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길가는 중에… (막 10:46-52)

첨부 1


차를 타고 가다보면 차를 타고 간다는 생각외에 나는 어디론가 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디론가에 가서 쉬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어디론가 가고 있고 쉼터를 찾으면 거기에서 숨을 돌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왠지 모르게 바쁜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는 어디론가 가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오늘 읽은 마가복음말씀에 소경거지 바디메오는 여리고에서 길을 가던 중에 예수님을 만나 치료받고 따릅니다.
이 이야기는 마가복음에서 마지막으로 나오는 치료의 이야기입니다. 이후에는 마가복음에서 치료받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바디메오의 이야기는 야이로의 딸을 치료하시고 열두해를 혈루증으로 앓았던 여인을 치료하시는 이야기에 비한다면 그리 극적이거나 거창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는 '주님을 따르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중요한 진리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길가는 중에'라는 단어입니다.
이 표현은 각각 32절과 52절에 나옵니다. 32절을 읽어볼까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그리고 52절 마지막에

...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이 두 말은 다르게 번역되었지만 같은 말입니다. 물론 물리적으로'길위에서 좇았다'라고 이해될 수 있지만 사실은 마가복음을 언어적으로 분석하다보면 이것이 단순히 물리적으로 끝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길에서'라는 말은 '길가는 중에'나 '계속 가다가'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32절과 52절은 '가는 중에'라는 말이 앞과 끝을 장식합니다. 이것은 '길가는 중에'라는 말이 기본의미가 되고 이 두가지가 같은 뜻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인생의 길을 막 출발하면서 예수님을 따르고 또 어떤 사람은 인생의 종착점에 도착해서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러나 오늘 바디메오는 길가던 중에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늘 많은 사람이 몰려 있었습니다. 그중 일부는 예수님이 태어나신 나사렛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랐고 갈릴리에서부터, 또 예루살렘에 가서야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바디메오는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예수님을 만나서 따라가게 됩니다.

나사렛은 예수님께서 30여년 동안 사신 동네이지만 가난하고 비천한 보잘것 없는 동네입니다.';나사렛에서 무슨 선한것이 나오겠으며 무슨 귀한 사람이 나오겠느냐'할 정도였습니다. 여기에서 만난 예수님은 가난한 신분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사렛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적었습니다.
갈릴리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기적과 이적을 베푸신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갈릴리에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제자들의 대부분이 갈릴리 사람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께서 고난받고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동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초대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살아계셨을 때에는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좇은 사람은 적었습니다.
바디메오는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예수님을 만났고 거기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52절에 이런 바디메오를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디메오는 우리에게 '믿음이 무엇인가'에 관한 중요한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했을 때에 바디메오의 믿음이 무엇일까? 바디메오의 어떤 모습을 보고 하신 말씀일까? 하는 것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왕이신 예수'로 고백

먼저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는 것은 믿음과 치료에 관계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해 동안 혈루병을 앓은 여인을 보고 '네 믿음이 너를 구하였다 딸아 평안히 가라'고 하였고 2장 5절에 중풍병자에게 예수님께서 그 믿음을 보시고 '네 죄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것을 비교해 볼 때에 바디메오의 믿음이 다른 것을 알수 있습니다.
첫째는 46절에 보니까 바디메오는 길 가에 앉았다가 나사렛예수가 지나간다는 말을 듣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47절에 사람들은 '나사렛예수'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바디메오는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나사렛은 못사는 동네였고 보잘것 없는 동네였기 때문에 나사렛 예수라는 말은 그렇게 반가운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바디메오는 그 말을 그대로 따라 하지않고 '다윗의 자손 예수' 즉'왕이여'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에서 바디메오의 믿음을 볼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부르든지, 소문이 어떠하든지 또는 다른 사람이 어떻게 말을 전해 주었던지 간에 내가 알고 믿고 있는 것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소서

두번째는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물론 바디메오는 소경이었고 거지였습니다. 여리고 성에 불쌍하게 여겨지는 사람이 거지인 바디메오뿐이었겠습니까? 그러나 바디메오는 예수님 앞에서 '왕이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사실 이 말은 자존심이 상하는 말일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불쌍한 사람이나 가련한 사람이라고 인정해 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신분을 사실 그대로 인정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불쌍하고 가련한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나는 불쌍하지 않고 괜찮은 사람입니다. 나는 그런대로 혼자 견딜 수 있으니까 나를 불쌍히 여기지 않아도 됩니다. 나혼자 해결할 수 있습니다. 간섭하지 마십시오. 나는 나의 길이 있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사실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요, 신념입니다. 그것을 믿음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여기에서 바디메오는 자기의 있는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예수님께'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했습니다. 사실 믿음의 출발은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디메오의 믿음이었습니다.

