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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능력의 예수님, 관습의 사람들 (요 05: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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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의 예수님, 관습의 사람들 (요한복음 5:1-18)
 
유대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명절이 3가지 있습니다. 유월절, 오순절, 수장절입니다. 유월절은 출애굽한 날이고, 오순절은 출애굽한 유대민족이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날입니다. 시기적으로는 맥추절이라고 해서 첫 수확을 할 때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장절이라는 초막절은 추수를 끝내고나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또 다른 은혜를 기대하며 드리는 절기입니다. 이런 명절이 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심지어 해외에 흩어져 있는 디아스포라까지 모두 예루살렘에 모입니다.
예루살렘은 5만에서 10만명 정도가 살 수있는 작은 도시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2천년 전에는 수십만명이 모여서 지켰던 명절이 유월절입니다. 로마의 식민지로 살아야 했던 당시의 이스라엘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다시 한번 해방과 자유의 소원을 이루어주실 것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모였습니다. 로마 당국이 비상경계령을 내릴 만큼 그들의 명절은 열기로 가득했습니다.

병자들을 찾아가신 예수님

그때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의 대부분을 갈릴리를 중심으로 사역하셨습니다. 예루살렘과 유대지방에는 특별한 목적으로 때때로 방문하셨을 뿐입니다.
요한복음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첫번째로 예루살렘의 성전을 방문하셨을 때 먼저 하신 일은 성전을 정화시키고 깨끗케 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집,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 하나님 앞에서 참된 예배가 드려져야 할 성전이 매매하고 장사하는 강도의 굴혈이 되어버린 것을 예수님께서 정화하셨습니다. 교회와 성전의 원래의 기능을 회복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두번째 공식적인 예루살렘 방문 시에 예수님께서는 유력자를 만나시거나 성전의 중심부에서 활동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두번째로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는 가난하고 병든자를 찾아가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요한복음 1∼5절을 보십시오.

그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거기 삼십팔 년 된 병자가 있더라

많은 사람들이 왁자지껄하게 즐기고 떠드는 명절에 오히려 더욱더 외로운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찾아갈 곳이 없고 가족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특별히 몸이 아파서 누워있어야 하는 심정은 당해본 사람만 압니다. 더구나 정성껏 돌봐주고 치료해주는 사람이 없는 사람은 더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양문 곁 베데스다 못 주변에 행각 다섯이 있었고, 그런 병자들이 그곳에 모여 있었습니다. ‘베데스다’는 히브리 말로 ‘긍휼의 집, 자비의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많은 문들이 있었는데 그 문들마다 사용 목적이 달랐습니다. 베데스다 못이 있는 양문은 양들이 드나드는 문입니다. 평소에 예루살렘성 안으로는 양들이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단지 제사할 때만 양들이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양을 이끌고 양문으로 들어올 때 제일 먼저 만나는 사람들이 이 병자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제사를 드리러 가는 길에 제일 먼저 만나는 이들에게 적선을 하기도 하고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사실, 평소에는 이들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제사 때나 명절 때 하나님 앞에 속죄하러 가는 길이기 때문에 불쌍한 사람들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도왔을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자신을 위해서 도움을 베푼 것입니다.
우리가 남을 도울 때 정말 순수하게 아무런 보상 없이 돕기는 쉽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순수하게 시작했다가 변질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서 돕는 것만이 참된 도움입니다.
병자들은 남의 도움으로만 살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자기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조차도 그들은 소외된 사람들이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부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병자들, 다리를 저는 사람들, 혈기 마른 사람들은 율법에 의하면 예배에서 소외되었습니다.
이들이 더욱더 절망적인 까닭은 헛된 데에 소망을 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기대할 수 있었던 것은 가끔 물이 동하는 것이었습니다. 어쨌든 그들은 베데스다 물이 동하는 것은 천사가 내려오기 때문이라고 믿었고 그때 누구든지 제일 먼저 물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이든지 나음을 입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우리를 치유하시는 하나님 손길

허망한 소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에 모든 것을 걸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철저하게 소외된 사람들이 이렇게 모여있었던 이유는 그 무엇보다도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아픔을 보듬고 껴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특별한 희망을 가졌다기 보다는 서로 모여서 그들끼리라도 아픔을 나누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 베데스다 못이 동할 때 먼저 들어가야만 한다는 것은 잔인한 이야기 입니다. 물이 동할 때 먼저 들어가는 오직 한 사람만 나을뿐입니다. 가장 중병인 사람이 먼저 들어가는 것이 합당한 일이겠지만 비교적 건강해서 힘이 있는 사람만이 먼저 들어갈 기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요행마저도 기대할 수 없어서 그저 누워만 있었고 이런 사람들을 예수님은 찾아가셨습니다.

