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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실로암의 환희 (요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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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문제는 복잡하고 어렵습니다. 특히 어려움이 닥치면 두렵고 어찌할 바를 몰라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어려움의 이유를 모른다면 그 고통은 더해집니다. 사람은 이성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어려움에 부딪혔을 때 어떤 이론이든 만들어서 스스로를 납득시키려고 합니다.
고난에 부딪힐 때 보편적으로 종교적인 측면에서 원인을 찾습니다. 즉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이 철학화 되고 종교화 된 대표적인 것이 불교입니다. 불교에서는 전생의 업보로 인해 현생에서 고통을 겪는다고 합니다.

죄책감과 원망 끝에 오는 운명론

보통 사람들은 어려움을 당하면 일단 원망부터 합니다. 그리고 원망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하나님을 탓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 이런 부모를 주셨습니까? 왜 이런 나라에 태어나게 하셨습니까?”라고 원망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고통의 원인을 죄와 남의 탓으로 돌려도 상황이 변하지 않고 아무 것도 바뀌어 지지 않으면 결국은 운명을 한탄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9장 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

날 때부터 소경이었으니 얼마나 불편하고 어려운 삶을 살았겠습니까.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은 태어나면서 한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시각적 이미지를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캄캄한 어둠속에서 평생을 보내야 하니 무척이나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그들의 질문의 핵심인 ‘누구 탓이냐’라고 묻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탓을 하게 되는 셈입니다. 그런데 이 상황을 보시는 예수님의 답변은 누구의 탓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예수님의 대답은 차원이 달랐습니다. 제자들은 사람속에서 원인을 찾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차원과 눈 높이로 대답하셨습니다.
티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만일 죄 때문에 불행한 일들이 일어난다면 어느 누구도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자신의 상황을 죄 때문이라고 인정한다면 그때부터는 분노가 치밀어 오르게 됩니다. 예수도 믿지 않고 죄를 밥먹듯이 저지르는 사람이 아무런 고통도 없고 잘 사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마치 하나님은 특별하게 나만 미워하시고 징계하시는 듯이 느껴집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이 소경된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타내시고자 하는 일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도 그 사건을 통해서 영광을 나타내실 수 있고 삶을 변화시키실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뜻하시고, 계획하신 일을 행하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뜻이나 사람의 부탁 때문에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일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을 보시는 관점과 태도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고난당하고 불행한 일을 당하는 사람들, 이유를 알지 못하는 깊은 고난 가운데 빠져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셔서 그들을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도 불행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이사야 61장 1∼3절은 메시야의 사명 선언문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나사렛 회당에서 이 말씀으로 자신이 하실 일을 선언하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 19).

하나님이 나타내고자 하시는 일은 우리를 살리고 구원하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 9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셨습니다.
요나서에서 니느웨 성에 대한 이야기를 봅니다. 하나님은 가장 잔인하고 음란했던 앗수르의 도성을 요나를 통해서 회개하게 하시고 구원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들을 불로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그들의 죄로 인해 바벨론에게 멸망당하고 포로로 끌려가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29장 11절을 보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마음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을 판단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이 아십니다.
우리가 생명의 길을 떠나서 멸망의 길로 갈 때 하나님은 우리를 치시고 징계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근심하며 고생할 때 하나님도 마음 아파하시고 징계의 과정에서도 우리를 도우십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심은 세상을 심판하기 위함이 아니라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통해서 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예수님은 사람을 살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고 그분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 사람의 삶마저도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다면 주님 손에 붙들린 어떤 인생도 불행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겪든지, 어떤 일을 만나든지 모든 것이 주 안에서 협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기 때문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사람을 실족케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 빛을 보는 자마다 생명을 얻고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해서 세상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도 제일 먼저 하신 일이 빛을 주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세상은 공허하고 깊은 혼동과 어둠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어둠을 향해 하나님이 처음으로 하신 말씀이 “빛이 있으라”입니다. 빛을 주신 것은 생명을 주신 것이었습니다. 빛을 주신 것은 우리에게 축복을 주신 것이었습니다.
어둠에 있던 이 소경을 빛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그를 고치십니다.
6, 7절을 보십시오.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예수님은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고치시며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신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소경을 고치는 치유 방법이 독특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치유하실 때 다양한 방법을 쓰셨습니다. 안수를 하시기도 하고, 말씀으로만 치유하시기도 합니다. 베데스다 못가에서의 38년된 중풍병자를 치유하실 때는 손가락 하나 대지 않으셨습니다. 이 소경에게도 눈을 뜨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데 그런 말은 한마디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상한 행동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침으로 진흙을 이겨서 그의 눈에 바르고 나서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행동들은 창조의 행위였습니다. 이 사람은 태어나서 한 번도 눈을 떠본 일이 없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눈이 없다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빚어서 창조하신 것처럼 진흙으로 다시 이 사람의 눈을 만드신 ‘창조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은 초막절에 있었던 일입니다. 이스라엘의 기후는 건기와 우기가 분명합니다. 11월 부터 3월까지가 우기이며 이때는 농사를 짓습니다. 4월부터 10월까지는 건기로 비가 한방울도 오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인들은 이런 건기에 집중적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특별히 초막절은 물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이런 때였기에 예수님께서 초막절에 비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요 7:37, 38)라는 말씀의 의미는 더욱더 생생하게 전달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절기인 까닭으로 초막절에는 실로암 못에 많은 사람들이 모입니다. 그들은 이곳의 물을 떠다가 제단에 뿌립니다. 제단을 정결케 해서 하나님께서 단비를 주실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사람들 마음속에는 실로암 물이 자신을 깨끗케 한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내면까지 치유하시는 하나님