48절을 보니까 많은 사람들이 꾸짖어'잠잠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바디메오는 점점 더 큰 소리로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소리질렀습니다. 여기에서 바디메오의 믿음의 위대함을 볼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번 결단하는 것은 쉽습니다. 마음 먹을 수 있읍니다. 그럴때 사람들이 '당신 주제에 왜 그래, 주제파악이나 하지'라고 하면 우리는 금새 좌절합니다. 뭔가 잘해보려고 했었지만 한마디 말에 절망하곤 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여기 바디메오에게 사람들은 '당신 소경인 주제에, 거지인 주제에 어떻게 예수님에게 소리를 지르느냐'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여기에서 꾸짖고 잠잠하라고 말한 사람들이 누구였을것 같습니까? 바로 제자들이었습니다. 아마도 제자들 중에 베드로나 야고보, 아니면 요한이었을 것입니다. 바로 앞부분에서 길가는 중에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 주의 나라가 회복되면 나를 기억하소서 나를 영의정이나 좌의정을 삼아주십시오'하고 구하고 있습니다. 눈을 뜨고 있지만 그들은 진실을 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이 소경에게 '잠잠해, 조용해'라고 말합니다.
만일 거지나 같은 소경인 동료들이 '바디메오, 니가 뭔데 그러느냐'고 했다면 그래도 한번 해보겠다고 오기를 가질수 있었겠지만 제자들이 조용히 하라고 했기 때문에 더욱 실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도 교회에서 무엇인가 하려고 했는데 장로님이나 목사님이 만류하면 99.9%는 좌절하게 됩니다. 뭔가 잘하려고 할때 누군가 옆에서 뭐라고 하면 우리는 더욱 실망합니다.
그런데 바디메오는 어떻게 합니까? 48절을 읽어볼까요?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그는 더욱 크고 끈질기게 외칩니다. 믿음은 용수철에 비유될수 있습니다. 고난이 있을수록 더욱 강해집니다. 영어에서도 믿음을 'Faithful'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변함없다. 신실하다. 처음부터 끝가지 변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미쁘시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동일하시고 믿음직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디메오는 어려움이 있을수록 더욱 크게, 더욱 심하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믿음이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에게 어려움이 온다고 좌절하기 보다 역경이나 다른 사람의 비판이 있을수록 더 일어섭시다. 더 크게 소리지릅시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 됩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돌아서서 바라보았습니다. 바디메오가 처음 소리질렀을 때 예수님께서 못들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디메오가 한번 더 부르기를 기다리고 계신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한 소경에게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실 때에도 한 번에 고쳐줄수 있는 것도 두 번, 세 번에 걸쳐 고쳐셨습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두번째, 세번째 예수님을 부르도록 기다리고 계신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두번 세번 예수님을 끊임없이 부르시기 바랍니다. 좌절하지 말고 예수님이 머물러 서 계시도록 부르시기 바랍니다.
49절을 보면 '부르다'는 단어가 3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하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 어떤 단어나 표현이 반복되면 중요한 것인데 여기에서 부른다는 것은 치료받고 구원받고 부름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끊임없이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는 부름을 받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집이나, 시장이나, 산에서도 부르고 계시는데 이 본문에서는 길가는 중에 부르십니다.

예수님은 일꾼을 찾아서 어디서든지 부릅니다. 길가는 중에 부르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앉아계실때는 가르치셨고 길을 가실때는 부르셨습니다. 세리 마태도 길가던 중에 불렀습니다. 예수님은 다니시면서 사람들을 부르셨는데 우리에게도 그 부르심이 있을 때 응답할 수 있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32절과 52절에 '길가는 중에'란 말은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신 것과 같이 우리도 길가던 중에 예수님을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올라가는 길에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종점에 도착해서 다른 차를 갈아타려고 합니다. 절망을 경험한 다음에 예수님을 만나려고 합니다. 할 수 있는 것을 다해보고 더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때에야 예수님을 만나려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내가 완전히 준비한 후 예수님을 따라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중에 누가 완전히 준비할 수 있습니까?
사실 우리는 바디메오와 비슷한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길가는 중에, 성숙하는 도중에 예수님을 만나고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완성된 다음에 예수님에게 쓰임받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모두 미완성 중에 예수님에게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미완성입니다.

미국 LA북부에 'Church on the way(처치 온 더 웨이)'라는 교회가 있습니다.'길가는 교회'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그 교회 목사님에게 왜 이름을 이렇게 지었느냐고 물었더니 '우리교회는 끊임없이 변하고 우리는 아직도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도착하지 않고 뭔가 이루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도 길가는 도중에 뭔가 하기를 원합니다. 사실 우리 모두다 어디론가 가고 있습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갑니다. 그러나 길가는 중에 예수님을 만나기 원합니다. 안타깝게 종점에 인생의 종착역에서 만나지 마십시오. 성경에도 가장 마지막에 가서 예수님을 만난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사람입니다.
바디메오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 많습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를 방해하고 저지하더라도 그때마다 더 크게 소리지릅시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때 예수님께서 우리를 돌아보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옷을 벗고 뛰면서 길가는 중에 예수님을 따라 가십시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