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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 포도나무 예수님 (요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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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이 일으키신 일곱가지의 기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31절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라는 말씀을 통해서 이 기적들을 기록한 목적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는 일곱가지 기적을 나타내심과 함께 자신의 정체성을 선언하십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의 ‘생명의 떡’이라는 선언,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후의 ‘세상의 빛’, 그리고 나사로를 살리신 이후의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말씀과 아울러 여러가지로 자신의 정체성을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참 포도나무’라는 표현을 하십니다. 이 말들은 자신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선언인 셈입니다.
‘포도나무’라는 간단한 비유로 표현된 정체성의 선언이 마지막으로 나오는 이유가 있습니다.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어있으면 생명, 빛, 진리되신 능력이 우리를 통해서 열매맺는다는 축복의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통해 맺힐 십자가의 열매

예수님이 자신을 낮추시고, 모든 표적을 보여주신 이유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였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절을 보십시오.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예수님 자신과 하나님 아버지를 이렇게 묘사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 대한 묘사도 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한복음의 주제는 ‘생명’입니다. 그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 영원한 생명입니다. 예수님을 상징했던 모든 것들은 다 생명으로 귀결됩니다. 생명의 떡, 양의 문, 부활, 모두 생명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신 헌신의 대가로 우리에게 열매를 기대하십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희생과 사역의 결과로 예수님의 삶속에서 열매 맺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삶속에서 열매 맺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그 생명되시고, 빛되시고, 진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열매는 나하고는 별로 상관없는듯 합니다. 특별히 헌신된 사람들이나 그런 열매를 맺고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지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저 예수 믿는 것으로 족합니다. 천국만 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열매와 상관 없는 사람은 예수님과 상관 없는 사람이라는데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에게는 자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면서 품은 바람이 있으십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찾으려고 애를써서 하나님께 선택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고, 부르시고, 택하셨습니다. 믿음은 선물입니다. 여러분은 선택받은 사람입니다.
세상에서도 좋은 학교, 좋은 직장 등 어딘가에 뽑히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세상에서 뽑히는 것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데 하물며 여러분은 하나님이 뽑으셨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십시오. 기죽지 말고 사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신 이유는 특혜를 베풀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그분은 열매를 보기 위하여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그래서 과실을 맺기 원하시는 그분의 마음을 농부에 비유했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농부의 모습으로 소개하십니다. 왜냐하면 농부가 수고하고 땀흘려 바라는 것은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농부는 피땀 흘려 노력한 열매를 보기 원합니다. 노동의 모든 고통이 다 잊혀지게 될 기쁨이 바로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열매를 보지 못할 때의 농부의 마음은 삐뚤어져가는 자식을 바라보며 괴로워하는 부모의 마음과도 같습니다. 농부가 구하는 열매는 적당한 양의 열매가 아니라, 풍성한 열매입니다. 풍성한 열매를 맺을 때 농부에게는 기쁨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을 구원하신 것은 예수 믿고 겨우 생명을 유지하라고 하신 일이 아닙니다. 우리로 하여금 생명을 얻고 풍성하게 얻게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기경하시는 하나님

그렇다면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는 무엇일까요? 과연 지금 우리는 무슨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우리 삶의 열매는 무엇입니까? 무엇으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열매를 내놓겠습니까?
포도나무에는 포도가 열려야 하고, 사과 나무에는 사과가 열려야 합니다. 포도나무에서 포도를 맺지 못하고 있다면 가지인 우리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자신을 참 포도나무라고 하셨기 때문에 나무자체에는 문제가 없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는 바로 제자도의 열매입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을 닮아야 하고 예수님이 하신 일을 내 삶을 통해서 계속해서 이어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제자도입니다. 참 제자면 스승을 닮아가는 과정 중에 있어야 하고 그 스승이 가는 길을 계속해서 가야 합니다.
여러분,
지금 어디로 가고 계십니까?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누구를 닮아가고 있습니까?
자신의 삶속에 열매가 없는 것을 보는 것은 고통스럽습니다. 그런 중에도 우리에게는 소원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믿고 열매를 맺고 싶은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열매가 없다고 할지라도 농부되신 하나님의 바람대로, 참 포도나무 되신 예수님의 바람대로 참 열매를 맺고 싶다는 소망함이 있습니다.
10년 또는 20년을 넘게 예수님을 믿었으면 무엇인가 달라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교회가 많은데 교회도 달라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세상하고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반드시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합니다. 그런데 별로 다르지 않은 우리의 모습 때문에 가슴이 아픕니다.