소경은 보지 못하는 아픔과 함게 죄책감에 시달려왔을 것입니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몰라도 유대인들은 소경으로 사는 것은 죄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는 것은 정결케되고 새롭게 되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실로암에 가서 눈을 씻어 눈을 뜰뿐만 아니라 그의 죄책감을 씻겨주시고자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9장 3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자신이 장님이며 영적인 소경이라는 것을 알고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면 누구든지 눈을 뜰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자신이 보고 있으며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빛되신 예수님께 나아가지 않는 점입니다. 자신이 스스로 본다고 생각하니까 빛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빛을 찾아가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사람들은 소경이 됩니다.
자신들이 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이 바리새인들이 무지하고 분별력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빛이신 주님이 곁에 계신데도 전혀 깨닫지 못하는 영적인 소경들이며 자신들이 소경인지도 모르는 소경입니다.
요한복음 9장 1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예수님은 일부러 안식일에 이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이미 태어날 때부터 눈이 먼 사람이 하루즈음 더 소경 상태로 있다고 해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안식일에 치유를 행하십니다.
소경이 눈뜨게 되는 일은 오직 메시야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안식일에 이 일을 행하셨다는 사실 때문에 진실을 보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진흙을 이겨서 눈에 바른 것은 안식일을 범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집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바리새인 중에 혹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 하며 혹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피차 쟁론이 되었더니

소경이 눈을 뜬 일은 너무나 기쁜 일입니다. 그리고 그 눈을 뜨게 한 예수님은 얼마나 굉장하십니까! 그러나 이들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을 보니 다른 것은 볼 필요도 없다고 여기고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가 아니라고 단정짓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면 사탄으로부터 온 자라는 소리입니다. 그래도 상식이 있는 사람은 그 소리에 반대를 하고, 그들끼리 서로 논쟁합니다.
이웃의 많은 사람들이 그가 소경으로 구걸을 하며 살아갔던 사람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믿지 못합니다.
요한복음 9장 24절을 보십시오.

이에 저희가 소경되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바리새인들은 시기심과 교만과 편견과 지위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결론을 내리고 그 결론은 그들의 눈을 완전히 가리고 맙니다.
진짜 소경은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가 보지 못하던 일을 보게 됩니다. 예전에 상상도 하지 못하던 믿음의 세계를 보게 됩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고 보이지 않는 것이 영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보이지 않는 진리의 세계,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정말 불쌍한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입니다. 빛을 보고도 어둠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불쌍한 영혼들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이 불쌍한 영혼들입니다. 우리가 연약하고 약하지만 그것을 통해 예수님을 믿었다면 우리는 절대로 불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자신이 강하고 잘났고 건강하고 형통하기 때문에 자신을 믿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실상은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35∼3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저희가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가라사대 네가 인자를 믿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가로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예수님은 단순히 소경의 육체적인 눈을 뜨게 하시는 것만이 목적이 아닙니다. 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큰 목적이 있었습니다. 영적인 눈을 뜨게 해서 하나님을 믿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소경의 눈을 띄우는 일을 통해서 우리의 영적인 눈도 뜨게 하셔서 세상의 빛되시고 생명되신 예수님을 보게 하십니다.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님은 만일 우리 눈이나 손과 발이 범죄하면 그 신체의 일부를 끊어버리고서라도 천국에 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잘 살았다 하더라도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우리는 지옥에 갈 뿐입니다. 이 소경에게 있어서 육체의 눈을 뜬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믿음에 눈을 뜨고 참된 신앙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9장 11절을 보십시오.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처음에 그는 단지 예수님을 유대인 남자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에 대한 그의 인식의 변화가 바로 우리의 변화이기도 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이에 소경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한대

바리새인들의 심문에 부딪힌 그의 믿음은 오히려 한층 깊어집니다. 그는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묻기 전에 “세상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라고 묻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선지자라고 그분을 받아들이는 것 가지고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선지자라고 하는 것은 스승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과 무슬림들도 예수님이 선지자라는 것을 알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것 가지고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소경은 반대에 부딪히고 어둠에 몰릴수록 빛 되신 주님이 더욱더 분명해 지기 시작합니다.
33절을 보십시오.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이 믿음은 니고데모의 수준입니다. 평생 경건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한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찾아와서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이 아니라면 이런 일을 도저히 행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소경은 율법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는 데도 믿음이 이렇게 자랍니다.
니고데모의 고백에 예수님은 그가 구원을 이루었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에게 거듭나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거듭나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단순한 선지자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으로 여기면서 흠모하고 존경한다고 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소경이었던 자는 반대에 심하게 부딪힐수록 믿음이 더 깊어집니다. 그래서 결국 이 고백 때문에 출교를 당하고 맙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를 만나주십니다. 예수님은 그를 찾아가서 자신이 바로 메시야라고 말씀하십니다.
38절을 보십시오.

가로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그때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선생으로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경은 예수님을 만날수록 그 믿음이 깊어져서 결국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예배를 드립니다.
정말 예수님을 믿으면 그분을 예배하고 우리의 삶을 드리게 됩니다. 예수님을 예배하게 되는 기쁨은 억지로 나오지 않습니다. 주일이 지겹지 않고 즐겁고 기쁩니다. 그분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내가 영생을 얻고 그분으로 인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되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은 그리스도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이 변화됩니다. 예수님을 만나도 고통중에 있을 수 있지만 그 와중에도 찬양하고 경배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승리한 자입니다. 더 이상 어두움이 우리를 사로잡을 수 없습니다. 생명되신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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