38년 동안 자리에 누워있는 사람의 예는 드뭅니다. 어쩌면 이사람에게는 삶이 죽음보다 고통스러웠을지도 모릅니다. 그 오랜 시간의 병 때문에 가족과 친구들마저도 모두 떠났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낫기 원하는지를 묻자 아무도 자신을 도울 이가 곁에 없다는 대답을 합니다. 성경을 보면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온 4명의 친구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 주변에 사람들이 너무 많아 지붕을 뚫어서라도 고침을 받게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경우는 가족도 친구도 모두 떠났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예수님께서 그가 누운 것을 보셨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냥 지나가다가 힐끔 보신 것이 아니라 주목하고 관심을 가지고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병이 오래된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의 사정을 다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외롭고 답답해서 자신의 심정은 아무도 모르고 하나님께 조차도 숨겨졌고, 사람들이 자신을 버릴 때 하나님도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족들조차 외면할 지라도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누구나 차별없이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의 마음과 관심은 건강하고 형통한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병들고 낙심하고 버림받은 자에게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주님의 관심과 사랑이 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여러분의 깊은 마음의 비밀들과 고독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 주님은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사람들을 찾아서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병자에게 찾아가서 낫기를 원하느냐고 묻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질문입니다. 38년동안 앓아온 병자에게 병이 낫는 것외에 무슨 소원이 있겠습니까? 어쩌면 그는 단 하루만이라도 건강한 몸으로 살기를 소원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떻게 생각하면 ‘왜 이런 질문을 하나?’라고 생각될 정도로 당연한 질문을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육신의 병이 오래되면 정신까지도 병들기 쉽습니다. 사람의 성격도 변합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지 않으면 더욱더 그러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만이 고난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고난을 통해서 연단을 받아 강해지고 더 좋아지는 것은 오직 하나님을 통해서만이 가능합니다.
38년 동안 아프면 아픈 것이 정상처럼 여겨집니다. 건강한 기억조차도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는 병든 것을 저주받은 운명으로 안고 살아갔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포기하고 절망하고 있는 그가 응당 가져야 하는 소원을 묻습니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우리가절망하고 포기하는 그 자리에 주님은 오셔서 질문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들었을 때 병자가 “네, 낫기를 원합니다”라고 간단하고 분명하게 대답하면 될텐데 그렇게 하지를 않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 이 한마디를 대답하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몸과 함께 정신도 병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었습니다. 자기에게 그렇게 좋은 일이 일어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낫기 원하지만 불가능합니다. 아무도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자기 탓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오랜 세월 동안 깊은 병과 함께 마음도 병들어서 사람에 대한 원망과 저주가 생깁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절망적인 상황이 되었을 때 아무도 나를 환영하지 않고 나를 원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것은 거짓입니다. 그것은 사단의 속임수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또한 여러분을 사랑하고 중보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이 병자는 너무나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놀라운 은혜를 주셨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예수님은 그의 마음 속에 깊은 절망을 아시고 “일어나라,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라고 하십니다. 이상한 처방으로 보이지 않습니까? 이 사람이 걸어갈 수 있었다면 연못에라도 들어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사람이 돕지 않아도 일어설 수 있다고 하십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는 자리를 보존하지 말고 그 자리에 눕지 말라고 하십니다.

절망이 없는 하나님의 품

여러분,
오래된 고통 때문에 포기하고 있는 문제가 있습니까? 여러분을 묶고 있는 문제, 미움과 거절감과 상한 마음 때문에 평생 묶여 있는 분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여러분의 삶가운데 남아 있는 문제는 없습니까? ‘이 문제는 기도해도 않돼. 믿음가지고도 안돼’라고 포기하는 부분이 있다면 이 시간 주님께서 “일어나라”라고 말씀 하십니다. 주님은 해결하실 수 있으십니다. 모두가 포기하고 절망하고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죽은지 나흘이나 지난 나사로도 살리신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정말로 달라지고 치유되고 회복되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으실 때 일어나십시오. 나의 힘으로는 할 수 없고, 사람은 나를 도울 수 없지만 하나님은 도우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잊으신 적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오늘도 치료하시고 회복시키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만이 우리를 회복시킬 수 있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날은 안식일이니