우리가 맺어야 할 많은 열매가 있습니다. 전도의 열매, 봉사의 열매, 헌신의 열매, 성령의 열매들, 주께서 하셨던 일들을 계속 해야할 일들입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일입니다. 주님은 그분이 하신 일보다 더 많은 일을 우리가 할 수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세상에 나를 나타내리라 너희를 보면 세상이 나를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예수님의 제자로서 세상에 그분을 제대로 소개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피값으로 구원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것에 만족하시지 않습니다. 복음의 능력은 우리를 구원할 뿐만 아니라 삶속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합니다.
자녀를 낳은 사실로만 만족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이의 생명이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부모라면 자녀를 훌륭하게 키우고 싶은 법입니다. 바로 우리 하나님의 소원도 이와 같습니다. 그래서 열매를 맺기 원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2절을 보십시오.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농부는 열매 맺지 않는 가지를 제거 합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는 계속 놓아둘 수가 없습니다. 병들고 죽은 가지는 다른 가지에 병을 전염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병든 가지, 죽은 가지는 과감하게 잘라버립니다. 그리고 병들지 않았다 하더라도 열매맺지 못하는 가지를 놓아두면 쓸모없이 양분만 소비하기 때문에 역시 잘라버립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고민이 있습니다. ‘나도 열매 맺지 못하니 잘려 버리면 어떻게 하나?’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가 어떻게 되는지는 이렇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포도는 엄밀히 말하면 나무가 아닙니다. 사실 덩굴일 뿐이어서 나무 둥치와 가지의 구분이 없습니다. 다른 나무처럼 줄기가 든든히 서있고 가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뒤엉켜있는듯합니다. 그래서 포도나무는 목재로 쓸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좋은 땔감으로 쓸 수도 없습니다. 포도나무의 유일한 목적은 열매맺는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사람이 잘려져 나갈 가지일까요?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반드시 열매가 보입니다. 비록 시원찮은 열매일지라도 말입니다.

깨끗게하는 도구 ‘말씀’

예수를 믿고 거듭나면 반드시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생각이 바뀌고, 가치관이 바뀌고, 말이 바뀝니다. 바뀌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문제는 약간만 바뀌는데 있습니다. 어쨌든 시시한 열매를 맺더라도 그런 가지는 나무에 붙어 있을 수 있습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는 가짜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 믿고 거듭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열매가 없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부터 17장의 본문은 예수님이 11명의 제자들만 따로 모아놓고 특별히 유언과도 같이 말씀하신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성찬을 베푸시면서 이밤이 지나면 지게될 십자가를 앞에 두고 제자들이 열매 맺게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즉 그분은 이미 예수를 믿어 열매를 맺어가는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농부로서 가지를 치시는데는 목적이 있습니다. 제거해 버리는 것과 가지치기는 다릅니다. 믿는 자에게 손을 대시는 가지치기는 우리를 정비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목적은 죽이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 삶을 가지치기 할 때 마치 우리를 죽이시기라도 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삶에 더 풍성함을 이루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가지치기를 할 때는 아무데나 자르면 안됩니다. 눈을 자르면 오히려 식물을 죽입니다. 사람은 실수를 합니다. 전문가 조차도 간혹 실수를 해서 자르지 말아야 할 부분을 자르고 잘라야 할 부분을 자르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농부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수하지 않으십니다. 내 삶속에 잘라버리고 깨끗케 해야 할 부분을 하나님은 정확하게 아십니다.

