터, 용감하고 담대하게 들어가는 일터를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 새로운 일터는 우리들 혼자의 작업장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는 기적적인 일터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적으로 베드로와 같이 그물을 던져 찢어지도록 얻게 되며 자기의 배에도 채우고 남의 배도 채우게 되고 하나님의 살아 계신 영광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와 같은 놀라운 승리의 영광이 우리들 생애 속에 일어나야만 하는 것입니다. 병든 장모와 밥 달라는 처자식을 두고 빈 손 들고 빈배만 가지고 슬픔과 고통으로 탄식하는 그런 삶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삶을 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그런 삶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들 배에도 채우고 다른 사람의 배에도 채워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빈배에 그 무엇보다도 예수님으로 가득 채워 넣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관심을 물고기에 두지 말고 예수님께 두어야 합니다. 주님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 나라를 먼저 구하고 그 의를 먼저 구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주님께서 우리들과 인생 동업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 속에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옛날의 슬픔을 꿈에 본 듯 잊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기쁨과 소망과 사랑으로 넘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남에게 꾸어줄지라도 꾸지 않는 사람이 됩니다.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조용기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