38년 된 병이 한 순간에 고침을 받았습니다. 주님의 능력은 점진적인 과정을 거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날이 하필이면 안식일이었습니다. “네 자리를 들어라”라는 말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사람의 병이 나았다는 점보다는 자리를 들고 가라고 한 점에 더 관심을 갖습니다.
10∼16절을 보십시오.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한대 저희가 묻되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가 누구신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그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38년 동안 누워있던 이 사람이 일어나고 고침을 받고 자유함을 누리게 된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그가 들고간 자리만 문제를 삼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핍박하게 됩니다. 심지어 이 문제로 인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제일 잘 섬긴다는 사람들이였습니다. 그들은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방법이라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건강한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치유받고 생명을 얻은 이들은 보지않고 그들의 규례와 규칙에만 집착하고 매여있던 생명없고 사랑없는 그 당시 형식적인 종교의 모습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범죄한 후에 4백년 동안 하나님은 침묵하신 징계의 시기였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더 근신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생명을 주시고 사랑을 실천하셨는데 이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핍박하고 죽이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올바른 신앙생활을 해야합니다. 예수님을 똑바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지금도 일하시는 하나님

십계명은 제1계명부터 3계명까지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관해서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문제입니다. 5계명부터 10계명 까지는 사람과의 관계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제3계명과 나머지 사람들과의 관계를 규정하는 계명이 안식일에 관한 계명입니다. 하늘과 땅이 만나는 날이 안식일입니다.
유대인은 2천년동안 디아스포라로 전세계를 헤메면서 혼혈이 이루어졌기에 혈통으로는 아무도 유대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할례를 행하고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준수하는 사람들을 유대인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안식일은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잘못된 열심으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들은 진리를 떠나서 잘못된 열심과 이해로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예수님은 일부러 안식일에 이런 일을 행하셨습니다. 안식일을 피해서 이런 일을 행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38년이나 된 병자였습니다. 하루즈음 그대로 놓아둔다고 해도 문제될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전도 아니고 그 후도 아닌 안식일에 의도적으로 이런 일을 행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알게 하시려는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 안식일은 천지를 창조하실 때 주셨습니다. 그때는 창조의 축복을 누리도록 주신 것입니다. 안식일은 창조의 축복을 누리면서 빈둥빈둥 노는 날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을 행하는 날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예수게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하나님의 안식이 왜 깨졌습니까? 왜 예수님께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섬기시고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까지 지셔야 했습니까? 하나님의 안식이 깨진 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불손종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죄로 인해 깨진 안식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안식은 예수님안에 있습니다. 아무 것도 안하고 쉬는 것이 참된 쉼이 아닙니다. 참된 쉼은 주님 안에만 있습니다. 그래서 주일날 우리가 이렇게 모인 것입니다.
주님은 사람들을 살리고 생명주시기 위해서 안식일에도 일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오늘도 병들고 절망하고 낙심하고 버림받은 자, 주님의 사랑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를 찾아서 쉬지 않고 일하십니다. 세상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기 까지 쉬지 않으시는 주님, 우리는 쉬더라도 주님은 쉬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주님께서 하신 그 일은 하나님 아버지의 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주님께서 행하신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영생을 얻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베데스다 못가에서 예수님은 오직 한 사람만 고치십니다. 38년된 병자를 일으키셔서 주님의 일을 전하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게해서 영생을 얻게 하는 것이 이 표적의 목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흑암가운데서 부르셨습니다. 세상에서 상처받은 우리들을 부르시고 세우시고 회복시키셨습니다. 그리고 가서 절망과 흑암과 어두움과 죽음 가운데 있는 자들 가운데서 주님과 함께 일하자고 부르십니다. 주님은 우리안에서 일하셔서 우리의 손과 발과 심장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다시 일으키기 원하십니다. 그것이 어떤 자리라 할 지라도 우리를 일으키시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이 우리를 능히 일으키실 것을 믿습니다.
일어나 빛을 발하십시오. 우리가 일어나서 죄와 사망의 굴레에 매인 그들을 찾아갈 때 주님은 우리 가운데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의 손과 발을 통해서 일으키기를 원하십니다.
일어나십시오. 그리고 빛을 발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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