이렇게 우리 삶을 깨끗케 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하나님의 도구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깨끗케 합니다. 어떤 이는 성경말씀을 보면 부담스럽다고 합니다. 성경말씀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편안하게 느낀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온전하게 산다면 말씀이 다가올 때 편안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처럼 살지도 못하면서 말씀이 들어오는데 전혀 불편한 것을 모른다면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말씀이 올 때 부담스러운 까닭은 그 말씀이 나를 깨우고, 책망하고, 의가 무엇인지 알게되어 죄책감이 생기고, 내 양심이 깨어나니까 부담스럽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위로하고, 지혜를 주고, 분별력을 주며, 능력과 용기를 주어서 내가 절망하고 캄캄할 때 어디로 가야할지를 인도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히4:12). 이것이 바로 하나님 말씀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말씀이 역사해서 우리를 기경하고 묵은 심령을 뒤집어 엎을 때 우리는 그 말씀을 계속 거부하기도 합니다. 말씀이 들어왔을 때 순종하면 열매맺게 되지만 거부하면 말씀 그 자체가 우리를 징계하고 심판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 상태가 지속되어 상태가 좋아지지 않으면 그때는 하나님이 직접 손을 대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했다고 당장 혼내시는 분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늘상 야단치는 부모는 별로 겁내지 않습니다. 정말 무서운 것은 온유하여 평상시에 야단치지 않는 아버지가 한번 매를 들면 피멍이 들지라도 잘못을 고칠 때까지 치는 경우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매를 드실 때를 정확하게 아십니다. 정확하게 우리의 교만, 경험, 자랑, 자기 의를 치십니다. 말씀이 역사하지 못하게 하는 모든 부분을 쳐내십니다.
여러분,
그런 때를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가장 큰 저주는 하나님이 여러분이 열매 맺지 못하는데도 그냥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마다 징계하십니다. 요한계시록 3장 19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사랑의 매를 맞고, 말씀과 징계를 통하여 깨끗케 된 사람은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가고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잘 믿고 신실하며 열매가 있는 사람은 그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혹독한 회초리를 경험합니다. 징계를 통하여 믿음이 성숙케되고 열매맺는 것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우리 대부분은 예수님을 믿지만 예수님 안에 전폭적으로 거하지 않습니다. 예배 시간조차도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주님 안에 거하라

요한복음을 아무리 보고 또 보아도 ‘너희가 열매를 맺어라’라는 말은 없습니다. 그 대신 ‘붙어있어라, 거하라’라고 합니다. 우리가 열매 맺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은 ‘율법’입니다. 우리의 열매는 주님 안에 거하면 저절로 맺힙니다. 우리는 열매 맺기 위해서 애쓸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 거하기 위해서 애써야 합니다.
주님이 내 안에 거하시는 것은 은혜입니다. 그러나 내가 주님 안에 머물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을 해야 합니다. 말씀안에 머무는 시간, 기도하는 시간도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바깥에 세워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살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결혼을 해서 날마다 하나됨을 위한 사랑의 노력이 없다면 부부가 서로안에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안에 거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우리를 온전하게 드려야 합니다. 온전히 주님께 순종할 수 있을 때에 주안에 거하고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열매가 없다면 주안에 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삶에 지금 열매가 없다면 지금 주님 안에 거하고 있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따라가고 섬기는 것이 감사하고 기쁘지 않다면 여러분 스스로가 열매 맺으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은 너무나 큰 축복이고 특권인 것을 아는 사람은 ‘내가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을 떠나서도 여러가지 일을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능력을 아는 사람만이 주님께 온전하게 의지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예수님을 믿지 않고 얼마든지 잘 사는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없이 잘 사는 일은 사람을 교만하게 해서 결국 삶을 허무하게하고 후회하게 만들뿐입니다.
7, 8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주님안에 거한다는 것은 말씀에 사로잡혀 충만한 것입니다. 혹시 우리의 마음속은 우리의 생각으로 가득차 있지 않습니까?
예수를 믿으면서도 말씀이 없는 사람은 기도의 열매가 없습니다. 말씀없는 기도는 나의 욕심이나 이기심을 따라 구하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그런 기도는 응답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말씀이 풍성하면 그 말씀이 내 안에서 기도의 열매를 맺습니다. 말씀에 붙들려있고 기도에 충만한 삶이 성령 충만한 삶입니다. 이런 삶에 대해서는 주님은 평안과 기쁨과 사랑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자신에게 무엇인가 더 효과적인 해결책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고백하는 사람은 자신이 할 수 없기 때문에 기꺼이 순종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로 무엇이든지 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좋지 않은 열매가 있다면 그것과 싸우지 마십시오. 주님 앞에 더 가까이 나가십시오. 그러면 말씀이 우리를 사로잡아서 우리를 경건케 하고 깨끗케 해서 삶속에서 좋은 열매가 맺히도록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서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서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지금이라도 자신의 힘을 내려 놓고 주님이 내 안에 오셔서 다스리시고 후원해 주시도록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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